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 59
수상내역 1
| 영화제명 | 개최연도 | 수상부문 | 작품명 |
|---|---|---|---|
| 제1회 대종상 영화제 | 1962 | 편집상 | 언니는 말괄량이 |
주요 경력
- 제4대 영화감독협회 회장 역임
- 한형모프로덕션 설립
영화인 정보조사
1917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만주 신경미술학교(新京美術學校)를 졸업한 후 만주 미쓰고시(三越)백화점에서 간판을 그렸다고 한다. 귀국 후 극단 신태양(新太陽)에서 무대미술을 담당했으며, 최인규 감독의 <집없는 천사>(1941)에 미술팀으로 참여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이후 일본 도호(東寶)영화사 촬영부에 입사하여 촬영을 배웠으며, 최인규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과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국제영화, 한국영화감독사전). 해방 후에도 최인규와의 협업을 이어나갔으며 <자유만세>(1946)와 <죄없는 죄인>(1948)을 촬영했다. 감독 데뷔는 김영수가 각본을 쓴 <성벽을 뚫고>(1949)였으며, 전쟁이 나자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영화촬영을 하면서 <정의의 진격>(1951)을 만들었다(한국영상자료원). 전후 상업영화 복귀작은 자신의 이름을 딴 한형모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제작, 감독한 <운명의 손>(1954)이었다. 이를 필두로 <청춘쌍곡선>, <자유부인>(1956), <마인>, <순애보>(1957) 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스릴러 등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겸비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정비석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자유부인>은 개봉년도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논란을 끌어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사랑하는 까닭에>(1958), <여사장>(1959), <질투>(1960), <천국과 지옥>(1963) 등의 작품에서는 연출과 촬영을 겸했으며, <왕자 호동>(1962)은 제작까지 겸한 작품이다. 음악 산업을 담은 두 편의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6)와 <엘레지의 여왕>(1967) 연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2년 미국 유니버설사의 초청으로 특수영화촬영기술을 연수 받기도 했다(경향신문). 1999년 9월, 82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동아일보).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82년 6월 25일자 2면 동아일보 1999년 9월 23일자 21면 韓國映畵人百人選(一), 『국제영화』 제4권 제10호(1958년 12월 발행).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1950년대의 한국영화』, 이채, 2004, 83-97쪽.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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