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임원식 구술 컬렉션
2016년 6월 23일~6월 28일까지 4회차에 걸쳐 연구자 배수경에 의해 진행된 영화감독 임원식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BKM011937_04)의 서비스용 편집본 1건/음성파일 5건/구술 현장 영상 5건
- 공개일
- 2022-06-24
- 업데이트일
- 2022-08-25
컬렉션 해제
2016년 생애사 - 임원식
본 구술컬렉션은 2016년 6월 23일부터 6월 28일까지 총 4회차에 걸쳐 연구원 배수경이 진행한 영화감독 임원식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의 원본을 편집한 온라인 서비스용 구술채록문입니다.
구술자 임원식에게는 항상 따라오는 말이 있습니다. ‘신필름 전속 감독’. 1950년대 후반 일본 교포 출신 유진식 감독을 만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을 하며 신상옥 감독의 눈에 띄어 신필름에 입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상옥 감독 그리고 신필름과 연을 맺게 된 구술자는 19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그의 작품 이력은 마치 신필름의 역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신필름이 홍콩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기획하던 시절, 그는 <대폭군>(1966)의 연출을 맡아 홍콩으로 건너갔습니다. 홍콩에서 다양한 특수촬영기법과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을 감상한 구술자는 누구보다 세심히 연구했고, 이러한 경험을 훗날 자신의 작품 속에 훌륭하게 담아냈습니다. <서유기>(임원식⋅하몽화, 1966)까지 마친 그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나는 매국노>(1966), <영>(1967), <밀명>(1968), <풍운아>(1968) 등의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합니다.
그러나 그가 신필름 전속 감독이라고 해서 신필름과의 작업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필름은 1960년대 말 세기상사로부터 감독을 대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에 임원식 감독이 세기상사로 가게 되었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간 세기상사에서 <벌거벗은 태양>(1970), <민비와 마검>(1970),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대감신랑>(1971),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의 작품을 연출했습니다.
1974년에 구술자는 신필름을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신필름을 나와서도 그는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이 시기 구술자의 활동에 변화를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종교영화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에서 기인했습니다. 영화계의 기독교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이 작품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는 종교지도자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부터 상영중지 결정이 내려집니다. 이에 항의하던 구술자까지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그의 활동은 다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합동영화사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 화풍흥업 기획실장을 거쳐 태창흥업 사장이 된 구술자는 인권영화를 제작하기로 마음 먹고,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를 만듭니다. 그러나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검열 통과도 쉽지 않았고, 개봉을 한 후에도 운수업계의 반대로 조기에 상영을 내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지방흥행사들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이어지며 여러 모로 타격을 입은 구술자는 제주도로 낙향을 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제주도 생활을 하던 구술자에게 기독교계에서 선교영화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고 이에 힘입어 임원식 감독은 1990년대 중반 한국기독교TV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방송국에서 퇴임한 후에도 구술자는 춘사영화제 재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 참여, 제주 4.3항쟁 영화화 등 한국영화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본 구술은 신필름의 영화 제작 시스템과 홍콩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 제작 과정 등에 대해 그 어떤 사료보다 구체적이고 명쾌한 자료임과 동시에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의 생애와 그의 창작의지, 그리고 한국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커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뜻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본 구술컬렉션은 2016년 6월 23일부터 6월 28일까지 총 4회차에 걸쳐 연구원 배수경이 진행한 영화감독 임원식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의 원본을 편집한 온라인 서비스용 구술채록문입니다.
구술자 임원식에게는 항상 따라오는 말이 있습니다. ‘신필름 전속 감독’. 1950년대 후반 일본 교포 출신 유진식 감독을 만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을 하며 신상옥 감독의 눈에 띄어 신필름에 입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상옥 감독 그리고 신필름과 연을 맺게 된 구술자는 19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그의 작품 이력은 마치 신필름의 역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신필름이 홍콩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기획하던 시절, 그는 <대폭군>(1966)의 연출을 맡아 홍콩으로 건너갔습니다. 홍콩에서 다양한 특수촬영기법과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을 감상한 구술자는 누구보다 세심히 연구했고, 이러한 경험을 훗날 자신의 작품 속에 훌륭하게 담아냈습니다. <서유기>(임원식⋅하몽화, 1966)까지 마친 그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나는 매국노>(1966), <영>(1967), <밀명>(1968), <풍운아>(1968) 등의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합니다.
그러나 그가 신필름 전속 감독이라고 해서 신필름과의 작업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필름은 1960년대 말 세기상사로부터 감독을 대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에 임원식 감독이 세기상사로 가게 되었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간 세기상사에서 <벌거벗은 태양>(1970), <민비와 마검>(1970),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대감신랑>(1971),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의 작품을 연출했습니다.
1974년에 구술자는 신필름을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신필름을 나와서도 그는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이 시기 구술자의 활동에 변화를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종교영화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에서 기인했습니다. 영화계의 기독교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이 작품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는 종교지도자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부터 상영중지 결정이 내려집니다. 이에 항의하던 구술자까지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그의 활동은 다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합동영화사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 화풍흥업 기획실장을 거쳐 태창흥업 사장이 된 구술자는 인권영화를 제작하기로 마음 먹고,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를 만듭니다. 그러나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검열 통과도 쉽지 않았고, 개봉을 한 후에도 운수업계의 반대로 조기에 상영을 내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지방흥행사들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이어지며 여러 모로 타격을 입은 구술자는 제주도로 낙향을 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제주도 생활을 하던 구술자에게 기독교계에서 선교영화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고 이에 힘입어 임원식 감독은 1990년대 중반 한국기독교TV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방송국에서 퇴임한 후에도 구술자는 춘사영화제 재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 참여, 제주 4.3항쟁 영화화 등 한국영화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본 구술은 신필름의 영화 제작 시스템과 홍콩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 제작 과정 등에 대해 그 어떤 사료보다 구체적이고 명쾌한 자료임과 동시에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의 생애와 그의 창작의지, 그리고 한국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커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뜻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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