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 감독
- 김지웅
- 제작년도
- 2007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최근 한국영화가 발명한 장르가 있다. 바로 ‘ 마동석 이라는 장르’다. 배우에게 일반적으로 ‘변신’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면, 마동석은 그 반대편에서 범죄 스릴리라는 장르 안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있다. < 악인전 >( 이원태 , 2019)는 그 정점이다. 클리셰로 구성된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마동석은 자신이 구축해왔던 나름의 영역을 완성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악인전>은 두 겹의 텍스트다. 표면적으로 <악인전>은 조폭 두목과 미친 형사와 연쇄살인마라는, 범죄 장르에서 지겹게 반복되었던 캐릭터를 한 데 모아 새롭게 재조합한 영화다. 여기서 마동석은 또 하나의 겹을 만든다. 그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면서 ‘마동석 영화’의 본색을 보여준다. 마동석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 배우다.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모두 마동석의 분신이자 배우 자체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위력은 한 명의 배우가 장르와 동의어가 되는 원동력이다. 세 악인의 팽팽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악인전>의 중심은 마동석이 맡은 캐릭터인 장동수다. 여기서 ‘마동석 영화’의 첫 번째 법칙. 마동석은 언제나 ‘룰’(rule)을 만드는 사람이다. 응징이든 복수든 정의 구현이든,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악인전>에서도 이 영화에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사람은 장동수다.(“먼저 잡는 사람이 갖는 거지”) 이 과정에서 그는 형사 정태석( 김무열 )과 상의 같은 건 하지 않으며(“우리 애들 쓰고, 진행비도 내가 내. 정보 공유하고”), 현실의 법 따위엔 관심 없다.(“법으로 못하는 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리고 최후의 응징자가 된다.(“사내 셋이 목숨 걸고 게임을 했는데 끝을 봐야지”) 여기서 장동수의 포지션은 흥미롭다. 법을 만들지만 그는 법 밖에 있는 사람(조폭)이다. < 범죄도시 >( 강윤성 , 2017)의 마석도처럼 형사일 때도 있지만(그럴 때조차도 그는 법을 따르지 않지만), 마동석의 캐릭터는 공권력을 부여 받지 않았음에도(범죄자인 경우에도) 법의 집행자가 된다. 그는 평범한 승객(부산행), 수산물 가게 주인(성난 황소), 체육 교사(동네 사람들), 유도 도장 관장(원더풀 고스트)이면서 악당과 맞선다. 그는 한국영화에선 드문 일종의 자경단원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데 그 상징적 시작은 카메오로 출연했던 < 베테랑 >( 류승완 , 2015)의 ‘아트박스 사장’이다. 화면에 그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느꼈던 기대감, 즉 ‘완력을 이용한 즉각적 응징’은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지니는 가장 큰 장르적 매력이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그 어떤 적도 제압할 것만 같은 파워의 소유자. 마동석은 그런 면에서 범죄 영화 장르의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마동석의 액션이 절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개인적 동기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악인전>에서 장동수가 강경호(김성규)를 잡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 이남 최고의 조폭인 자신에게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복수는 연쇄살인마를 감옥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진다. < 성난 황소 >( 김민호 , 2018)에서 아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납치 조직을 소탕한다. < 부산행 >( 연상호 , 2016) < 동네 사람들 >( 임진순 , 2018) < 원더풀 고스트 >( 조원희 , 2018) 등도 그런 구도다. 가정과 이웃을 위하는 소박한 행동은 집단에 위협적인 존재를 처단하는 공익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지나치게 소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마동석의 행보는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접하는 경험이다. 서민극의 김승호 , 청춘 영화의 신성일 , 액션의 박노식 과 장동휘 , 멜로의 문희 등 과거 한국영화는 스타와 장르의 반복적 결합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박중훈 (코미디), 최민수 (액션), 전도연 (멜로) 등의 배우들이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마동석이다. 그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형사든 범죄자든, 한국영화 100년 사상 가장 두꺼운 팔뚝을 휘두르며 강렬한 ‘한 방’의 액션을 선보였고, 그것은 이미 익숙한 쾌감이 되었다. <악인전>은 엔딩의 ‘살인 미소’와 함께 그 쾌감의 끝을 보여준 영화이며, 아마도 마동석이라는 장르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물며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