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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 1938년
- 이구영(李龜永), 이명우(李明雨), 김태진(金兌鎭), 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개최
영화인 정보조사
김유영의 감독 데뷔작은 1928년의 <유랑>이었다.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제작한 이 영화는 이종명(李鍾鳴)의 원작을 김영팔이 각색하였고, 임화와 조경희가 주연을 맡았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같은 해, 임화, 추적양, 남궁운과 함께 서울키노를 조직한 김유영은 서울키노 제1회 작품인 <혼가>(1929)에서도 감독을 맡았다. <혼가>는 고향을 떠난 세 젊은이의 발자취를 통해 조선의 현실을 조망하려한 작품이었다. 임화가 이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으며, 손용진이 촬영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1930년 4월 김유영은 서광제, 김기진과 함께 서울키노를 부활시켰고, 감독부를 담당하였다. 서울키노는 조명희 원작의 <낙동강>을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중지하였다. 계획에 의하면 김유영이 감독을 맡는 것이었다. 결국 서울키노는 <낙동강>을 대신하여 <화륜>(1931)을 제작하였다. <화륜>의 시나리오는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소속인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과 김유영이 공동으로 쓴 것이었다. 김연실과 석금성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김유영은 감독을 맡았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조선일보e). <화륜>을 연출한 후 김유영은 영화 활동은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아마도 임화가 “<화륜>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반동영화를 비판하는 때보다도 일층 가혹 무자비한 것이 요구된다”며, 김유영을 공격한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일보f). 이 시기 김유영은 노동자 농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연극을 선택하였다. 1931년 김유영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연극을 일반대중에게 보여주겠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이동식소형극장 결성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주로 공장과 농촌에 있는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공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이 극단의 고문은 강천희가 맡았는데, 김유영은 연출부에 소속되었다. 이동식소형극장의 상영목록에는 이효석의 <다난기 기록>, 석일량의 <작년>, 김영팔의 <부음>을 비롯하여, 김유영이 쓴 <하층소동>도 포함되어 있었다(동아일보c). 김유영을 “이론을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던 심훈의 말이 생각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심훈). 얼마 후에 김유영은 서광제와 함께 일본 교토에 있는 동활(東活)키네마에서 3년 동안 영화를 공부할 목적으로 1932년 5월 일본으로 떠났다. 김유영은 감독부에 서광제는 각본부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였다(동아일보d). 그 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1934년 조직된 조선영화제작연구소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영화의 진실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영화 제작을 표방하였다(동아일보e). 그러나 1945년 발생한 진주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여 간의 재판을 통해 1935년 12월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풀려나왔다(동아일보f; 동아일보g; 동아일보h).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김유영은 <애련송>(1939)을 통해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최동금의 원작을 이효석이 각색한 <애련송>은 김유영의 복귀작이자, 첫 번째 발성영화였다. 녹음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시스템을 빌려서 사용하였다. 이 영화의 대사는 유치진, 미술은 강성범, 음악은 홍난파가 참여하는 등 각계의 권위자가 참여한 것이 주목된다(동아일보i). 영화는 1938년 상반기에 개봉되었다. 이어서 김유영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3회 작품인 <수선화>(1940)의 감독을 맡아 감독으로서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 했다. <수선화>를 촬영하는 도중 김유영은 원래 가지고 있던 신장염의 상태가 악화되어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병원으로 옮겨진지 보름 여 만인 1940년 1월 4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김유영은 결국 사망하였다. 그의 유작이 된 <수선화>는 해방 후 <정열>이라는 제목으로 1948년 6월 4일부터 수도극장에서 재상영된 바 있다(동아일보j; 동아일보k; 동아일보l; 동아일보m; 평화일보). 안석영은 김유영을 회고하며, “황색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그 긴 머리를 너풀거리며 거리를 것는 그 모습”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안석영).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8년 1월 22일 석간3면. 조선일보b 1928년 4월 1일 석간3면. 조선일보c 1930년 4월 28일 석간 3면. 조선일보d 1930년 6월 7일 석간 5면. 조선일보e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조선일보f 1931년 3월 25일 동아일보a 1928년 6월 20일 3면. 동아일보b 1929년 1월 26일 8면. 동아일보c 1931년 11월 14일 4면 동아일보d 1932년 5월 15일 5면 동아일보e 1934년 5월 2일 3면. 동아일보f 1934년 8월 28일 2면. 동아일보g 1935년 1월 26일 2면. 동아일보h 1935년 12월 10일 2면. 동아일보i 1937년 10월 29일 5면. 동아일보j 1939년 11월 16일 5면. 동아일보k 1939년 12월 15일 5면. 동아일보l 1940년 1월 5일 1면. 동아일보m 1940년 4월 22일 1면. 평화일보 1948년 6월 5일, 하단 광고.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안석영, <出色의 名監督들, -故 羅雲奎·沈薰·金幽影>,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년 6월호.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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