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개척자들-카메라로 또 다른 세상을 열다
주제 컬렉션

개척자들-카메라로 또 다른 세상을 열다

1990년대 이전 활동을 시작한 8인의 여성감독 작품 컬렉션(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한옥희, 이미례, 김소영, 박수남 등 8인) / 장편 35편 및 단편 12편으로 구성

공개일
2020-09-01
업데이트일
2026-02-02
영화의 시각체계가 권력의 재생산에 연루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보는 주체와 그 시선을 받는 대상 혹은 아예 그 시선 밖으로 밀려난 것들 사이에 권력관계가 구성된다면, 카메라의 뒤와 앞, 나아가 카메라(의 뒤)에 동일시한 관객들과 스크린 위 이미지 사이의 (환영적) 관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메라의 뒤를 오래 점유해 온 그 ‘주체’의 다수는 남성이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과 상영되는 극장의 시선이 편향됐다면 영화의 시각체계가 관여하는 세계 역시 성차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제작 및 연구에 여성주의가 도입되고 근래 영화를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서 문화 생산물과 관련해 성차 관련 이슈가 뜨겁게 논의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여성이 카메라 뒤에 섰던 작품들을 모아 ‘개척자들-카메라로 또 다른 세상을 열다’라는 타이틀의 컬렉션으로 공개합니다. 아쉽지만 보유작품 및 컬렉션 규모의 한계로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감독들을 다 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한국 내에서 여성주의와 성차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 그러니까 1990년대 이전에 활동을 시작한 감독들에 주목하였습니다.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한옥희, 이미례, 김소영, 박수남이 그들입니다. 

이 8인의 감독들은 영화계는 물론 공적공간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극도로 억압됐던 시기 ‘소수자 주체’로서, 지배적인 시선이 보여주지 않던 존재와 시각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들과 관계 맺으며 또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영화의 시각체계와 권력 관계 자체를 동요시키고자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개척자’라는 호칭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만, 이들의 노력이 모두 전복적 결과로 이어졌다거나 저항적이었다고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뒤에 여성이 서있다는 분명한 자각과 더불어 드러나 버린 ‘세상’을 그 이전처럼 쉽게 무시하거나 전형화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본 컬렉션에서는 극영화부터 실험영화까지 장단편 총 47편의 작품이 망라되며, 각 감독별로 간단한 소개를 덧붙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원본 영상이 유실된 10편의 작품에 대하여는 시나리오 및 심의자료로 대체하였습니다. 홍은원 및 황혜미 감독의 경우는 연출이 아닌 기획이나 각본으로 영화에 참여하여 각자의 시선을 드러내고자 했던 작품을 포함시켰고,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이미례 감독에 대해서는 이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로 포함하였습니다. 

‘개척자들-카메라로 또 다른 세상을 열다’ 컬렉션을 통해 카메라 뒤에 선 여성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열어 보이고자 했던 ‘세상’을, 그 흔적과 미래를 확인하고 또 상상하며 생산적인 논의가 펼쳐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이유미(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 박남옥(1923~2017) -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선구자가 되다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일본에서 발행하는 『세계미술전집』 을 한 권 한 권 사 모으고 조선영화 최고 스타였던 김신재에게 매일 팬레터를 쓰며 영화 포스터를 수집하는, 미술과 영화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소녀였다. 여고시절 이미 163cm에 60kg의 좋은 체격과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전국체전에서 투포환 부문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여걸이기도 했다. 
《대구일일신문》 문화부 기자로 영화평을 쓰던 그녀는 1946년 전창근 감독을 만나 “대구에서 올라 온 영화학도 박군”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광희동 촬영소에서 <자유만세>(최인규, 1946), <새로운 맹서>(신경균, 1947) 등 굵직한 작업에 참여하며 영화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박남옥은 언니가 준 돈으로 ‘자매영화사’를 세우고 남편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로 <미망인>(1955)을 기획, 연출한다. 예산이 얼마 없어 영화는 16mm로 찍어야 했는데,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맡길 곳이 없자 박남옥은 딸을 포대기에 둘러업고 현장으로 나가야 했다.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200평 공지에 판잣집을 세우고 영화를 시작했지만 당시 서울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였고, 영화 기재 역시 구하기 힘들었다. 제작비 조달부터 촬영, 녹음, 편집 등 영화 전반을 다 살피면서 온갖 난관을 거쳐 완성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영화 <미망인>은 1955년 4월 2일 개봉된다. 그렇게 그녀는 선구자가 되었다.  
* 출처: 오성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한국영화박물관 2018년 기획전시Ⅱ) 일부 수정

● 홍은원(1922~1999) - 다재다능한 시네아스트, 홍일점 여성감독으로 화제가 되다

1922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한 홍은원은 교육열이 높은 집안의 재능 많은 둘째 딸이었다. 경기여고 시절부터 프랑스 영화에 심취하여 <여자만의 도시 La kermesse héroïque>(자크 페데, 1935), <망향 Pépé le Moko>(줄리앙 뒤비비에, 1937), <무도회의 수첩 Un carnet de bal>(줄리앙 뒤비비에, 1937)을 좋아했다. 
1940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간 그녀는 신경음악단 성악부에 입단하여 합창단 솔로 및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활약했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중앙방송국(현 KBS) 합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1946년 최인규 감독을 알게 된 홍은원은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의 연출부에 합류하여 스크립터 일을 시작한다. 이후 전창근, 이강천 등 유명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며 영화 수업을 이어나가다가 1959년 신경균 감독의 <유정무정>을 통해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다. 
1962년 이미 수 십여 편의 영화에서 단단하게 기초를 닦은 홍은원은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여판사의 자살을 소재로 <여판사>를 연출, 박남옥에 이어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주목받으며 “탄탄한 짜임새와 세심한 여성심리의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을 다룬 <홀어머니>(1964)와 사회 통념에 저항하는 여성의 삶을 다룬 <오해가 남긴 것>(1965) 등 자신만의 여성영화를 연출했다.  
* 출처: 오성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한국영화박물관 2018년 기획전시Ⅱ) 일부 수정

● 최은희(1926~2018) - 메가폰을 잡은 스타, 대 인기배우가 감독이 되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최은희는 속눈썹이 길고 눈이 큰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나 고집이 세서 ‘심술패기’라고 불렸고 공부보다 예체능에 능했으며 세상 구경을 해보고 싶어 했다. 우연히 방공연습을 갔다가 친구의 소개로 당시 연극계의 주요 인사였던 문정복을 알게 되 어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 최은희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춘극장>으로 성공적 데뷔,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로 영화계에 발을 디딜 때까지 연극 활동을 지속한다. 1949년 <마음의 고향>(윤용규)에서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안고 사는 젊은 부인 역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한국의 고전적인 여인상’을 보여준 배우로 1950~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대 스타가 된다. 
그런 그녀가 영화 인생의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1965년 메가폰을 잡게 된다. 망설임도 있었지만, 최은희는 카리스마도 있었고 꼼꼼하기도 한 22년 차 영화인이었다. 게다가 TV 연속극으로 인기를 끌었던 <민며느리>는 최은희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이용 할 수 있는 최선의 작품이었다. <민며느리>(1965)로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 최은희는 작품에서의 열연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신상옥과 신필름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겠지만 이후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그리고 북한에서 연출한 <약속>(1984)을 통해 최은희는 “어쩌면 배우 최은희가 꿈꾸던 또 다른 자아를 표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 출처: 오성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한국영화박물관 2018년 기획전시Ⅱ) 일부 수정

● 황혜미(1936~) - 이지적이고 감각적인 영상을 실험하다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한 황혜미는 어려서부터 미성년자 관람 불가인 영화도 몰래 들어가 볼 정도로 영화광이었다. 이화여고를 거쳐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 유학생으로 뽑혔으나 결혼 문제로 유학을 미룬다. 이후 잠시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소와 트뤼포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즐겨 보았고 기타 유럽영화에도 매우 심취했다. 
김승옥의 소설에도 매료됐던 황혜미는 귀국 후 남편 김동수의 도움으로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김수용, 1967)를 제작하며 영화계에 입문한다. 그녀는 김승옥에게 아예 연출을 맡겨 <감자>(1968)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두 번의 영화 기획 및 제작 작업을 통해 영화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첫경험>을 직접 연출한다.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첫경험>은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과 탈선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의 인정과 더불어 흥행에서도 무난한 성적을 거두었다. 70년대 초반 주류를 이뤘던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여인’의 눈물겨운 멜로드라마에서 벗어나, 불륜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것이 화제가 되었다. 황혜미는 연이어 <슬픈 꽃잎이 질 때>(1971), <관계>(1972)를 연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작품들은 필름이 전부 유실되었고, 그 지적이고 실험적인 영상을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 출처: 오성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한국영화박물관 2018년 기획전시Ⅱ) 일부 수정

● 한옥희(1948~) - 창조적 전시의 도전을 시도하다

한옥희는 “영화의 미래는, 무한이 열려진 지평선을 향해서, 끝없이 창조적 정신의 도전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고 언명한 바 있다. 이 말처럼, 1974년 한옥희는 김점선, 이정희, 한순애, 정묘숙, 왕규원 등과 “몽고족 왕실의 전설적인 여걸”의 이름을 빌려 ‘카이두클럽’/‘카이두실험영화연구회’를 결성한다. 한국영화사 최초로 실험영화를 지향하고 여성이 전면화한 영화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카이두의 이름으로 <밧줄>(1974), <2분 40초>(1975) 등 한옥희 본인의 작품을 포함한 20여 편의 실험영화가 만들어졌고 ‘실험영화페스티발’을 통해 상영운동이 벌어졌으며 ‘여성과 영화세계’라는 타이틀의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검열을 비롯한 정부 통제로 영화운동은 말할 것도 없이 메인스트림이었던 충무로조차 침체됐던 상황에서, 한옥희와 카이두클럽은 영화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도전을 시도한 셈이었다. 
1980년 독일 유학을 떠난 한옥희는 영화진흥공사 베를린 통신원 등으로 일하며 당시 한국에 잘 소개되지 않던 동구권 및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반체제 작품들을 소개하고 비평 활동을 시작한다. 1988년 귀국해서는 ‘카이두프로덕션’을 설립하여 각종 홍보영화를 제작하는 한편, 한용운의 시를 모티브로 한 <님의 침묵>(1991), 대전 엑스포 정부관 영상물로서 무려 70mm로 연출한 <달리는 한국인>(1993) 등 실험영화 작업도 이어갔다. 

● 이미례(1957~) -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상업영화를 연출하다

1957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했다. 서울 금란여중고에 다닐 때부터 교내에서 연극반을 만들어 활동했던 이미례는 연극 연출자를 꿈꾸며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한다. 그런데 재학 당 시 스승인 유현목 감독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 여성영화인이 아직도 드물었던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화제가 된다. 
1984년 이미례는 약관 27살의 나이로 비행청소년 문제를 다룬 가족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을 연출하여 그해 흥행 순위 5위를 기록하는 등 성공적인 감독 신고식을 치른다. 그리고 이듬 해 김추련을 기용하여 나이 많은 괴짜 대학생의 좌우충돌을 그린 <고추밭의 양배추>을 연출한다. 
스스로 “여감독이 아니고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영화”라는 평을 듣고 싶어 했던 세 번째 연출작 <물망초>(1987)로 이미례는 2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을 수상한다. 여성이 이 상을 수상한 것은 황혜미 감독 이래 근 20년만이었다. 
이후 <학창보고서>(1987), <영심이>(1990),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1990)를 공개한 이미례는 본인 특유의 감각으로 청춘멜로영화를 재치 있게 연출하며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상업 영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 출처: 오성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한국영화박물관 2018년 기획전시Ⅱ) 일부 수정

● 김소영(1961~) - 여성주의 비평과 영화의 언어로 역사를 번역하다

정부 통제와 여성에 대한 억압이 서슬 퍼렇던 1985년, 김소영은 <겨울 환상>과 <푸른 진혼곡>를 내어 놓는다. 시대 상황을 반영한 듯 애도와 슬픔의 정조가 흐르면서도 여성주의에 기반을 둔 시적 영화언어를 분명히 함으로써, 기존에 영화를 둘러싼 시각체계가 연루됐던 권력관계를 파열시키는 동시에 앞으로 보게 될 그녀의 영화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패기 또한 감지되는 작품들이었다. 
이후 “충무로에서 일하다가 못 버티고” 뉴욕으로 떠난 김소영은 다양한 실험영화와 영화이론을 접하며 작업을 이어가지만, 역사적 전환기였던 1987년 “미국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변영주, 도성희, 서선영 등과 여성영화집단 ‘바리터’를 결성,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에 주목한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1990)를 연출한다. “여성의 고난을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서사 중 하나”인 ‘바리데기’ 설화에서 이름을 빌려 온 바리터는 여성을 전면화하며 당대 사회 및 영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나, 계급이나 민족 같은 ‘대의’에 비해 여성의 문제가 여전히 부차적으로 치부되던 시대적 한계와도 맞서야 했다. 
199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취임한 김소영은 여성주의, 내셔널- 및 트랜스-시네마 등을 키워드로 이론과 비평 작업에 집중하다 2000년 <거류>를 필두로 한 ‘여성사 3부작’, 장편 극영화 <경>(2009), 고려인들의 흔적을 따르는 ‘망명 3부작’을 발표하며 영화 작업을 다시 이어가는 중이다. 이는 보지 못하고 말해지지 못했던 역사를, 그 흔적을, 여성과 망명자의 시선에서 혹은 그에 반사시켜 영화적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 박수남(1935~) - 국가 경계와 역사의 틈새에서 망각된 이들의 “장소”를 찾다

1935년 일본 미에현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요코하마에서 자랐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조선인이라는 자각을 갖게 되지만, 분단에 수반하여 교포 사회 역시 남과 북으로 나뉘어 반목하게 되자 어느 한쪽 편에 서는 대신에, 자신과 같이 일본, 북한, 남한의 틈새로 내몰리고 각 지역의 지배적 시선으로부터 누락 혹은 배제되는 상황에 처한 인물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1958년 발생한 통칭 ‘고마쓰가와 사건’은 박수남의 인생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한일 모두로부터 간과되며 일본 내에서 차별받고 빈곤에 시달리던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촉발한 사건이었는데,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박수남은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범인 이진우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치고 그와 서신을 교환하여 책으로 출간한다. 이후 활동의 범위를 넓힌 박수남은 민족 차별 반대 운동에 더해 강제징용 피해자, 원폭 피해자, 오키나와전투 생존자, 한일 위안부 생존자 등과 조우하여 이들을 취재하고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면서 연대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이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1986),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 <누치가 후-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2012), <침묵>(2016)이다. 이 작품들에는 식민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군사주의, 차별, 빈곤 등으로 인해 자신의 “장소”를 허락받지 못하고 국가 경계와 역사의 틈새에서 망각되어 온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박수남은 경계와 틈새를 가로 지르며 영화와 더불어 이들과 함께 자리한다. 


고정 크기 이미지

 

키워드

등록된 키워드가 없습니다.

업데이트 내역

업데이트 내역이 없습니다.

연계자료

총 0개

참고자료 · 인용 안내

등록된 참고자료 및 인용 안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