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 58
수상내역 2
| 영화제명 | 개최연도 | 수상부문 | 작품명 |
|---|---|---|---|
| 제13회 대한민국예술원상 | 1968 | 연극·영화·무용 부문 | - |
| 제1회 춘사국제영화제 (춘사영화제) | 1990 | 특별공로상(추서) | - |
주요 경력
- 1922년
-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서 6개월 동안 수련
- 1927년
- 할리우드로 가기 위해 부산에서 화물선 헤이안환(平安丸)을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가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 경도(京都) 신흥(新興) 키네마촬영소에 입소, 조감독 임명 후 3년 간 연출수업
- 1932년
- 서울로 돌아온 뒤 <임자없는 나룻배>로 감독 데뷔
- 1937년
- 성봉영화사 설립
- 1942년
- 조선영화주식회사 설립으로 인해 성봉영화사가 통합되자 만주로 떠남
- 1944년
- 강제징용으로 노역
영화인 정보조사
1904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중학에서 수학하고, 영화감독이 되고자 일본 제구기네마사에 입사하여 연출을 배웠다. 귀국하여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26번째 영화감독이 되었다(이청기).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어느 평론가는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된 영화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온 조선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평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a). <임자없는 나룻배>에서는 문예봉을, <바다여 말하라>(1935)에서는 현순영을 데뷔시켰다(김정혁; 김한). 1937년 발표한 <나그네>로 좋은 평을 얻었다. 임화는 이 영화를 ‘토키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조선영화라고 극찬하며, 영화사적으로 나운규의 <아리랑>과 유사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했다(임화). 1941년 <창공>을 마지막으로 시대적 여건에 의해서 해방될 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이청기). 해방 직후에 라디오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화하며 다시 현장에 복귀하였다. 전쟁 직후 연출한 <춘향전>(1955)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전후 한국영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출자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춘향전>은 대법원장 김병로의 아들 김재중의 출자를 받아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출자자인 김재중은 개봉하기 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춘향전>은 전국에서 1억7천만원의 수입을 올렸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하였다(동아일보b). 1974년 주변의 도움으로 은퇴작 <남사당>을 연출하였다(동아일보c). 평생 23개의 작품을 연출한 이규환은 1982년 7월 4일에 사망하였다(동아일보d).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2년 9월 14일 5면. 동아일보b 1972년 11월 29일자 5면. 동아일보c 1974년 7월 30일자 5면. 동아일보d 1982년 7월 5일자 11면. 이청기, 「韓國映畵의 前史時代 및 發生期의 特性에 關한 硏究」, 『藝術院論集』제6집, 1967, 229~248쪽. 김한, 「미술학교를 나와서, <淑英娘子傳>에서 <집 없는 天使>에 이르기까지」,『삼천리』제13권 제1호, 1941년 1월호, 222~226쪽. 임화, 「朝鮮映畵發達小史」, 『삼천리』제13권 제6호, 1941년 6월호, 196~205쪽. 김정혁, 「朝鮮 映畵監督論」, 『삼천리』제13권 제6호, 1941년 6월호, 226~229쪽.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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