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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 Sang-riol

윤상렬

1906 ~

Field
Art
Debut
새출발(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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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ography 9

Award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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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eer

1922년
토월회(土月會),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 회원
1931년
일본 동경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연구회 창립, 동경조선어극단(東京朝鮮語劇團) 단원
1932년
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가동맹 조선위원회 준비위원회, 일본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조선위원회 준비위원회, 극단 3·1극장 단원
1932년
동경조선어극단에 참가
1933년
청진예술연구회(淸津藝術硏究會) 회원

Biography

1906년 함경북도 주을에서 태어났다(윤경렬).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재학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윤경렬) 1922년부터 토월회(土月會) 및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에 들어가 김복진(金復鎭) 등과 함께 무대미술 활동에 뛰어들었다(최열). 그러나 1923년 9월의 제2회 공연을 끝으로 토월회가 전문상업극단으로 변화를 도모하면서 김복진, 윤상렬, 안석주(安碩柱, 안석영 감독) 등은 극단을 떠나게 되었다(유민영). 이후 윤상렬은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서 “정물소품(靜物小品)”이라는 작품으로 입상했고(동아일보a) 1931년 제10회 미전에서는 “흰꽃”으로 특선했다(동아일보b).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31년 6월 최병한(崔丙漢), 이화삼(李化三), 한원래(韓遠來) 등과 함께 동경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연구회를 창설했다(박영정). 이 단체는 같은 해 11월 동경조선어극단(東京朝鮮語劇團)으로 재조직되었으며, 윤상렬은 그밖에도 프로미술가동맹 조선위원회 준비위원회와 프로연극동맹 조선위원회 준비위원회에서도 중심적으로 활동했다(박영정, 최열). 윤상렬은 조선어극단이 1932년 3·1극장으로 개칭하고 쓰키지 소극장에서 공연한 작품 <하차(荷車)>에서 무대장치를 담당했고, 연기자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박영정, 최열). 이듬해인 1933년부터는 귀국하여 함북 청진(淸津)에 거처를 두고 청진예술연구회(淸津藝術硏究會)에서 활동했다(윤경렬). 1935년 제14회 조선미전에서 “선인장(仙人掌)”으로 입선했으며(매일신보a), 그 다음 해 9월에는 청진구립도서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매일신보b). 1938년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 의정부촬영소가 건립되면서 이재명(李載明)이 촬영부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윤상렬은 이때 그와의 친분을 계기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동아일보c, 윤경렬). 이규환 감독의 <새출발>(1939)과 김유영 감독의 <수선화>(1940)를 시작으로 영화미술 활동에 들어선 그는 이후 <지원병>, <반도의 봄>(1941), <조선해협>(1943), <거경전>(1944) 등의 작품에서 미술 및 장치를 담당했다. <반도의 봄>을 연출한 이병일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가 “내지작품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치 자신 있는 세트를 25개나 세웠다”며 높게 평가하고 있다(조광). 1940년대 초 그는 극단 아랑(阿娘)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1942년 안영일(安英一) 연출의 <삼대>에서 무대를 담당했다(매일신보c). 해방 후에는 일제패망 직후인 8월 18일 조직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에 영화부문 협의회의원으로 참여했으며(매일신보d), 곧이어 9월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도 위원으로 참여했다(매일신보e). 같은 해 말 조선영화동맹(朝鮮映畵同盟)이 건설되자 이에 가담했으며(자유신문a) 이듬해 설립된 조선미술동맹(朝鮮美術同盟)에서도 위원직을 맡았다(자유신문b).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가제: 노도)>에서 미술을 맡았고(자유신문c), 같은 해 8월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 주최로 개최된 해방 기념 7개 극단 연합공연에서 박춘명(朴春明) 연출의 <조선의 어머니> 무대장치를 맡는 등(경향신문)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분단이 확실시되자 그는 고향인 함북 주을로 돌아갔다고 하며(윤경렬), 이후 북한에서 영화 <내 고향>(1947), <용광로>(1949) 등의 미술을 담당했다(월간미술, 이재명). 전쟁 발발 후에는 영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에서 미술을 맡은 것이 확인되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향토사학자 고청(古靑) 윤경렬(1916~1999)의 맏형이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47년 8월 10일자 3면. 동아일보a 1927년 5월 21일자 5면. 동아일보b 1931년 5월 24일자 2면. 동아일보c 1938년 12월 23일자 5면. 매일신보a 1935년 5월 14일자 2면. 매일신보b 1936년 9월 26일자 1면. 매일신보c 1942년 2월 19일자 4면. 매일신보d 1945년 8월 24일자. 매일신보e 1945년 9월 22일자. 자유신문a 1946년 5월 27일자 2면. 자유신문b 1946년 11월 12일자 2면. 자유신문c 1947년 2월 21일자 2면. 분단 50년, 월북 미술인 68인의 행적, 『월간미술』제10권 제8호(1998년 8월 발행). 情熱의 描寫 - 半島의 봄 演出者 李炳逸, 『조광』제7권 제5호(1941년 5월 발행). 박영정, 『한국 근대연극과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연극과인간, 2007, 68-98쪽. 유민영, 『한국 인물연극사 1』, 태학사, 2006, 245-246쪽. 윤경렬,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학고재, 1997, 4-16쪽. 최열 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제37권 문화예술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25-226쪽. 이재명, 「북한영화 <용광로>에 대하여」, 미국 워싱턴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 2008년 11월 특별상영회 배포자료. [작성: 김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