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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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 1920년
- 동아일보 창간기자
- 1922년
- 박승희 등과 토월회 창설
- 1921년
-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
- 1923년
- 신극 연구단체 토월회 창립 회원
- 1926년
- 매일신보 사회부 부장
- 1929년
- 동양영화회사 근무
- 1935년
- 동양극장 전무
- 1938년
- 경성방송국 연예주임
- 1940년
- 조선연극협회 회장
- 1942년
- 조선연극문화협회 초대 이사장
- 1947년
- 전국연극예술협회 이사
- 1948년
- 서울시청 공보처장
- 1949년
- 서울시 비서실장
- 1949년
- 한국무대예술원 원장
- 1952년
- 국방부 종군극작단 단장
- 1959년
-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 1961년
- 한국방송문화협회 회장
- 1974년
-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 1977년
- 한국방송극작가협회 고문
영화인 정보조사
1899년에 태어났다. 192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서 「고독에 우는 모녀」로 2등에 당선되고, 그해 창간된 동아일보의 사회로 기자로 입사한다(동네). 1921년 조선일보의 도쿄 특파원으로 있는 동안 일본 니혼대학의 예술과에서 수학하기도 한다. 1922년 귀국하여 도쿄 유학생 중심으로 구성된 신극 연구단체 토월회를 함께 창립하는 한편,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일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한다(김남석). 1930년대 중반부터 연극 극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1940년부터는 일본 총독부가 주도하는 조선 최대의 연극조직 ‘조선연극협회’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 통치에 협력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1947년에 전국연극예술협회의 이사가 되고(경향신문a), 1948년 서울시청의 공보처장이 된다(경향신문b). 한국 전쟁 당시에는 국방부 종군극작단의 단장으로 활동하고, 1950년대 중반 이후로 라디오 방송극, 1960년대 이후로 TV드라마의 방송 작가로 활동한다. 각본을 썼던 라디오 방송극, TV드라마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 되었으며, 그 작품들은 <장희빈>(1961), <인목대비>(1962), <신문고>(1963),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 <요화 장희빈>(1968), <마지막 활태자 영친왕>(1970) 등 사극이 주를 이룬다. 1970년대 한국방송작가협회와 한국방송극작가협회 고문으로 일하고, 1976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영화사들의 대작사극영화 제작을 유도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극 소재의 선정 위원 중 한명으로 활동하기도 한다(동아일보). 1981년 사망하였으며, 1995년 그가 작사했던 홍도야 우지마라가 새겨진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47년 11월 9일 2면 경향신문b 1948년 4월 30일 2면 동아일보 1976년 2월 19일 8면 김남석, “식민지 시대의 연극인 이서구 연구-1930년대 조선 연극계 관련 활동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43권(2010년), 344~345쪽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 동네 (http://dongne.donga.com/2009/10/12/d-srory-26-%E2%80%98%ED%99%8D%EB%8F%84%EC%95%BC-%EC%9A%B0%EC%A7%80-%EB%A7%88%EB%9D%BC%E2%80%99%EC%9D%98-%EC%9D%B4%EC%84%9C%EA%B5%AC-%EC%84%A0%EC%83%9D%EB%8F%84-%EB%8F%99%EC%95%84%EC%9D%BC%EB%B3%B4/) [작성: 황미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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