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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1898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김영환은 휘문의숙을 졸업하자 당시 신흥예술인 영화에 깊이 빠졌고, 1924년 단성사의 영화해설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실제로 영화를 천직으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무렵 단성사가 촬영부를 두고 첫 작품으로 <장화홍련전>(1924)를 제작하게 되자 각색과 해설을 맡았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이어서 단성사 촬영부와 연결된 금강키네마에서는 제1회 작품으로 이구영 감독의 <낙화유수>(1927)를 제작하였다(조선일보a). 김영환은 <낙화유수>의 원작과 각색을 담당하였다(조선일보b). 1928년에는 금강키네마와 서광키네마의 합동작품인 <삼걸인(세동무)>의 원작과 각색은 물론이고 감독을 맡았다. 이 작품에는 이원용, 이재현, 추청운, 복혜숙 등이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검열 때문에 제목을 <삼걸인>에서 <세동무>로 바꿔야 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b). 이외에도 팔봉 김기진 원작의 <약혼>과 <젊은이의 노래>의 각색과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동아일보c). 김영환은 영화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신아리랑>을 편작하였으며, <세동무>의 주제가와 <낙화유수>의 주제가인 <강남달>을 작사, 작곡하기도 하였다(최창호). 1929년에는 콜롬비아축음기회사에서 음반 취입을 하기도 하였다. 음반 취입을 위해 김영환은 복혜숙, 임방울 등과 함께 콜롬비아축음기회사의 오사카 지점에 가기도 하였다(동아일보d). 뿐만 아니라 김영환은 변사로서도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26년에 나운규의 <풍운아>의 해설을 통해 명변사로 알려졌다고 한다(최창호). 다른 사람의 영화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도 직접 해설을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약혼>이 인천 애관에서 상연될 때, 김영환이 직접 해설을 하였다(동아일보c). 1931년 조선극장 영화부가 제작한 <연애광상곡>의 각본과 감독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1936년 38세의 한창 나이로 요절했다고 한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7년 8월 17일 석간5면. 조선일보b 1927년 10월 8일 석간 3면. 동아일보a 1928년 3월 3일 5면. 동아일보b 1928년 5월 8일 3면. 동아일보c 1929년 7월 21일 3면. 동아일보d 1929년 11월 9일 5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최창호 외.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한국문화사(영인), 200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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