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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eer
- 극단 황금좌(黃金座), 극단 호화선(豪華船) 단원
- 1939년
- 극단 아랑(阿郞) 단원
- 1947년
- 북한 중앙예술공작단(中央藝術工作團) 단원
- 1950년
- 북한 국립연극극장(國立演劇劇場) 배우
- 1956년
- 북한 국립연극극장 부지배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 1957년
-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 1958년
- 북한 조·소친선협회 상무위원, 조선·프랑스친선협회 상무위원
- 1961년
-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 1962년
- 북한 국립연극극장 지배인,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 1963년
- 북한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
- 1966년
- 북한 제3차 내각 문화상
- 1967년
-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제4차 내각 문화상
- 1970년
-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제5차 대회)
- 1971년
- 북한 녀성동맹 집행부 성원
Biography
일제강점기 조선과 북한의 배우. 북간도 용정 출신이라는 설과 서울 출생이라는 설이 있다(고설봉, 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함흥영생여고(咸興永生女高)를 다녔으며, 극단 황금좌(黃金座)와 동양극장 호화선(豪華船) 등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황철(黃澈), 차홍녀(車紅女), 문정복(文貞福) 등을 멤버로 창립된 극단 아랑(阿郞)에 함께 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설봉). 당시의 박영신은 “무게잇는 다능다재를 다변 속에 간직”했으며, “뛰어난 집중력을 가진 배우”로 평가받았다(매일신보a, 고설봉). 1943년 아랑은 “반도 개병(皆兵)의 정열을 무대화”한 연극 <조선>을 상연하는 등 이른바 ‘국민연극’화의 행보를 걸었으며, 같은 해 박영신이 <조선해협>에 출연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인 것으로 보인다(매일신보b). 당시 아랑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두찬(金斗燦)과 결혼하여 다섯 남매를 두었다고 하며(조선일보), 해방 후 남편의 고향인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고설봉). 1947년 당시에 북한의 국립극단인 중앙예술공작단(中央藝術工作團)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며(경향신문), 1950년부터는 국립연극극장(國立演劇劇場)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6년 연극극장 부지배인, 1962년에 지배인으로 임명되었고, 1966년부터는 제3차, 4차 내각의 문화상으로 활동했다. 1953년에 공훈배우 칭호, 196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사망 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디지털북한백과사전).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47년 1월 4일자 4면 매일신보a 1942년 2월 19일자 4면 매일신보b 1943년 3월 25일자 2면 조선일보 1940년 6월 1월 조간 4면 고설봉 증언, 장원재 정리, 『증언 연극사』, 진양, 1990, 134-137쪽. 디지털북한백과서전 http://www.kplibrary.com/ 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http://www.dbmedia.co.kr/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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