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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 1934년
- 재일본 고려극단(高麗劇團) 단원
- 1935년
- 재일본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 좌원
- 1936년
-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 창립 회원
- 1938년
- 극단 낭만좌 (浪漫座) 단원
- 1940년
- 극단 조선무대(朝鮮舞臺) 단원
- 1943년
- 극단 태양(太陽) 단원
- 1946년
- 극단 예술극장(藝術劇場) 동인
-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 회원
영화인 정보조사
평양 출생으로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연극과를 졸업했다(동아일보b). 본명은 박한구(朴漢九)다(삼천리). 유학 당시 재일조선인 연극운동에 가담하여 동경조선어극단의 후신으로 1934년 발족한 고려극단(高麗劇團) 연기반 단원으로 활동했다(박영정).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도호(東寶), 쇼치쿠(松竹) 등 영화사와 관계하여 영화배우로서 훈련도 받았다고 한다(동아일보b). 1935년 김파우와 김두용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에 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들 중 일부가 귀국하여 1936년 조직한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박영정). 박학이 배우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8년 1월 창립한 극단 낭만좌(浪漫座)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동아일보a).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진우촌(秦雨村) 번안으로 공연한 <묘지>(셰익스피어 원작 <햄릿>의 묘지 장면)에서 박학은 햄릿 역을 맡아 입상했다(동아일보b). 같은 해 극광영화제작소(極光映畵製作所) 소속으로 출연한 영화 <어화>에서는 “영화에서 만히 퍼스날리티를 살릴 수 잇는 연기자”라는 호평을 받았다(동아일보c). 한편 전쟁 국면에서 박학 역시 전시체제 동원을 위한 연극 활동에 가담했는데, 최남주(崔南周)의 조선영화주식회사(朝映)가 “총후민중의 정신생활”을 위해 1940년 조직한 동인제 극단 조선무대(朝鮮舞臺)와, 극착가 김태진(金兌鎭)이 주도하던 극단 태양(太陽)에서 동인으로 활동했다(동아일보d, 민족정경문화연구소). 태양에서 창립공연으로 1943년 올려진 <그 전야(前夜)>는 조선군 보도부의 추천작으로 박학과 유계선(劉桂仙)이 주연을 맡았다(민족정경문화연구소). 해방 후 그는 극단 예술극장(藝術劇場)의 동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에서 간부직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자유신문b, c). 이규환 감독의 1948년작 <갈매기> 등 영화에도 출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익 청년단에게 공연 중 테러를 당하거나, 연극동맹 활동으로 검거되는 등 탄압이 심해지자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자유신문a, 경향신문, 한국연극). 스타니슬라프스키나 메이어홀드 등 “근대 리얼리즘 연기술을 확립한 사람”으로 평가된다(유민영).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47년 8월 21일자 2면 동아일보a 1938년 1월 30일자 5면 동아일보b 1938년 2월 20일자 4면 동아일보c 1938년 12월 16일자 4면 동아일보d 1940년 5월 30일자 5면 자유신문a 1947년 7월 13일자 2면 자유신문b 1947년 8월 21일자 2면 자유신문c 1948년 7월 21일자 2면 映畵,演劇人의 本名 調査狀, 『삼천리』 제13권 제6호(1941년 6월 발행) 특별좌담 북한연극인 안녕하십니까, 『한국연극』 제25권 제8호(2000년 7월 발행) 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親日派群像』, 삼성문화사, 1948 박영정, 『한국 근대연극과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연극과인간, 2007, 98-114, 143-179쪽 유민영, 『한국 인물연극사 2』, 태학사, 2006, 570쪽.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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