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Gyeong-son
이경손
1905 ~ 1977
- Field
- Director, Production/Planning
- Debut
- 해의 비곡(1924)
Filmography 25
Director (8)
Screenplay (5)
Career
- 1923년
-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무대예술연구회 조직하여 서울을 비롯 지방순회공연
- 1924년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기진으로 입사
- 1925년
- 윤백남프로덕션 단원
- 1925년
- 윤백남프로덕션 해체 이후 고려키네마 창립
- 1926년
- 계림영화사 창립
- 1926년
- 《조선일보》에 영화소설 <백의인> 연재
- 1929년
- 단성사주 박승필의 도움으로 이경손프로덕션 창립
- 1931년
- 상해로 망명
- 1932년
-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태국으로 탈출하여 여생을 보냄
Biography
1924년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며 영화경력을 시작하였다. <해의 비곡>(1924)과 <운영전>(1925)에서는 감독보조를 맡아 영화연출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윤백남이 서울에서 윤백남프로덕션을 결성하자, 윤백남을 따라 조선키네마를 탈퇴하였다. 윤백남프로덕션이 제작한 <심청전>(1925)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여러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김종원). 이경손은 연출 이외에도 각본에 관심을 보였다. 1925년에는 연극문학과 무대예술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극문회(劇文會)에 고한승, 김영팔, 심훈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라디오 방송에 적합한 각본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라디오드라마 연구회에도 김영팔, 심훈, 최승일, 고한승 등과 함께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a; 조선일보a).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본원작의 <금색야차>를 개작한 <장한몽>(1926)을 들 수 있을 것이다(동아일보b). 그리고 1927년에는 정기탁, 김동평 등이 세운 평양키네마에서 제작한 <춘희>의 감독을 맡았다. 1928년에 개봉한 이 작품은 뒤마의 소설을 번안하여 만든 작품으로 정기탁과 신인여배우 김일송을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였다(동아일보c). <춘희>를 촬영하는 도중에 이경손은 이경손프로덕션을 창립하며 독립하였다. 이경손프로덕션의 지휘는 박창혁이었으며, 촬영기사는 한창섭이 맡았다고 한다. 제1회 작품은 조경희 주연의 <숙영낭자전>이었다. 이경손은 이 작품을 오랫동안 생각해 두었던 것으로, 이 작품을 위해 조선가무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조선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조선일보b; 동아일보d; 동아일보e). 참고로 이경손이 상해로 망명하기 직전에 관훈동에 ‘카카튜’라는 커피를 파는 다방을 운영하였는데, 이 다방이 서울 다방계의 효시가 되었다는 회고가 남아 있기도 하다(경향신문). 이후 상해로 옮겨간 이경손은 전창근이 원작, 각색, 주연을 담당한 <양자강>(1931)의 감독을 맡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이 국민당 정부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되었다고 한다. 1931년 <양자강>은 조선극장에서 수입하여 개봉하였다(김종원). 그리고 1931년에는 상해에 있으면서, 상해에서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김광주 등과 함께 연락하여 프롤레타리아 문예잡지 신흥문단을 발간하려는 계획에 관여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f). 하지만 그는 1932년 윤봉길의사 사건 이후 상해를 떠나 태국으로 옮겨가서 1977년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김종원; 대중예술인 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5년 9월 14일 2면. 동아일보b 1926년 2월 28일 5면. 동아일보c 1927년 11월 16일 3면. 동아일보d 1928년 3월 8일 3면. 동아일보e 1931년 8월 1일 5면. 동아일보f 1931년 10월 28일 5면. 조선일보a 1927년 7월 3일 조간 3면. 조선일보b 1928년 3월 8일 석간 3면. 경향신문 1949년 9월 19일 2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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