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이달형 구술 컬렉션
2017년 6월 26일~7월 18일까지 3회차에 걸쳐 연구자 이정아에 의해 진행된 영화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이달형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BKR006221_01)의 서비스용 편집본 1건/음성파일 2건/구술 현장 영상 3건/구술 현장스틸 24건
- 공개일
- 2022-06-21
- 업데이트일
- 2022-08-25
컬렉션 해제
2017년 생애사 - 이달형
본 구술컬렉션은 2017년 6월 26일부터 7월 18일까지 총 3회차에 걸쳐 연구원 이정아에 의해 진행된 문화공보부 영화과 검열관 이달형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을 편집한 온라인 서비스용 구술채록문입니다.
구술자 이달형은 1928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청석소학교 4년을 마치고, 교하소학교에서 2년을 더 수학한 뒤 졸업하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다소 늦은 나이에 서울중앙중학교에 진학한 구술자는 중학교 6학년 재학 중 전쟁을 만나 국방부 정훈국 정훈 문관으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보며, 후에 교육 사업에 몸 담으리라 다짐했던 구술자는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를 나와 고향 파주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육사회사업복지학원을 설립하여 자비로 교재를 마련하고 중⋅고등학교 검정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몇 년 새 학생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인근 지역 학교의 건물을 빌려 수업을 진행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5.16 이후 군 복무 경력이 있었던 구술자는 파주군 교하면 면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농촌의 현실을 전하는 방송에 출연을 하게 됐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문공부 소속 서울중앙방송국으로 부터 프로그램 제작 요청을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예상치 못하게 문화공보부 행정 관료의 길을 걷게 된 구술자 이달형은 이후 문공부 기획관리실을 거쳐 문화선전국 영화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방화검열계장을 담당하게 된 그는 제작신고가 접수된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영화법에 명시된 검열 기준에 따라 제작 가능 여부를 판단하고 기안을 올려 문화선전국장의 결재를 받아 상영허가증을 발부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본인을 통해 검열을 받았던 작품들 중 특히 인상에 남는 작품으로 <총독의 딸>(조긍하, 1965), <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 개봉 당시 제명은 돌아온 여군) 등을 꼽았습니다. <7인의 여포로>의 경우 당시 검열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이만희 감독이 검찰에 기소되어 조사를 받았고, 끝내 이로 인해 실형까지 선고받았기에 구술자에게도 여러 모로 뼈 아픈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3년 정도의 영화과 보직을 지내고 국내과로 자리를 옮겨 지역별 문화원과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으며, 1972년에는 기존 덕수궁 미술관에 있던 유물들을 새로 설립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새로 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한국방송공사가 설립되면서 초대 사장인 홍경모 씨와의 인연과, 주변의 설득으로 이달형은 한국방송공사 총무과장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 언론통폐합 이후 문화방송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구술자는 지역방송국 상무이사, 사장 등을 지낸 후 1992년 은퇴했습니다.
구술자 이달형이 실제로 영화 관련 업무를 본 기간은 그의 전 생애를 돌이켜 생각해봤을 때 무척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술을 통해 검열과 관련된 행정적 절차와 당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의 검열 진행 과정을 알 수 있었으며, 영화 외의 삶 속에서도 한국의 문화 사업과 관련된 중요한 흐름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검열 실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사 연구자와 1970~80년대 문화 사업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께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본 구술컬렉션은 2017년 6월 26일부터 7월 18일까지 총 3회차에 걸쳐 연구원 이정아에 의해 진행된 문화공보부 영화과 검열관 이달형의 구술 생애사 채록문을 편집한 온라인 서비스용 구술채록문입니다.
구술자 이달형은 1928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청석소학교 4년을 마치고, 교하소학교에서 2년을 더 수학한 뒤 졸업하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다소 늦은 나이에 서울중앙중학교에 진학한 구술자는 중학교 6학년 재학 중 전쟁을 만나 국방부 정훈국 정훈 문관으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보며, 후에 교육 사업에 몸 담으리라 다짐했던 구술자는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를 나와 고향 파주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육사회사업복지학원을 설립하여 자비로 교재를 마련하고 중⋅고등학교 검정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몇 년 새 학생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인근 지역 학교의 건물을 빌려 수업을 진행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5.16 이후 군 복무 경력이 있었던 구술자는 파주군 교하면 면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농촌의 현실을 전하는 방송에 출연을 하게 됐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문공부 소속 서울중앙방송국으로 부터 프로그램 제작 요청을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예상치 못하게 문화공보부 행정 관료의 길을 걷게 된 구술자 이달형은 이후 문공부 기획관리실을 거쳐 문화선전국 영화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방화검열계장을 담당하게 된 그는 제작신고가 접수된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영화법에 명시된 검열 기준에 따라 제작 가능 여부를 판단하고 기안을 올려 문화선전국장의 결재를 받아 상영허가증을 발부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본인을 통해 검열을 받았던 작품들 중 특히 인상에 남는 작품으로 <총독의 딸>(조긍하, 1965), <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 개봉 당시 제명은 돌아온 여군) 등을 꼽았습니다. <7인의 여포로>의 경우 당시 검열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이만희 감독이 검찰에 기소되어 조사를 받았고, 끝내 이로 인해 실형까지 선고받았기에 구술자에게도 여러 모로 뼈 아픈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3년 정도의 영화과 보직을 지내고 국내과로 자리를 옮겨 지역별 문화원과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으며, 1972년에는 기존 덕수궁 미술관에 있던 유물들을 새로 설립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새로 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한국방송공사가 설립되면서 초대 사장인 홍경모 씨와의 인연과, 주변의 설득으로 이달형은 한국방송공사 총무과장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 언론통폐합 이후 문화방송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구술자는 지역방송국 상무이사, 사장 등을 지낸 후 1992년 은퇴했습니다.
구술자 이달형이 실제로 영화 관련 업무를 본 기간은 그의 전 생애를 돌이켜 생각해봤을 때 무척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술을 통해 검열과 관련된 행정적 절차와 당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의 검열 진행 과정을 알 수 있었으며, 영화 외의 삶 속에서도 한국의 문화 사업과 관련된 중요한 흐름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검열 실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사 연구자와 1970~80년대 문화 사업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께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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