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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

Choi Wan-gyoo · 崔完奎

분야
제작/기획
데뷔작품
집없는 천사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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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3년 근무
1935년
고려영화주식회사(高麗映畵株式會社) 창립, 이사
1938년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 영업부 주임
1942년
조선문화환등주식회사(朝鮮文化幻燈株式會社) 대표
1946년
고려영화주식회사(高麗映畵株式會社) 대표

영화인 정보조사

1905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으며, 경성에서 보성중학교(普成中學敎)를 졸업한 후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서 3년간 은행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a, b). 1935년 동생인 최인규(崔寅奎)와 함께 자본금 5만원으로 신의주 본정에 고려영화주식회사(高麗映畵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이사직을 맡았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c, 동아일보a, 경향신문b). 이후 경성으로 근거지를 옮긴 두 사람은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1938년 당시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에서 최완규는 영업부 주임을, 최인규는 녹음부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조광). 이후 감독 데뷔한 최인규가 1941년 이창용(李創用)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 제작으로 만든 <집없는 천사>에서 최완규는 기획을 맡았다. 그는 1942년 전쟁으로 생필름이 부족한 영화를 대신해서 환등을 국책선전용으로 제작하는 조선문화환등주식회사(朝鮮文化幻燈株式會社)에서 상무로 근무하기도 했다(매일신보). 해방 후에는 최인규와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재정비하고 <자유만세>, <독립전야>, <죄없는 죄인>, <파시> 등을 기획, 제작했다. 전쟁 후에도 고려영화사 대표로 계속 제작업을 한 것으로 보이며, 1957년에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韓國映畵製作者協會)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동아일보b, 경향신문a). 1970년 “한국 영화문화의 향상”을 목표로 학술연구지 『영화문화연구(映畵文化硏究)』를 창간하기도 했다(매일경제). 동생 최인규가 납북된 후 볼 수 없던 <자유만세>의 프린트를 보관해오던 그는 1975년 이를 공개, 한국영화진흥공사에서 상영했다고 하며, 이듬해에는 10월 문화의 달 기념 유공영화인 표창을 받았다(경향신문b, c).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56년 4월 13일자 4면 경향신문b 1975년 6월 28일자 4면 경향신문c 1976년 10월 21일자 8면 동아일보a 1935년 4월 12일자 4면 동아일보b 1956년 3월 13일자 4면 매일경제 1970년 4월 11일자 6면 매일신보 1942년 10월 10일자 2면 生長發展하는 朝鮮演藝界, 『조광』제4권 제7호(1938년 7월 발행)한국근현대인물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a http://db.history.go.kr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4(三一運動 IV), 한국사데이터베이스b http://db.history.go.kr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7년판), 한국사데이터베이스c http://db.history.go.kr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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