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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성

Jung Il-sung · 鄭一成

분야
촬영
데뷔작품
출격명령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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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33

영화제명 개최연도 수상부문 작품명
제6회 백상예술대상 (구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 1970 영화부문 기술상 지하실의 7인
제10회 대종상 영화제 1971 촬영상 화녀
제15회 부일영화상 1972 촬영상 화녀
제8회 백상예술대상 (구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 1972 영화부문 기술상 화녀
제13회 대종상 영화제 1974 촬영상 국회푸락치

주요 경력

1944년
규슈 고쿠라 지역으로 피란, 그곳 소년단에 편성되어 야타 철공소에서 작업
1945년 12월
해방 후 시모노세키 항으로 옮겨감
1946년 2월
한국 입국
194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입학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부산으로 피란

영화인 정보조사

정일성은 1929년 도쿄에서 출생했다. 도쿄 제 2공업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 공대 기계 공학과를 졸업했다(영화평론). 전쟁으로 직업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공보원(USIS)에서 소일 삼아 촬영기사 일을 했다(말). 공보원 재직 당시 대학 선배였던 정인엽 촬영기사의 공군영화 <출격명령>(1954, 다른 제목: <돌격명령>)에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6?25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정의의 진격>(1951)을 찍었던 저명한 카메라맨인 김학성 촬영기사 밑에서 3년간 조수생활을 거친 뒤 1957년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 원제: 지상의 비극)로 데뷔했다(영화평론). 두 번째 영화인 이봉래 감독의 <구름이 흩어질때>(1962)를 촬영한 이후 아시아영화재단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유학을 통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붉은 수염>의 제작에 참여(B카메라)하면서 일본의 제작기법을 배웠다(경향신문a, 주간조선). 정일성은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색체를 만들어 나갔다. 1980년 유현목 감독과 <사람의 아들>을 촬영하던 중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쉬고 있을 무렵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1981)의 촬영을 제안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정일성과 임권택은 평생의 파트너가 되었고 이후 태흥영화사의 이태원을 만나면서 <장군의 아들>, <태백산맥>, <서편제>, <취화선>, <하류인생> 등을 함께 만들며 ‘충무로의 황금트리오’로 불리었다(경향신문b, 세계일보). 정일성은 국내 최초의 촬영감독이기도 하다. 촬영기사란 용어가 일반적이었던 당시 <만다라>에서 국내 최초로 촬영감독이란 자막이 사용되었다(네이버캐스트). 1987년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에 참여했다가 영화계약을 파기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88년에는 올림픽 기록영화 총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경향신문c). 영화계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촬영감독으로는 처음으로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정일성은 한국의 서정성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영상미학의 대가로 추앙받고 있다. * 참고문헌 세계일보 1999년 6월 21일자 15면. 완벽한 빛과 앵글 추구하는 충무로 고집불통 영화판의 영원한 젊은이 정일성 촬영감독,《주간조선》, 1995년 3월 23일 발행, 62~64쪽(KMDS). 경향신문a 1996년 4월 15일자 31면. 경향신문b 1996년 4월 18일자 31면. 경향신문c 1996년 4월 20일자 31면. 《영화평론 12호》, 한국영화평론가협회, 2001, 160쪽. 영화 촬영감독 정일성, 영상미학 우듬지의 열린 세계(대중문화의 대가를 찾아서 2),《말》, 민주운동언론협의회, 1995년 6월 발행, 202~207쪽(KMDS).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72) [작성: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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