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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 1927년 11월
- 일본 현대무용계의 거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공연을 경성공회당에서 관람 후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
- 1928년
- 1월초 도쿄로 건너가 4월에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 입소
- 1929년
- 봄 〈어떤 움직임의 매혹〉을 도쿄(邦樂座)에서 발표, 이후 이시이무용단의 일원으로 동양권 주요 도시 순연
- 1932년
- 이시이의 실명 이후 경성으로 귀국, 중앙보육학교 무용담당 교수로 취임, 시내 영락정(永樂町)에 조택원무용연구소 개설
- 1933년 2월
-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작품발표회
- 1937년
- 공연 및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감
- 1947년
- 미국 공연
- 1958년 7월
- 일본 동경 히비야공회당(日比谷公會堂)에서 은퇴 공연
- 1962~63년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 1962~76년 한국일보 사우
- 1964년
- 한국무용협회 공로상
- 1964~76년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상임고문
- 1966년
- 서울특별시문화상
- 1969~72년 사단법인 한국민속무용단 설립자 겸 단장
- 1970~73년 해외파견 한국민속예술단 단장(72년은 제외)
- 1972~76년 예술원회원
- 1974년
- 예술원 공로상
- 1974년
- 금관 문화훈장
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경성공회당에서 있었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공연을 관람하고는 무용을 배우고자 동경으로 건너가 이시이의 제자가 되었다. 1929년에는 토월회가 조선극장과 제휴하여 준비한 토월회 부흥공연에 참여하였고, 토월회 무용부의 지도자가 되는 등 토월회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932년 이시이 바쿠가 실명하자 동경에서 돌아와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의 조선지부를 설치하였다. 후에 조택원무용연구소가 되었다(조선일보a; 동아일보a;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무용가였던 조택원은 1936년 경성촬영소가 제작한 양주남 감독의 첫 감독작 <미몽>에서 문예봉의 구애를 받는 박경림 역으로 영화에 출연하여 <만종> 등 몇 편의 춤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 조택원무용연구소 단원들이 특별출연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b; 매일신보). 해방 이후에는 1947년 10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4월 혁명 이후에야 귀국하였다(조선일보b; 조선일보c). 1974년 예술원 회원으로 결정되었으며, 1976년 6월 8일 사망하였다(조선일보d; 조선일보e).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2년 3월 18일 4면. 동아일보b 1936년 7월 3일 3면. 매일신보 1936년 7월 4일 3면. 조선일보a 1929년 11월 1일 석간 5면. 조선일보b 1960년 5월 7일 석간 3면. 조선일보c 1960년 5월 12일 조간 4면. 조선일보d 1974년 8월 1일 조간 7면. 조선일보e 1976년 6월 9일 조간 6면.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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