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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구술 컬렉션
구술 컬렉션

김동호 구술 컬렉션

2019년 4월 24일~6월 7일까지 4회차에 걸쳐 연구자 배수경에 의해 진행된 김동호(행정)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BKR006295_01)의 서비스용 편집본 1건/구술 현장 영상 4건/구술 현장스틸 23건

공개일
2022-03-30
업데이트일
2022-08-25

컬렉션 해제

2019년 생애사 - 김동호

  본 구술은 2019년 4월 24일부터 6월 7일까지 4회차에 걸쳐 연구원 배수경이 진행한 강릉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의 원본을 편집한 것입니다.
  구술자 김동호는 1961년 7월 촉탁직으로 공보부에 입사한 후, 같은 해 9월 기획관리실 업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기획관리실에서 그가 맡은 가장 주요한 업무는 새로운 대통령 담화문이나 시책 등이 발표되면 이를 빠르게 전국 시도에 배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집보다 인쇄소 인근 여관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문화사업’과 인연을 맺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합니다. 1971년 문화예술진흥사업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구술자는 문화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가 문화과장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문화계 인사와 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언론사를 통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주요 인사들을 모아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문화예술 분야의 의견이 모여 문화예술진흥 5개년계획이 세워지고, 이듬해 8월 문화예술진흥법이 공포, 그 결과 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됩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빠르게 끝낸 후 그는 보도국장⋅공보국장 자리를 거쳐 다시 기획관리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시 문화예술진흥 5개년계획을 세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차 한국문화예술의 중추가 될 대규모 문화시설 건축에 힘썼습니다. 예술의 전당부터 국악당 건설에 이르기까지 예산을 확보하고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구술은 마치 한 편의 모험담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진행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문화예술계와의 인연은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 부임으로 드디어 영화계로 이어집니다. 공무원 출신인 그가 영진공 사장으로 온다고 했을 때, 영화인들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이에 그는 또 다시 수완을 발휘하여 일일이 영화인들을 만나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구술자의 진정성 있는 태도와 오랜 경력으로 쌓은 추진력, 청렴한 자세는 영화인들의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진공 사장을 지내면서 우수한 한국영화를 가지고 전세계 영화제들을 다니며 한국영화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영진공에서 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던 중 그는 문공부 장관의 부름을 받아 예술의 전당 사장, 문화부 차관,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의 자리를 차례로 역임합니다. 그리고 공윤 위원장 시절, 왜색영화, 폭력영화의 상영을 허가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비판을 받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나 영화계는 구술자가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1995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최를 성공시켰고, 무려 15년간 부산영화제를 아시아의 대표 영화제로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난 지금도 그는 쉬지 않고 또 다시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진공 시설부터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으로 일하던 시기까지 그의 행보는 다수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공보부 시절에 그가 쌓아갔던 경력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그가 했던 일들을 듣고 있자면, 김동호라는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뛰어난 행정력을 갖고 영화계에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5.16 이후 공보부의 행정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어갔는지, 공보부의 주된 역할은 무엇이며, 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의 성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분께 본 구술은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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