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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구술 컬렉션
구술 컬렉션

김성찬 구술 컬렉션

2022년 8월 1일~8월 26일까지 연구자 남기웅에 의해 진행된 영화 녹음 분야 스태프 김성찬의 생애사 구술 채록문(BKM013961_01)의 서비스용 편집본 1건/동영상 4건/현장사진 33건 등

공개일
2023-10-30
업데이트일
2023-10-30

컬렉션 해제

2022년 생애사 – 김성찬(녹음)  

영화인 구술사를 진행하다 보면, 영화계 다양한 분야에서 일한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할 녹음 분야도 그렇지만, 2020년 진행했던 현상 분야의 구술자 박남기처럼 영화 현장이 아닌 후반작업 단계에서 일하는 분들의 구술은 현장 작업자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 및 영화사에 대한 견해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1938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난 구술자 김성찬은 해방 후 가족들과 함께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4.3사건이 발생하면서 구술자는 전주에서 극장 매표 일을 하던 누님에게로 몸을 피해 갔고, 이곳에서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6.25전쟁이 터지며 제주도로 돌아가야 했고, 청년이 되어 다시 일자리를 찾아 전주로 옮겨왔습니다. 이때부터 구술자는 매부인 김영창을 통해 본격적으로 영사일을 배우고, <선화공주>(최성관, 1957)의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매부인 김영창은 전주 백도극장을 운영하며, 1954년 백도극장의 선전부장으로 일하던 이강천에게 연출을 맡겨 <아리랑>을 제작,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6.25 참전 실화를 다룬 <격퇴>(이강천, 1956), 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 등을 제작하고, 1959년에는 직접 연출을 맡은 <끝없이 하염없이> 등을 선보이는 등 전쟁 직후 한국영화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김영창 아래에서 계속 영화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구술자는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기술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일을 원했고, 1958년 서울로 올라와 안양영화촬영소 편집실에 입사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한국영화의 제작편수가 급격히 늘어나 편집실에는 늘 일이 많았고 구술자는 거의 촬영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다시피 하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녹음기사 이경순이 개인 녹음실을 설립하며 사람이 필요하게 됐는데, 평소 기계를 잘 만지는 구술자를 눈 여겨 봤던 녹음기사 유창국이 추천하여, 구술자는 ‘한양녹음실’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그는 녹음기사로서 본격적인 필모를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번 구술을 통해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어떠한 녹음 기술들이 사용되었는지, 그 기술마다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또 영화 속 주인공의 목소리가 되어줄 성우들,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줄 음악과 영화음악가들은 어떻게 선택되는지의 과정도 구체적으로 들려줍니다. 후시녹음에서 동시녹음으로 바뀌던 시절, 기존의 기술에 익숙해 있던 녹음기사들이 겪어야 했던 변화, 기자재가 부족하던 시절 한국영화의 환경에 맞는 녹음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이야기, 영화에서의 후반녹음 작업과 TV방송에서의 녹음 작업의 차이 등 구술자 김성찬의 생애사를 통해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에서 녹음 기술의 변화와 후반작업 과정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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