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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제 대표 이미지

서광제

Seo Gwang-je · 徐光霽

1906 ~

분야
감독, 배우
데뷔작품
유랑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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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1928년
조선예술영화협회 작품인 〈유랑〉에 출연하면서 영화계 입문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회원 가입
조선시나리오라이터협회 창립회원
1930년
영화평론활동 시작. "영화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임무", "나치즈 독재 이후 독일의 영화계", "영화의 리얼리즘", "조선영화의 전망" 등 기고
1931년
<화륜> 공동 각색을 통해 시나리오 창작 시작

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안종화, 김을한 등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연구생으로 들어가면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제작한 작품은 1928년의 <유랑>이었다. 김유영의 감독 데뷔작이었다. 임화 주연의 이 작품에 서광제도 배우로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강호 감독의 <지지마라 순이야>(1930)에도 출연하였다.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서울키노로 개편하고 제작한 <화륜>(1931)에서는 각본과 편집을 맡았다(동아일보b). <화륜>의 각본은 안석영, 이효석, 서광제, 김유영이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를 만든 후 <<중외일보>>에 공동으로 연재했던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었다(동아일보c). 평론가로서 서광제는 조선 영화를 비평하고, 외국의 이론을 소개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동아일보에 러시아 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개하거나, 조선 영화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논평하는 글을 실었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카프의 강경파인 임화와 대립하면서 카프를 탈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영화 기업화론으로 전향하고 할리우드의 고전적 리얼리즘 영화의 미학에 입각하여 평론활동을 하였다(대중예술인 사전).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광>> 등에 그의 평론이 다수 남아있다. 1932년 김유영과 함께 영화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유영은 감독부, 서광제는 각본부에서 공부할 예정으로 출발하였다(동아일보f). 언제 돌아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1933년 10월에는 연극배우 김선초와 결혼하였다(동아일보g). 1938년 성봉영화원과 일본 도호가 합작하여 제작한 <군용열차>의 감독을 맡았다. 제3국의 스파이에게 매수된 군용열차의 차장이 죄과를 뉘우치고 스파이를 일망타진하여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내용의 군국주의 영화였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차용하여 만들었다(대중예술인 사전). 1939년 고려영화사에 입사하여 차기작 <북풍>을 준비했지만 개봉하지는 못했다(동아일보h). 1939년에는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의 평의원을 맡았다(일제협력단체사전). 해방 후에는 카프 경력을 바탕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공간에서의 영화운동을 주도해 가는 양대 축으로서 강경파인 추민과 논쟁을 벌였다. 추민은 영화 동맹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한 반면, 서광제는 좌익소아병과 정치소아병을 비판하고 영화 예술과 정치의 분리를 통한 영화 동맹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한국영화사연구). 이후 월북하였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8년 2월 10일 3면. 동아일보b 1930년 10월 8일 5면. 동아일보c 1931년 8월 2일 5면. 동아일보d 1931년 9월 7일, 11일, 13일, 16일, 17일, 18일, 20일, 23일 5면. 동아일보e 1931년 8월 24일 4면. 동아일보f 1932년 5월 15일 5면. 동아일보g 1933년 10월 5일 6면. 동아일보h 1939년 11월 14일 5면. 경향신문 1957년 3월 2일 4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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