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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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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이원용은 서울에서 태어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스포츠에 주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영화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7년 금강키네마가 제작한 <낙회유수>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조선에서도 치고 박는 활극 영화를 만들자는 단성사주 박성필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이구영이 배우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이원용을 발탁한 것이었다. 조선무도관에서 운동에 미쳐 있던 이원용이 활극배우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조선일보a; 동아일보b; 이영일4). 이원용은 1928년 <세동무(삼걸인)>에서도 주연을 맡았고, 1929년 <종소리>에서도 주연으로 활약하였다. <낙화유수>부터 <종소리>까지 그가 맡은 역할은 모두 남성적 모습을 필요로 하는 역할들이었다. 이런 이원용을 심훈은 “유도 잘하는 활극배우”라고 압축적으로 설명하였다(동아일보a; 조선일보b; 심훈). 이원용의 연기 색깔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34년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이규환은 <청춘의 십자로>를 보고 나서 이원용의 연기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내렸다. 과거 이원용의 연기는 기억에 남을 것이 없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곳에 움직임”이 있고 노하거나 웃지 않는 곳에서도 노함과 웃음이 있다며 그의 내면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김유영도 <청춘의 십자로>가 이원용의 연기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원용의 개인적 노력과 <청춘의 십자로> 감독이었던 안종화의 조언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동아일보b). 그 이후 이원용은 안종화 감독의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과 <인생항로>(1937)에 출연하였다. 그는 연기생활 후반기를 안종화 감독과의 콤비로 장식한 셈이다(김종원). 이원용은 어느 글에서 자신을 배우이지만 “제작자를 겸함 기형적 존재”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이원용은 금강키네마의 제작자이기도 하였다. 그가 언제부터 금강키네마를 운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종소리>(1929)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제작자로서 그의 포부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나운규가 생전에 계획했지만 하지 못 했던 <황무지>를 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훈의 유작인 <상록수>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동아일보c). 아쉽지만 그의 이런 포부는 실현되지 못 하였다.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던 이원용은 1950년 2월말 훈정동의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7년 10월 8일 석간 3면. 조선일보b 1929년 2월 12일 석간 3면. 조선일보c 1934년 9월 21일 석간 3면. 조선일보d 1934년 9월 30일 석간 3면. 동아일보a 1928년 3월 3일 5면. 동아일보b 1937년 8월 13일 6면. 동아일보c 1937년 12월 10일 5면. 경향신문 1950년 2월 23일 2면.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김성춘, 복혜숙, 이구영>>4, 소도, 2003.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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