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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대표 이미지

강호

Gang Ho · 姜湖

분야
제작/기획, 감독, 배우, 시나리오
데뷔작품
유랑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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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미술 공부
1927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가입
1930년
카프 조직 개편 이후 미술부 책임자 겸 영화부 위원
1932년
극단 신건설과 동방키네마 창설에 참가

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카프에 가입한 강호는 김복진의 뒤를 이어서 미술부장이 되었다. 이 때 수원에서 미술전을 열었다고 한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강호는 <암로>를 통해서 영화계에 참여하였다. 강호는 민우양 등과 함께 경남 진주에 남향키네마를 설립하고, 제작한 것이 <암로>라는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제목을 <쫓겨 가는 무리들>이라고 했지만, 후에 <암로>로 제명을 바꾸었다. 강호는 박경옥과 함께 주연배우로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고성이란 이름으로 이 작품의 감독도 맡았다(중외일보a; 중외일보b; 동아일보a). 1930년에는 서울키노에서 제작한 <화륜>에서 자막을 맡았다고 한다(조선일보a). 이 시기에 카프 영화부가 설치되면서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 내부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강호는 카프의 통제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임화와 함께 카프의 통제를 받던 청복키노를 조직하고, 1931년 제1회 작품인 <지하촌>의 감독을 맡았다. 노동자의 투쟁생활을 그린 지하촌은 신당리의 빈민굴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조선일보b; 동아일보b; 조선일보d). 그리고 1933년 강호는 카프의 통제를 따라 김태진(남궁운), 나웅, 민우양, 추적양 등과 함께 영화제작소 동방키노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연극부대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연극부대’는 동방키노의 기관지 이름이었다. 연극부대 사건은 동방키노의 인물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과 접촉하며, 「영화 구락부(映畵クラブ)」라는 유인물을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배포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京鍾警高秘). 이 사건으로 3년을 복역한 강호는 1930년대 말에 ‘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박헌영의 문화노선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송영, 박세영 등과 함께 발표하고 월북하였다. 1951년에는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의 시나리오와 무대미술을 맡았다. 이 영화는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상하였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 참고문헌 중외일보a 1928년 4월 29일 3면. 중외일보b 1928년 6월 1일 3면. 동아일보a 1929년 1월 26일 8면. 동아일보b 1931년 3월 11일 4면. 조선일보a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조선일보b 1931년 1월 28일 석간4면. 조선일보c 1933년 5월 2일 2면. 조선일보d 1933년 5월 28일 석간 3면. 京鍾警高秘 第1937號 「演劇運動社員竝映畵部隊社員等檢擧ニ?スル件」, 1933년 2월 10일. <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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