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성범

Gang Seong-beom · 姜聖範

분야
미술, 배우
데뷔작품
애련송(환무곡) (1939)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22

전체보기

수상내역 0

등록된 수상내역이 없습니다.

주요 경력

1933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회원
1937년
극단 인생극장(人生劇場), 중앙무대(中央舞臺) 단원
1938년
극연좌(劇硏座), 화랑원(花郞苑) 낭만좌(浪漫座) 좌원
1939년
극단 고협(高協) 단원
1941년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단원

영화인 정보조사

영화미술가, 무대장치가.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한 직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극연)에 가입했다고 한다(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33~34년 당시에는 도구제작이나 조명 등의 역할을 맡았으나, 1936년 무렵에는 미술부의 장치 담당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a, b, c, d). 강성범이 영화에 뛰어들게 된 계기 역시 극연을 통해서였는데, 1937년부터 극연 영화부가 제작하고 극연 회원이 대거 참여했던 영화 <애련송>(1939)에 미술 담당으로 참여하면서였다(동아일보e). 이후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가 제작하고 윤봉춘(尹逢春)이 감독을 맡은 <신개지>(1942)에서도 미술을 맡았다. 무대 미술가로서의 활동은 극연의 후신인 극연좌(劇硏座) 뿐 아니라 1937년 창립된 인생극장(人生劇場)과 중앙무대(中央舞臺), 1938년의 화랑원(花郞苑)과 낭만좌(浪漫座), 1939년 고협(高協)의 정기공연 프로그램이나 회원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활발했다(매일신보a, 동아일보f, g, h, i). 1941년 연극신체제운동 시기에 강성범은 ‘국민연극’을 표방한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에서 장치를 담당했는데 “농촌이나 농가를 잘 묘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한국문화예술진흥원, 매일신보b). 해방 후 그는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등 영화미술에 보다 활발히 가담하는 한편, 유치진이 주도하던 국립중앙극장의 신극 운동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50년 3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6월 국립극장 제2회 공연에서 상연한 <뇌우>에서는 사실적인 효과를 주는 인공 강우 장치로 큰 호평을 받았다(서울신문, 이미원). 전쟁 발발로 인해 시작된 부산 피난생활부터 1950년대 초반 한동안 강성범은 김정환(金貞桓)과 함께 무대미술을 독보적으로 주도했다고 하며(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50년대 후반에는 <춘향전>(1955) 이래로 1961년까지 영화도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1961년 5월 사망했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61년 5월 25일자 4면 동아일보a 1933년 2월 9일자 4면 동아일보b 1934년 4월 18일자 3면 동아일보c 1936년 2월 28일자 4면 동아일보d 1936년 7월 7일자 7면 동아일보e 1937년 10월 29일자 5면 동아일보f 1938년 2월 5일자 5면 동아일보g 1938년 6월 20일자 3면 동아일보h 1938년 7월 4일자 2면 동아일보i 1938년 12월 24일자 5면 매일신보a 1937년 12월 8일자 4면 매일신보b 1941년 7월 27일자 4면 서울신문 1950년 3월 11일자 이미원, 「연극비평: <뇌우>- 국립극장 신임 예술감독의 선택」, 『연극평론』 복간13호(통권 33호), 151-157쪽.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편, 『문예총감: 개화기~1975』,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413-419쪽. [작성: 김한상]

연계 정보

불러오는 중입니다.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