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단이
- 감독
- 배영랑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송도영, 박일, 김은영, 김진숙, 박영화
앙드레 바쟁은 영화에서 서부극은 소비에트에서의 볼셰비키 혁명에 비견할 만한 하나의 질서와 문명의 탄생이라고 썼다. 그 말은 아마 부분적으로만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부극의 역사가 사회주의 혁명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21세기에 보고 있다. 서부극은 레닌이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는 동안 지구 반대편 캘리포니아에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에드윈 S. 포터의 <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 > (1903)의 성공 이후 관객들은 더 자주, 더 많이, 더 오랜 상영시간 동안 서부영화를 보기를 갈망했다. 아직 완전하게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바이타그래프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맹렬하게 서부극을 제작했다. 그들은 1911년 매주 네 편의 (당시의 배급 방식에 따라) 네 개의 릴을 제작할 것이며, 그 중 하나가 서부극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감독이 서부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할리우드에 막 도착한 D. W. 그리피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이 장르에 재능이 없음을 알고 손을 뗐다. 그중에서 알랜 드완이 앞장을 섰다. 하지만 그는 서부극의 첫 번째 위대한 이름이 아니다. 토머스 H. 인스는 영화사 초기의 가장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바이슨 픽처스와 계약하고 서부극을 연출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에덴배일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때는 프로듀서들이 종종 감독을 했기 때문에 이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머스 H. 인스는 서부극을 찍기 위해 캘리포니아를 돌아보았다. 물론 사방에서 서부극을 찍기 위해 로케이션을 떠났지만 그때는 20세기 초기였다는 점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낯선 산골짜기, 혹은 정글과 다름없는 숲, 강도들이 출몰하는 낯선 동네에서 영화를 찍기 위한 말과 기병대, 인디언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차는 느려터졌고 운송수단은 달리 없었다. 토머스 H. 인스는 건맨 몇 명과 인디언 두세 명, 열댓 명의 강도단이 나오는 서부극은 곧 인기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다. 토머스 H. 인스는 여기서 서부극을 찍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운이 좋았다. 때마침 밀러 형제가 이끌던 101 랜치 와일드 웨스트 쇼 순회공연단이 오클라호마의 겨울을 피해 크리스마스에도 따뜻한 날씨의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와일드 웨스트 쇼에는 연기를 할 수 있는 300명의 카우보이와 카우걸, 인디언, 인디언 여자들, 여기에 훈련받은 600필의 말과 소떼, 버펄로들이 포장마차와 역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토머스 H. 인스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들과 계약한 다음 2만 에이커의 오렌지 농장을 샀다. 이런 엄청난 농장이 그때 로스앤젤레스에는 거의 널려 있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어디서도 오렌지가 잘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첫 번째 서부극 <평원의 전쟁 War on the Plains>(1912)을 찍었다. 이 영화는 서부극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단지 그 규모에서만이 아니라 토머스 H. 인스는 이 장르를 하나의 완전한 세계, 또 다른 하나의 질서가 활동하는 우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서부극은 단지 새로운 장르의 발명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이 영화는 단숨에 토머스 H. 인스를 서부극의 가장 신뢰할 만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성공의 여세를 몰아 새로운 여주인공을 찾았고 그녀가 메리 픽포드다. 위대한 발견. 그로부터 3년 뒤에 존 포드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이 위대한 장르의 역사가 시작된다. (계속) <평원의 전쟁> 포스터
부주의하게 영화사 책을 읽은 독자들은 최초의 장편 극영화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이라고 대답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첫 번째 장편 극영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첫 번째 장편 극영화가 상영된 곳은 뉴욕이나 LA, 혹은 파리가 아니라 호주의 멜버른이다. 1906년 12월 26일, 멜버른의 애서니움 홀 (Athenaeum Hall)에서 <켈리 강도단 스토리 The Story of the Kelly Gang>(찰리 테이트)가 상영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4,000 피트 길이의 상영시간이라고 한다. 당시 영화들은 영사 조건에 따라 상영시간이 서로 달랐으며 자료에 따라 약(approximate) 60분 혹은 약 70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다음 2년 뒤 영국에서 상영되면서 유럽에 알려졌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아쉽게도 <켈리 강도단 스토리>는 영화의 일부만 남아 있다. 여러 차례의 복원을 거쳤고, 현재(2006년)는 (일부 프린트가 부식되어 망실된 장면을 포함해서) 971피트(약 16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실존인물인 네드 켈리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855년에 태어난 네드 켈리는 어린 시절부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폭행, 소도둑질, 경관 살해 미수를 거쳐서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산에 들어가 본격적인 무장 강도단이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그들은 은행 두 곳을 털었고, 심지어 열차 탈선을 기도하기도 했다. 경찰은 본격적인 소탕 작전에 나섰고, 켈리 강도단은 대담무쌍하게도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또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철로 만든 갑옷을 만들었다. 결국 경찰과 대치한 끝에 전원 살해당하고 네드 켈리만 생포되었다. 네드 켈리는 1880년 11월 11일 교수형을 당했다. 이 추격전과 소탕 작전, 철갑 갑옷, 교수형, 여기에 네드 켈리가 당시 호주의 민중봉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와 도적이었지만 로빈 후드처럼 가난한 이들에게는 선행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풍문 속의 영웅이 되었다. 아직 19세기였고, 그걸 증명할 만한 사진도 볼 수 없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멜버른의 커다란 극장 애서니움 홀을 운영하던 테이트 가문에서는 여기서 상영할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물론 무대에서 상연하는 쇼 프로그램이 중심이었지만 단편영화들도 상영했다. 예술적 야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알지 못했던 이 가문의 형제 중 한 사람이었던 찰스 테이트는 경찰들이 네드 켈리 소탕 작전에 나선 다음 체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을 계획을 세웠다. 다소 놀라운 이야기지만 <켈리 강도단 스토리>는 찰스 테이트의 첫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현재 남아 있는 <켈리 강도단 스토리>에서 대부분의 숏은 아직 편집 개념이 도착하기 전에 만들어져서 카메라 앞에서 마치 연극처럼 진행되면서 몇 분이고 지속되기까지 한다. 모두 6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무려 6개월 동안 촬영되었다. 심지어 촬영기간이 너무 길어 네드 켈리를 연기한 캐나다에서 온 주연배우가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지는 바람에 결국 엑스트라 중 한 사람이 그 역을 대신하면서 남은 촬영분에서 네드 켈리는 롱 숏으로만 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남은 장면만으 로 본 <켈리 강도단 스토리>의 총격전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다. 단지 그것을 (톰 거닝이 말한) 초기 영화라는 ‘구경거리(attraction)’의 매혹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도 종종 나는 <켈리 강도단 스토리>의 남은 장면들을 홀린 듯이 볼 때가 있다. 그것만은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