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Hwa-rang
김화랑
- Field
- Director, Screenwriter, Production/Planning
- Debut
- 한강(1938)
Filmography 49
Director (34)
- Tarzan in Korea 김화랑 • 1971
- Night of Seongbul Temple 김화랑 • 1969
- Son-in-Laws 김화랑 • 1969
- Three Sisters of House Maid 김화랑 • 1969
- Nam Jeong-im Goes to Women's Army Corps 김화랑 • 1968
- The Third Class Inn 김화랑 • 1967
- Salsali, You Didn't Know 김화랑 • 1966
- Chastity for Men, Bravery for Women 김화랑 • 1966
- Every Dog Has His Day 김화랑 • 1965
- The Ferryboat Is Leaving 김진섭, 김화랑 • 1964
Award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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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eer
- 1935년
-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회원
- 1936년
- 방송극협회(放送劇協會) 회원
- 1937년
- 주영섭 등과 함께 조선영화작가협회 결성
- 1938년
- 극연좌(劇硏座) 좌원
- 1941년
- 극단 유락좌(有樂座) 창설
- 1943~45년 제일악극단(第一樂劇團), 라미라(羅美羅) 악극단, 동양극장 문예부 등 소속 활동
- 1946년
- 중앙방송국 문예과
- 1947년
- 샛별악극단 창설
- 1951년
- 호화선(豪華船) 악극단 창설
- 1959년
- 반공예술인단 조직부장 역임
- 1960년
- 공연단체협의회(公演團體協議會) 회장 등
Biography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순재(李順載), 해방 전의 예명은 이익(李翼)이다(친일인명사전, 국제영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했다고 한다(친일인명사전). 1935년부터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소속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으며(조선일보b, 동아일보a), 1936년에는 방송극협회(放送劇協會) 소속으로 라디오 방송극 <봄 소낙이>, <연필>, <풍선동(風船同)> 등을 연출했다(매일신보a, 매일신보b). 1937년 김유영(金幽影), 김혁(金赫) 등과 함께 월간지 『영화작가(映畵作家)』를 창간했으며(동아일보b), 같은 해 제작에 들어간 반도영화제작소(半島映畵製作所) 제1회 작품 <한강>에서 방한준의 원안을 김혁과 공동 각색하면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매일신보c, 조선일보b). 이듬해 제작 개시한 제2회 작품 <성황당>에서도 각색을 맡았으며(동아일보c), 1939년에는 조선일보가 공모 심사한 “오리지날 씨나리오” 현상모집에서 <드메>로 입상하기도 했다(조선일보a). 1939년 5월 조선문화영화협회(朝鮮文化映畵協會)의 발기인으로 설립에 관여했으며(동아일보d), 같은 해 7월에 설립된 조선영화작가협회(朝鮮映畵作家協會)에 동인으로 참가했다(매일신보d). 그해에 조선문화영화협회와 일본문화영화사의 제작으로 오카노 신이치(岡野進一)와 공동 연출한 문화영화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가 감독 데뷔작이다. 이후 조선영화(朝鮮映畵) 제3회 작품 <수선화>에서 촬영을,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 제작, 최인규 감독의 <집없는 천사>에서 편집을 맡았다. 1941년 김화랑(金火浪)이라는 예명으로 극단 유락좌(有樂座)를 창설했으며(전자연표), 1943년 제일악극단(第一樂劇團)에서 연출자로 있는 동안 만난 가수 신카나리아(申璟女)와 결혼했다(동아일보e). 결혼 후 부부가 함께 라미라(羅美羅) 악극단에 입단했다고 하며, 김화랑은 동양극장 문예부 소속으로 <아가씨의 소원은 단 하나>라는 작품을 직접 집필, 연출하기도 했다(동아일보e, 국제영화). 해방 후에도 악극단 활동에 주력하여 1947년 초에는 황해(黃海), 백설희(白雪姬), 신카나리아, 남인수(南仁樹) 등과 함께 샛별악극단을 창립했다(동아일보f). 전쟁기에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가협(歌協)과 제주도 제2훈련소 연예대에 부부가 함께 소속되어 위문공연을 했다고 하며(동아일보g), 이후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황해, 백설희, 현인(玄仁), 박옥초(朴玉草), 주선태(朱善泰) 등 피난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악극단 호화선(豪華船)을 조직해 약 2년 동안 큰 인기를 얻었다(동아일보h). 서울 환도 후에도 한동안 악극단을 운영했으나 1957년 임화수(林和秀) 제작의 <항구의 일야>와 박구(朴九)의 권유로 맡게 된 <자유부인> 속편을 연출하면서 영화로 복귀했다(동아일보i). 이후 <사람팔자 알 수 없다>를 시작으로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 <살사리 몰랐지>, <남정임 여군에 가다>, <타잔 한국에 오다> 등 코미디 영화를 주로 연출하며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977년 방송국 프로그램 녹음 도중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동아일보j).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92년 11월 14일자 15면. 동아일보a 1935년 11월 20일자 2면. 동아일보b 1937년 6월 3일자 4면. 동아일보c 1938년 10월 25일자 5면. 동아일보d 1939년 5월 12일자 5면. 동아일보e 1981년 7월 27일자 7면. 동아일보f 1981년 8월 1일자 7면.동아일보g 1981년 8월 8일자 7면. 동아일보h 1981년 8월 10일자 7면. 동아일보i 1981년 8월 11일자 7면. 동아일보j 1981년 8월 13일자 11면. 매일신보a 1936년 5월 13일자 3면. 매일신보b 1936년 8월 16일자 3면. 매일신보c 1937년 7월 1일자 8면. 매일신보d 1939년 7월 28일자 4면. 조선일보a 1939년 3월 1일자 조간 4면. 조선일보b 1939년 3월 2일자 조간 4면. 韓國映畵人百人選, 『국제영화』제4권 제10호(1958년 12월 발행).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83-84쪽. 한국학자료센터 전자연표 http://kostma.net/history_table/history_aks.aspx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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