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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 1920년
- 일본 오사카 매일신문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함
- 1923년 5월
- 귀국 후 일간지에 영화관련 글 기고
- 1924년 11월 27일
- 조선배우학교 설립
- 1925년
- 겨울 단성사 입사, 촬영부 및 선전부 담당
- (저술내용)「조선영화계의 과거ㆍ현재ㆍ장래」, 조선일보, 1925.11.23~12.7
- 「사건으로 본 영화계 이면사」, 『영화예술』, 1970년 11월호~1971년 12월호
영화인 정보조사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오사카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5월 귀국하여 일간지에 필명인 이홍원으로 영화관련 글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1924년 <장화홍련전>을 통하여 각본가로 데뷔했다(김종원). 같은 해에 이구영은 현철과 함께 조선배우학교를 설립을 준비하였다. 조선배우학교는 서울 종로구 와룡동 72번지 변사 김덕경의 집 2층에 설립되었다. 학교는 약간의 입학금 외에 수업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강사는 현철과 이구영이었다. 1기로 입학한 학생들은 복혜숙, 이금룡, 왕평, 박제행 등이었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김종원). <장화홍련전>의 성공에 힘입어 이구영은 이필우와 함께 고려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쌍옥루>(1925)를 기획, 제작했다(조선일보a). 김택윤, 조선권번 기생 김소진을 남녀 주인공으로 한 <쌍옥루>는 촬영 기한이 길어져 배우가 추가 개런티를 요구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후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입사하여 나운규의 <아리랑>, <금붕어> 등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의 홍보를 담당했다(대중예술인 사전). 1926년에는 단성사 촬영부를 설립하여 <낙화유수>를 만들었다(조선일보b). 이구영의 동생인 이정숙이 부른 <낙화유수>의 주제가 <강남달>도 큰 인기를 끌었다(김종원). 이구영은 1926년 변사, 악사, 영사기사 등 극장 종사자들을 모아 삼우회를 만들고, 1927년에는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참여했으며, 1931년에는 영화인 친목단체 청족회를 구성하는 등 당시 영화계에서 중심적 인물로 활동했다(대중예술인 사전). 1930년대에는 <아리랑 그 후 이야기>(1930), <수일과 순애>(1931), <갈대꽃>(1931) 등의 각본, 연출을 맡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뚜렷한 활동 기록이 드러나지 않다가 해방 이후 윤봉춘과 함께 계몽문화협회를 세우고 <안중근사기>, <삼일혁명기>, <유관순> 등의 영화 연출 및 각본을 맡았다(대중예술인 사전; 김종원).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4년 12월 13일 3면. 동아일보b 1925년 11월 22일 5면. 조선일보a 1925년 8월 24일 조간 3면. 조선일보b 1927년 8월 17일 석간 5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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