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ry Doctor
- 감독
- 데이비드 W. 그리피스
- 제작년도
- 1909
- 출연
- 프랭크 포웰, 플로렌스 로렌스, 글래디스 이간, 케이트 브루스, 매리 픽포드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영화의 이론에 관한 교과서를 읽으면서 모두 알고 있지만, 누구나 의문을 품고 있는 개념들이 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지식에서 멈추고 영화를 만들면서 외면하는 이론들이 있다. 나는 영화사의 순간들을 뒤져나가면서 차례로 질문을 던져볼 생각이다. 이제 영화사의 순간들이 이론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 첫 번째 질문을 쿨레쇼프 효과 (Kuleshov effect), 라고 부르는 개념에 던져보겠다. 이 효과는 편집의 기술, 혹은 효과, 또는 개념에 속하지만 이 효과가 정말 문법적으로 성립하나요, 라는 질문을 견뎌야 하는 현장에서 연출에 관한 실용적인 관점으로 다시 질문하면 누구라도 대답을 망설인다. 먼저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 먼저 어떤 연기도 하지 말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배우의 얼굴을 찍는다. 그런 다음 이 쇼트를 동일한 세 개의 카피본으로 만든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 카피본을 A라고 부르겠다. 그런 다음 빵을 찍은 쇼트를 1, 칼을 찍은 쇼트를 2, 어린 아기를 찍은 쇼트를 3, 이라고 부르겠다. 이제 1 + A를 하면 A의 쇼트에서 배우의 얼굴에 배고픔을 보게 되고, 2 + A를 하면 A 쇼트의 배우 얼굴에서 두려움을, 그리고 3 + A를 하면 A 쇼트 배우 얼굴에서 자애로움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의 이론적 근거는 변증법적 종합화에 따른 세 가지 특징, 모든 것은 상호작용 법칙에 따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대립물 사이에서 변화하며, 모든 것은 질적으로 변화한다, 는 도그마에 따른 것이다. 물론 헤겔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한 적이 없으며, 마르크스는 그렇게 도식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으며, 레닌은 그렇게 교시를 내린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실험은 볼셰비키 1917년 11월 혁명이 성공으로 끝나고 급하게 유물변증법을 공부한 다음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 주기 바란다.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는 이미 1918년경에 이와 유사한 실험을 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끌어낸 것은 쿨레쇼프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 국가의 탄생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15)을 보고 난 다음이다. 그런 다음 변증법에 근거하여 정식화시켰다. 그는 영화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 효과를 빌려 연극과 분리해내서 당대의 배우이자 연극연출가였던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 액팅’을 영화에서 부정하였다. 이 실험을 하면서 배우 이반 모주힌을 ‘모델’로 사용하였다. 쿨레쇼프는 다른 실험도 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찍은 거리의 쇼트들을 방향을 맞추어서 연달아 편집하면 영화에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창조적 지리학’이라고 불렀으며, 포괄적 의미에서 이 편집 방법을 ‘쿨레쇼프 효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방법은 텔레비전 방송국 드라마, 혹은 외부 촬영과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 장소 촬영에서 스튜디오로 이동할 때 정말 동일한 장소로 ‘속는지’, 아니면 만드는 쪽과 보는 쪽이 서로 양해하면서 마치 협상하듯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수많은 트릭 촬영 기술들과 토키 영화 이후 사운드 브릿지 기술이 발명되었다)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15) 중 1920년 5월 1일 레프 쿨레쇼프는 국립영화학교 VGIK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 실험을 교실에서 소개했으며, 제자들은 이 실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몽타주 이론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 교실에는 프세볼로트 푸도프킨, 보리스 바르네, 미하일 롬, 세르게이 코마로프, 블라디미르 포겔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쿨레쇼프 효과의 설명 과정은 푸도프킨이 자신의 강의에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푸도프킨은 이 효과의 발명자가 자신의 스승 쿨레쇼프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쿨레쇼프 효과는 국경을 넘어서서 영화문법에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다. 그중에서 쿨레쇼프 효과를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은 알프레드 히치콕이었다. 그는 트뤼포와 긴 인터뷰를 하면서 < 이창 >(알프레드 히치콕, 1954)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얼굴과 그가 훔쳐보는 맞은편 아파트 창문 너머의 풍경을 쿨레쇼프 효과에 의지해서 어떻게 연결 시켰는지 설명했다. 푸도프킨의 설명과 디테일에서 다소 다르지만 그건 요점이 아니다. 히치콕은 1964년에 한 번 더 쿨레쇼프 효과를 다소 다르게 설명했다. 먼저 자신의 두 개의 얼굴, 하나는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을 A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인 미소 짓는 얼굴을 B라고 부르겠다. 그런 다음 A와 B 사이에 한 번은 공원에 젊은 여자가 어린 아기와 함께 있는 장면 1을, 다른 한 번은 같은 공원 같은 자리에 같은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하는 장면 2를 끼워 넣었다. 그러면 A – 1 – B에서 B의 히치콕의 미소는 자애로운 신사로 보이지만 A – 2 – B에서 동일한 B의 히치콕의 쇼트에서 관객은 음흉한 노인의 미소를 본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이 효과를 “순수하게 영화적인 것(pure cinematics)”이라고 불렀다. 히치콕이 종종 배우를 가축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 과격한 결론은 여기서 온 것처럼 보인다. <이창(Rear Window)>(알프레드 히치콕, 1954) 중 히치콕이 설명한 쿨레쇼프 효과 하지만 많은 영화감독, 교실의 학자들, 그리고 비평가들은 쿨레쇼프 효과가 정말 스크린에서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의심하였다. 1992년에 이르러 행동 심리학자가 조사방법론에 참여한 실험이 행해졌다. 스티븐 프린스와 웨인 E. 헨슬리는 137명의 실험 대상자를 상대로 쿨레쇼프 효과에 관해 설문지를 나눠주고 실행해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효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다는 답을 얻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단 한 번 이루어졌으며, 게다가 데이터 처리방식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의 제기를 받게 되었다. 2006년 딘 몹스가 주도하는 실험이 다시 실행되었다. 이번에는 슬픈 장면 다음에 아무 표정도 없는 배우의 얼굴에서 실험 대상자들은 슬픔을 보았고, 기쁜 장면 다음에 동일한 배우의 얼굴에서 기쁨을 보았다. 2016년에 다니엘 배러티는 좀 더 복잡하게 실험 상황을 설계하였다. 행복한 장면, 슬픈 장면, 배고픈 장면, 무서운 장면, 성적인 장면에 역시 아무 표정이 없는 동일한 배우의 얼굴을 차례로 연결시켰다. 그 결과 실험 대상자들은 쿨레쇼프 효과가 설명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다. 여기까지 읽은 다음 아, 쿨레쇼프 효과는 증명되었군, 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가 쿨레쇼프 효과를 영화에서 보면서 매번 마주치는 것은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다른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쿨레쇼프 효과를 믿는다. 하지만 항상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질문을 실험에 맡기는 대신 매번 서로 다른 영화의 서로 다른 장면에 질문해야 할 것이다. 쿨레쇼프 효과는 분명히 존재하는 영화의 마법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 (2003) 인터뷰 진행,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2010) , 『 필사의 탐독 』 (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할리우드가 언제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은 간단한데 이걸 설명하는 건 영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서로 다르다. 그건 할리우드가 단순하게 지명이 아니라 복잡하게 서로 성격이 다른 자본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산업이며,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할리우드는 그저 호명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여기에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실제로 물적인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어 세워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의 탄생에 관한 학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영화사의 순간을 건드리려는 것이지 산업의 역사를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마침내 할리우드가 나타났군요, 라고 말해보고 싶어지는 날. 그러므로 내가 기술하는 순간은 할리우드가 자본의 성격을 물적 형태로 드러낸 그 어느 날이다. 당신이 정치경제학의 관점을 갖고 다른 날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어느 날이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탄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견해를 존중한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로스앤젤리스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을 할리우드라고 처음 부르게 된 데에는 ‘믿거나 말거나’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세기 말 부자인 H. J. 휘트니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다. 그때 마차를 타고 가던 휘트니는 나무를 끌고 가던 흑인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흑인이 “아이, 할리우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I, hauliing-wood(나는 아주 힘겹게 나무를 끌고 있어요)”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휘트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휘트니는 이 지역의 땅 480에이커(1.942제곱킬로미터)를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가 산 땅 이름을 ‘할리우드(성스러운 나무)’라고 불렀다. 그와 비슷한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855년, 할리우드에 최초의 집이 지어졌고, 그 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우체국이 들어선 것은 1900년이 되어서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은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2년에 호텔이 들어섰고, 커다란 2개의 시장이 세워졌다. <데이비드 W. 그리피스> 여기서 영화를 찍은 최초의 중요한 인물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이다. 그리피스는 뉴욕의 투자자들의 현장 간섭에 질린 상태였다. 그들은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스타의 얼굴이 좀 더 크고 많이 나오기를 원했고, 그저 액션장면만을 원하면서 종종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피스는 그들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에 가서 영화를 찍었다. 뉴욕의 투자자들이 오기에 할리우드는 너무 멀었다. 그때까지 영화 제작의 중심지는 뉴욕, 그 다음은 시카고였다. 1910년 단편영화 <오래된 캘리포니아에서>를 찍었다. 그리피스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늘 날씨가 좋았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여기는 사막 기후를 가지고 있다) 도시가 가깝게 있는데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1911년 10월 26일, 네스토어 픽쳐스 컴퍼니는 여기에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그 뒤를 따라서 파라마운드, 워너 브라더즈, RKO, 컬럼비아 영화사가 차례로 스튜디오를 지었다. 그리피스의 영화를 보고 세실 B 데밀도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발적인 작업이었고, 좀 더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더 큰 스튜디오가 필요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산업은 뉴욕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본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러스트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독점자본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투자자들은 새로운 자본이 이 시장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았다. 이 배타적 자본의 방어에 대해서 반(反) 트러스트의 입장을 취한 자본가들이 나타났고 그 중에서 유니버설 매뉴펙처링 코퍼레이션의 대표 칼 럼리는 기존 영화 트러스트들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지역에서 영화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마도 20세기 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칼 럼리는 독점자본의 트러스트에 반대한 것이지 영화예술의 융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영화에서 자본의 집약이라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칼 럼리는 남부 캘리포니아 산 페르난도 협곡을 사들였다. 230 에이커를 사들였고, 여기서 영화 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장소로 모아놓고, 영화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 집약, 기술 집약. 자본집약의 고전적인 토대를 만들어냈다. 칼 럼리는 1915년 3월 21일 유니버셜 스튜디오 개막식 행사를 치렀다. 사막 위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가 세워지는 날이었다. 17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이 독일소년은 미국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소망이라고 종종 말했다. 어쩌면 이 날 칼 럼리는 진정한 소원을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칼 럼리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할리우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전 세계 곳곳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영토를 가진 왕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날 스튜디오 개막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2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칼 럼리는 철두철미한 실용주의자였던 것 같다. 칼 럼리는 개막식 연설을 생략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래도 모여든 사람들은 행진을 하면서 미국 성조가를 불렀다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스타였던 폴린 부쉬, J. 워렌 커리건, 그레이스 커나드, 프랜시스 포드, 론 채니, 윌리엄 클리포드, 거르투르드 셀비와 차례로 계약했다. 그들은 서명을 하자마자 뉴욕을 정리하고 반대편에 자리한 로스앤젤리스로 옮겼다.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세워지자 할리우드 영화는 새로운 차원의 제작 시스템을 발명해나갔다. 데이빗 보드웰은 할리우드의 영화사는 스타나 감독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유례없는 시스템의 역사라고 단언했다. 할리우드는 이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한 뉴욕과 제작을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로 이원화되었고, 영화는 마치 공장과도 같은 하나의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날은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한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