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아
- 감독
- 황하나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김꽃비
1964~1985년 사이, 특히 6~70년대에 고속도로 건설을 한답시고, 브라질 군부독재정권은 아마존 유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Indigenous People)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Waimiri-Atroari) 사람들을 내쫓고 2천 명 이상 학살했다. 심지어 그들은 축제 중에 헬기에서 대량 투하되는 네이팜탄으로 죽기도 했다. 한편, 브라질의 교육운동가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1950~60년대에 펼친 문자 해독 교육 운동의 불씨는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프레이리는 “역사적 순간에 문해 교육과 민중의 정치적 의식화 사이에 긴밀한 끈을 묶는”일이 문해 교육이라며, 이 운동이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계속 문해 운동을 이어가던 활동가들은 선주민들이 교육 중에 작성한 글과 그림, 촬영한 사진을 아카이브로 간직했다. 아나 바스(Ana Vaz)는 1964년에서 1985년 사이의 아카이브 자료 3천여 점을 디지털 캡처하여, 선주민들이 부재하는 브라질의 현재 풍경과 포개어 프레임에 담는다. 아나 바스의 전작 <산을 자세히 응시하라, Olhe bem as montanhas>(2018)는 EXiS(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20년에 나온 신작 <왜?>는, 식민지에 도착한 선박의 뱃고동을 연상케 하는 모종의 악기 소리, 땅 표면을 질질 끌다 못해 파헤치려 하고 하늘 언저리까지 샅샅이 훑는 듯한 노이즈 음악으로 시작한다. 이 삽입곡의 제목은 <근원적인 밤, A Noite Original>(2004), 브라질 구체음악을 대표하는 길례르미 바스(Guilherme Vaz)가 작곡했다. 2018년 타계한 길례르미 바스는 아나 바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68년 리우데자네이루현대미술관에 실험예술 분과를 창설하고 1970년대 초반 독일 쾰른 피드백 스튜디오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길례르미는,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와 요셉 보이스 등이 포진한 당대 유럽 전위예술의 식민성에 이론과 실천으로 맞서고자 했다. 하여 브라질과 볼리비아 등지의 조로-팡간제(Zoró-Panganjej), 가비오-이콜렘(Gaviao-Ykolem), 아라라스(Araras) 등 여러 선주민 공동체와 시각 예술 작품과 음악을 공동 창작하고, 악기를 함께 만들었다. 또, 길례르미 바스는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와 줄리오 브레사네(Julio Bressane) 등 브라질 ‘시네마 노부(Cinema Novo)’ 운동과 이후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협업하여 그들이 연출한 영화 음악 여러 편을 작곡했다. <왜?>의 카메라는 식민 역사를 기념하는 모더니즘 조형물과 군사 독재 개발주의의 상징인 마천루가 즐비한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 시가지에서 출발하여 길례르미의 스코어와 함께 브라질의 도시와 숲, 강 기슭을 떠돈다. 카메라의 눈과 소리가 동행하는 여정 속에서, 선주민들을 학살한 군부의 개발 독재 시기와 보우소나루가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 대상에서 선주민을 배제하고 열대우림 파괴를 밀어붙이는 현재가 함께 거하는 시공이 섬광처럼 계시된다. 이 ‘풍경’들은 길례르미의 음악,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그리고 쓴 도큐먼트, 그들이 주인공인 사진 이미지들과 마찰하며 지층 속에 머금고 있던 “어떤 세계의 비밀(즉, 그 대수롭지 않거나 영광스런 외양 뒤에서 그 법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을 폭로하는 간극과 충돌의 힘” (『이미지의 운명』,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역)을 융기한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얼핏 보아서는 ‘비(非)장소’나 ‘반(反)장소’로 불릴 법한 고속도로 주변의 모노크롬 풍경이 특정한 역사 경험을 품은 ‘장소’로 단박에 탈바꿈한다. 아나 바스의 첫 작품 <사크리스 풀소, Sacris Pulso> (2007)서부터 길례르미는 사운드 디자인과 음악을 맡은 바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어떻게 일컬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하다 ‘즈려밟기’는 어떨까 싶었다. <사크리스 풀소>는 십 대 때 영화와 철학을 공부하러 호주로 이주했다 브라질로 돌아온 아나 바스가 수도 브라질리아 땅을 다시 밟고, 부모와 재회하는 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영화는 세르지우 바지(Sérgio Bazi)와 줄레이카 포르투(Zuleica Porto)가 연출한 16mm필름 단편 <브라질리아리우스, Brasiliários>(1986) 일부를 인용하는데,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가 쓴 1962년과 1974년 브라질리아 방문기 서사, 길례르미의 사운드가 이 푸티지 이미지와 길항하거나 겹쳐진다. 그리하여 구축되는 브라질리아의 과거와 현재는 유령도시의 그것과 닮아있고, 영화는 수도 브라질리아 자체가 SF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나 바스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길례르미 카레라(Guillherme Carrera) 같은 평자들은 “SF 다큐멘터리”로 일컫기도 했다. Brasília amidst ruins: The sci-fi documentary of Adirley Queirós and Ana Vaz(2018)라는 글에서 카레라는, 바스가 브라질 역사와 사회의 ‘실재’를 잡아내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처럼 “SF”를 도구로 쓴다고 주장한다. 카레라가 바스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인용한 Archaeologies of the Future(2005)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미래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우리 자신의 현재 경험을 낯설게 재구성하”는 장르가 SF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카레라는, 탈식민을 위한 토착문화운동이었던 브라질 트로피컬리즘에 정통한 연구자 로버트 스탬(Robert Stam)과 엘라 쇼햇(Ella Shohat)의 논의[Unthinking Eurocentrism: Multiculturalism and the Media(1994)]에 기대 “식민지, 신식민, 탈식민 국가의 구조적 단점이, 식민화 과정과 불평등한 분열이 만드는 '소수자’ 서사를 되레 SF로 다룰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호세 리살(José Rizal)이 민족 공동체를 상상하며 쓴 필리핀의 첫 근대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라야 마틴(Raya Martin)이 인용하며, 현대 필리핀의 모순을 집약한 광산 지역에서 식민종주국 스페인으로 순간이동하는 커플을 다룬 <아르스 콜로니아, Ars Colonia>(2011)를 떠오르게도 하는 언설이다. 한편 아나 바스는,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모더니즘•트로피컬리즘 등의 백가쟁명 속에서 “새로운 영화(시네마 노부)”를 주창한 글라우버 로샤(Glauber Rocha)의 <지구의 나이, A Idade da Terra>(1980)에 경의를 표하는 단편 <돌의 나이, A Idade da Pedra>(2013)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데 <돌의 나이>에서 바스는 브라질의 영화 전통을 존중하지만, 그와 동화하지는 않는다. 사회진보와 혁명을 꿈꾸던 로샤가 「굶주림의 미학」(1965)과 「꿈의 미학」(1971) 선언에서 펼친 "가난의 미학"이 실제로는 선험적 개념과 목적론적 역사관, 고정된 성역할 및 인종 재현에 기댄 예술을 창조했다고도 여기기 때문이다. 바스는 차라리 ‘사물’이 시간과 공간을 대체하여 과거/현재/미래의 경계가 없는 SF를 ‘발명’할 수 있기에, “다른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계시”하는 SF 영화를 만들겠다고 서원한다. 이 작품은 아프로퓨처리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이주와 난민의 역사를 사변 서사(SF)로 재구축하는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연작을 떠오르게도 한다. (<다공성 계곡>에 등장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돌의 나이> 속 ‘돌(pedra)’과 친연성이 크다.) 여러 평자들은, 아나 바스의 작품들이 실은 시네마노부 운동의 국가 및 젠더적 대표성보다는 북미의 애비게일 차일드(Abigail Child)나 수 프리드리히(Su Friedrich)의 작업, 즉 1970 년대 아방가르드 페미니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목적론적 서사를 부수려 시도하는” 영화들과 가깝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 마야 데렌(Maya Deren)이 실사 이미지와 사운드를 겹치면서 현실과 분리된 영화적 세계와 집단적 역사 감각을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도 분석한다. 2020년 사사로운 리스트에 아나 바스의 <왜?>와 더불어 꼽은 <방파제, Quebramar>(2019)를 연출한 크리스 리라(Cris Lyra)도 브라질 여성 감독이다.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후계자라 불리는 리라는 <방파제>에서 젊은 레즈비언들이 새해를 맞으러 떠나는 길을 동행한다. 이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과하며 성 정체성 논의와 그로 인한 개인적 체험, 브라질 사회의 긴장은 새로운 시공의 서사로 재구축된다. 또, <방파제>는 짧은 시간 안에 등장인물들의 몸과 목소리로 브라질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고 진동시킨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비전형적 여성성을 탐구하는 리라의 차기작 <내 말을 들어줘, Ouça>는 팬데믹 시대 퀴어 여성들의 편지에 기반한 러브스토리라 한다. (<방파제>와 <왜?>는 모두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 Mubi 한국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성영화의 선두주자인 아르헨티나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이 제작 중인 신작 <초코바르, Chocobar>는 2009년에 살해된 선주민 활동가 하비에르 초코바르에 관한 비디오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수집해 재편집하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다. 한데 아나 바스는, 비디오나 필름보다 더 오래된 매체인 종이에 선주민들이 그리고 쓴 드로잉 몇 점을 ‘풍경’ 이미지, 소리와 충돌시킨 몽타주만으로 큰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글과 그림은 자신을 학살하고 쫓아낸 국가의 총과 칼•전투기 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네이팜 때문에 폭사한 아마존의 물고기들, 열대우림을 베어내는 자본의 거대한 전기톱까지 생생히 기록하고 낱낱이 증언한다. 현실 풍경과 겹쳐지되, 투시 원근법에서 자유로운 선주민들의 드로잉이 재창출하는 땅의 그림(말 그대로의 ‘지도’)은, 작금의 ‘풍경’ 속에 잊힌 기억과 사라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다시 일깨운다. 역사 기억을 저장하고 새로운 예술 표현을 찾는 ‘매체’로 “쇠락한 기술적 지지체”를 ‘재창안’할 수 있다는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논의와 만나는 최근 사례가 <왜?>라고 필자가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국 작품, 김민정 감독이 16mm 필름과 디지털을 ‘재집합’하여 제주 4.3을 다시 호명하는 <레드 필터가 철회됩니다>(2020)도 또 다른 “매체 재창안”의 예가 될 수 있겠다.) 선주민들의 이차원 평면 글•그림과 16mm 필름으로 촬영해 디지털로 변환한 실사 이미지를 결합하며 매체의 역사를 더불어 기억하는 아나 바스는, 디오라마나 파노라마같은 삼차원 측면 감각이 식민과 개발을 위한 지도와 조감도ㆍ설계도에서 연원했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필리핀 출신 남성 감독 미코 레베레자(Miko Revereza)의 근작들은 사물의 움직임만으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의 이동을 형상화하면서 자본과 국가가 규정하는 현실 지도의 국경을 넘나들고, 마티 디옵(Mati Diop)이나 바스마 알샤리프(Basma Alsharif)같은 디아스포라 여성 감독들의 영화는 서사와 사운드의 운용으로 식민 통치의 기반이 된 역사적 원근법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반면, 대만 작가 수유신(Su Yu Hsin)의 <잠자는 물II, water sleep II Akaike river under Xizang Road>(2019), 국내에서 주목받은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정여름 연출) 등 지도를 작성하는 원리인 수직원근법과 게임의 3차원적 가상ㆍ증강현실 기법, GPS를 이용한 이미지를 적극 수집하여 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을 묘파하려는 시도들도 근간에 여럿 있었다. “왜?”로 번역되는 이 영화의 제목 “Apiyemiyekî?”는, 1960년 이후 선주민 문해 교육을 담당한 활동가 에기디오(Egydio)가 아카이브에 보존 중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남긴 단말마 같은 글귀(“도시 사람들은 우리를 왜 죽였지? 왜?”)에서 따왔다. 에기디오 교수는 <왜?>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인터뷰이이다. 그가 아카이빙한 글과 그림들은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선주민 학살 진실 규명 소송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다. 에기디오와의 협업 과정을 운전 중에 감독과 전화통화로 확인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와 승용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낸 뒤 닦은 BR-174 고속도로 위로 흩어져 간다. 이 사변적 (논)픽션은 어떤 ‘풍경’ 속에,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렇듯 증명하고야 만다. 영화의 카메라와 사운드 트랙이 브라질의 땅과 숲, 하늘과 물에 잠겨 있는 그들을 애타게 찾아 헤맬 때, 사진적 감각에 섞여드는 자연의 음향이 화룡점정할 때,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자취를 입은 아마존의 격랑이 이윽고 색을 얻을 때, 결코 잊힐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관객에게도 찾아온다. 영화 말미, 브리질리아로 귀환한 카메라는 분노가 내뿜는 바람에 실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카메라의 운동은, 우리가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맞서 저항할 미래의 동력이 되어줄 터다. 그래서 아나 바스의 <왜?>는 멕시코 선주민들의 역사와 운동을 ‘재집합’하는 ‘로스 인그라비도스 집단'(Colectivo Los ingrávidos)의 영화들과도 닮았다.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
일흔을 바라보던 존 포드는 존 웨인과 함께 영화사상 가장 정교한 실내 서부극이라 부를만한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찍은 뒤, 웨인을 < 말없는 사나이 >의 이니스프리를 닮은 또 다른 샹그릴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은 ‘할레아칼로아’(Haleakaloa)라는 허구의 지명이 주어진 폴리네시아의 한 섬이다. 실제 촬영 장소는 하와이의 카우아이이며, 할레아칼로아는 하와이어로 ‘웃음과 사랑의 집’이라고 한다. 이니스프리보다 이상향에 더 가까운 이 아름다운 섬에서 존 웨인이 분한 ‘건즈(Guns) 도노반’은 한 때 전쟁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몇 척의 배를 거느리고 ‘도노반의 산호초’라는 술집을 운영하며 풍요와 게으름을 만끽한다. 서부극 만들기를 직업적 책무로 여기던 전후의 포드가 이 외딴 섬에서의 촬영을 일종의 휴식으로 여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정말로 휴식과도 같은 영화다. 사건에의 무관심이 많은 포드 영화들의 숨겨진 태도라고 해도, 또한 후기로 갈수록 그 태도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해도, <도노반의 산호초>보다 더 무관심할 수는 없다. 제거해야 할 악은 물론 공동체나 개인을 위기로 몰아넣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구의 폭력적인 사내가 이 ‘웃음과 사랑의 집’에서 할 일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소동과 사랑 외엔 없다. 계급과 성향이 다른 남녀의 결합이 주된 테마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포드의 드문 스크루볼 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처럼 사랑의 성취를 위해 주인공이 애써야 할 일도 없다. 사소한 결핍과 결함들이 무기력과 지루함을 방지하는 유쾌한 오점이 되는 세상, 어떤 긴급한 행동도 요청되지 않는, 그러니 행동 대신 활동만 난무하는 세상. 포드 영화는 결국 이런 곳을 향해 긴 항해를 해왔을 것이다. 서부극 외엔 포드 영화의 상업적 잠재력을 미심쩍어하던 메이저 스튜디오가 이런 한가한 세계를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1962년 7월, 포드가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파라마운트는 투자 보류 결정을 내린다. 포드는 철수하지 않고 자신이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파라마운트는 배급만 맡고 ‘존 포드 프로덕션’이 제작 크레디트에 오른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한가롭고 아름다운 섬에서,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을 시작한 포드는 매일 밤 다음날 촬영 분량을 구상하는, 즉흥 연출에 가까운 작업을 시도했다. 고령의 포드가 ‘액션’을 외치고 나서야 아직 대사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제작 환경은 이 영화의 느슨함, 불균질성 그리고 활력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개봉 직후 앤드루 새리스가 「빌리지 보이스」(1963. 8. 1.)에 기고한 평은 “<풀밭 위의 오찬>이 장 르누아르의 <폭풍우>이듯,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존 포드의 <풀밭 위의 오찬>이다.”라는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포드의 <도노반의 산호초>와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이라는 영화,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폭풍우>라는 희곡은 공히 “노예술가의 평정심과 지혜의 궁극적 정수”라는 것이다. 새리스는 이 작품들에서 “(창작자의) 활달한 사적 비전이 유동하며 캐릭터들의 윤곽을 지워간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노예술가의 작품을 ‘평정심과 지혜’의 산물로 보는 건 너무 상투적인 단정이 아닐까. 오히려 만년의 포드라면, 실은 만년의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이지만,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서 아도르노의 논의를 빌려 베토벤의 후기작을 두고 말했던 “달관, 체념, 이해, 화해, 포용, 조화, 종합이 아닌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궤적,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또 한 번의 혁명이며 창조적 몸부림”의 표현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젊은 날의 포드 영화를 포함해 많은 포드 영화가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표현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이미 < 굽이도는 증기선 >이나 < 젊은 날의 링컨 > 같은 포드의 1930년대 작품에서조차 소란과 난장의 디오니소스적 활력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또한 ‘영예의 시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낮도깨비 같은 영화 < 타바코 로드 >에서 속수무책의 파국과 파열의 소요를 만나지 않았는가. 포드의 마지막 작품이 더없이 엄격하고 운명론적인 <일곱 여인>이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로선 아직은 어떤 부류의 단계론이나 양식화도 보류하고, 개별 작품을 하나의 독립된 전체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1 #2 #3 #4 #5 < 도노반의 산호초 >의 첫 장면도 < 말없는 사나이 >만큼이나 사랑스럽다. 배우 리 마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분한 ‘보츠(Boats) 길훌리’가 섬에 도착하는 첫 시퀀스를 좋아하지 않기 힘들 것이다. 할레아칼로아 연안을 지나는 해군 함정에서 갑판 청소를 하던 길훌리(중년이며 전쟁영웅인데도 여전히 사역을 하는 사병이다)는 선장이 섬에 정박하지 않을 거라고 낄낄거리며 심술궂게 말하자 같이 낄낄거리다 선장을 막대 걸레로 내려친 다음 경례까지 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멀리서 헤엄치며 일으키는 물보라만으로 섬사람들은 그가 길훌리임을 알아보고, 모두 항구에 몰려나와 춤추며 환영 퍼포먼스를 벌인다. 곧이어 도노반이 도착하고 예정된 주먹다짐을 시작한다.(#1~#5 ) 같은 날에 태어나 22년째 자신들의 생일만 되면 주먹다짐을 벌이는 전통을 이어온 전쟁 동료인 두 사내의 대결은 섬 최고의 이벤트이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 폭발 직전까지 압축된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이자 대단원이었던 두 사내의 대결과는 다르게, 아무런 서사적 기능이 없는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윌리엄 데드햄 박사가 치고받고 있던 두 사람을 꾸짖자 대결은 영화 초반에 끝나버린다. 그토록 인상적으로 등장한 리 마빈의 역할도 이후엔, 그의 팬이라면 섭섭한 일이지만, 코믹한 조연의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리 마빈은 촬영장에 매일 술에 취해 나타났기 때문에, 포드가 그의 역할을 축소시켰을 가능성도 크다). 두 사내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지만, 이 섬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곧 보스톤의 부유한 상속녀 아멜리아가 길훌리에 이어 섬에 도착한다. 그녀의 임무는 이곳의 유일한 의사이며 원주민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윌리엄 데드햄 박사를 만나 유산 양도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다. 여기엔 가족을 버리고 떠도는 미지의 아버지와 독립적인 여인으로 성장한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오래된 테마가 있다. 또한 도시적이고 세련된 여성 아멜리아와 전근대적이고 마초적인 남성 건즈 도노반의 대립과 결합이라는 스크루볼 코미디적인 테마도 있다. 이 부녀(아멜리아-데드햄 박사)와 남녀(아멜리아-도노반)의 대립적 관계는 개인주의적이고 문명화된 동부와 공동체적이고 야성적인 서부의 갈등이라는 서부극 테마의 변주다. 무엇보다 이곳은 원주민, 일본인 하인과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 프랑스인 지사와 목사 및 간호사, 미국인 유지와 의사,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뒤섞인 인종 전시장이다. 인종주의는 특히 아멜리아와 배다른 혼혈 동생과의 대면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테마다. 하지만 포드는 이 테마들을 다루는 데 많은 숏을 할애하진 않는다. 데드햄 박사는 모든 면에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니 부녀의 화해에는 별다른 장치가 필요하지 않고, 도노반과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매력적인 남녀로 설정되어 있어 이들의 결합도 시간문제다. 인종주의는 뒤에 말하겠지만 서사의 주제가 아니라 퍼포먼스의 주제로 다뤄진다. < 도노반의 산호초 >의 포드에게, 테마처럼 보이는 것들은 제재들이다. 서사적으로 탐구될 주제의식이 아니라 일종의 상황 혹은 조건에 가깝다. 유사 테마를 던져놓고 포드는 그 상황 아래 놓인 인물들과 유희한다. <도노반의 산호초>는 더도 덜도 아닌 영화적 놀이다. 그런데 놀고 있는 건 인물이 아니라 포드 자신이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 그 유희의 물리적 운동감과 활력이다. 아멜리아의 도착과 그에 이어지는 시퀀스들에서 보는 이를 사로잡는 것도 이런 것이다. #6 #7 #8 #9 #10 #11 아멜리아를 해안으로 무사히 안내하기 위해 도노반이 카누로 마중을 나오지만, 두 남녀는 모두 물에 빠진다. 그러자 원주민으로 보이는 선원들이 줄이어 바다로 뛰어든다. 그녀가 지갑이 바다 속에 빠졌다고 말하자 도노반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그도 곧바로 뛰어든다. 깔끔한 안내는 실패하고 두 남녀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은 바닷가에서 도노반의 손에 끌려가던 아멜리아의 엉덩방아와 작은 물보라다.(#6~#11) #12 #13 # 14 #15 #16 아멜리아를 태운 지프는 출발하자마자 엔진 폭발음을 내며 달린다. 폭발음은 데드햄 박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날 밤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몰아친다. 문소리에 깨어 1층에 내려간 아멜리아는 집에 들어온 아이와 뒤따라온 도노반, 그리고 들이닥치는 비바람을 만난다. 아이를 비바람 부는 밤에 데리고 다닌다고 아멜리아가 도노반을 비난하자 도노반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다시 거센 비바람이 실내로 몰아치며, 문을 닫던 아멜리아는 엉덩방아를 찧는다.(#12~16)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 이 셋의 의미론적인 연관은 없다. 이들은 이야기와는 이질적인 영역의 잉여들이다. 굳이 찾자면 공통점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낯선 여인과 접촉한 이 섬의 물리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아멜리아의 바닷물과의 접촉, 자동차와 접촉, 대기와의 접촉에 대한 반응이 각각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인 셈이다. 주민들은 환대하고 있지만 원시의 섬 할레아칼로아는 지금 대도시에서 온 방문자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없이도 이 장면들은 우리를 사로잡는데, 물보라가 다른 물보라를 불러내고, 엔진 폭발음이 물보라의 시각적 소란을 이어받으며,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물보라와 폭발음에 대답하는 역동적 연쇄의 박력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도착에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들에서 활동하는 건 어떤 서사적 기능도 없이 역동하는 이 잉여들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연쇄적 소란이 화면에 무의미의 활력과 리듬감을 빚어내는 것이다. 섬의 고장 난 소품들도 잉여들의 소란에 가세한다. 작동하지 않는 축음기, 6년째 고장인 슬롯머신은 소음을 뱉어낼 뿐이며, 뚫린 교회 지붕의 구멍으로 비가 쏟아져 예배자들을 적신다. 서사는 진전을 잊고 소음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소란을 합주한다. 이곳은 그런 잉여들과 소음들의 축제다. #17 #18 #19 #20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축제가 우리를 홀린다 해도, 이런 영화적 놀이가 과연 칭송받고 존중받아 마땅한가. 왜 우리는 이야기를 잊고 활개 치는 잉여의 숏들에 종종 매혹되는가. 잉여의 숏으로 충분하다면 이야기는 왜 필요한가. 가능한 대답 하나는 이야기의 구속이야말로 잉여의 숏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 안에 있으면서 이야기와 긴장하고 있지 않다면 잉여라고 불릴 이유도 없다. 위대한 숏이 심미적인 구도의 이미지이거나 이야기에 충실히 봉사하는 이미지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이야기로부터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 이미지도 아닌, 이야기와 교섭하고 긴장하며 이야기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운동이다. 위대한 숏은 아무리 유희적으로 비치더라도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역설의 구현이다. < 도노반의 산호초 >가 유독 유희적으로 보인다면, 포드가 어떤 영화에서보다 이야기를 느슨하고 허술하게 만들어 곳곳의 틈새들을 잉여들의 놀이터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술집에서의 난투극처럼 쓸데없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도노반의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게 된 길훌리는 술 마시러 온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하사관 셋을 경멸 투로 ‘수병(limey)’이라 부르며 내쫓으려 한다. 싸움이 붙으려는 찰나에 도노반이 뜯어말린다. “우린 전우였잖아”라는 도노반의 말에 수긍하고 웃으며 화해의 악수까지 나눈 뒤 ‘수병’은 뒤따라온 사병에게 “넌 저 양키 두 놈과 한패 먹어. 이제 3대3이지?”라며 사병의 얼굴을 갈긴다. 갑자기 싸움판이 벌어지자마자 길훌리는 수병이 아니라 도노반을 때려눕힌다. 몰려온 수병들까지 가세하지만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알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 와중에도 도노반은 길훌리가 일어설 때마다 때려눕힌다. 클라이맥스는 그다음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길훌리가 난데없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자, 6년째 고장이던 기계가 동전을 폭포수처럼 뱉어낸다. (#17 ~ #20) 이치에 닿지 않고 어리석으며 유치하고 폭력적인 본능의 퍼포먼스가 벌어진 뒤 갑자기 축복이 쏟아진다. 슬롯머신의 동전 세례는 말 그대로 하늘의 축복이다. 이 돈으로 비로소 교회의 지붕을 고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선 그리고 < 도노반의 산호초 >에선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진지한 이야기가 다룰만한 심각한 문제란 존재하지 않고, 선의의 인간들은 게으른 시간을 누리며, 바다와 하늘과 사물들은 이유 없이 삐걱거리며 소음을 연주하고, 작은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고장 난 사물, 심술궂은 대기의 변덕스러운 작동, 하지만 난데없이 되찾아지는 균형과 해결되는 갈등. <도노반의 산호초>가 장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과 공유하는 게 있다면 인간의 서사를 오작동시키는 정령의 서사라는 점이다. 이건 존 포드의 전적으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포드의 많은 서부극들은 이미 인간의 서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초월적 풍경의 서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1 또 다른 시퀀스 하나를 빠트리고 갈 수는 없다. 지붕이 수리되지 않은 교회에서 섬 주민들이 모여 성탄 미사를 시작한다. 프랑스인 지사가 내레이션을 시작하고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이에 맞춰 기발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가 탄생한 다윗의 도시를 베들레헴이라 불렀다. 저 하늘의 별을 보라. 그때 동방에서 세 현자가 찾아왔다. 세 왕들은 선물을 들고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했노라. 그중 한 명은...” 이때 섬의 원주민 경찰서장이 열대과일을 잔뜩 들고 등장한다. “폴리네시아 왕이었고...”(#21 ) #22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중국의 황제도 왔으며...”. 이번에 지사의 비서이자 책사인 중국인 미스터 유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등장한다. (#22 ) #23 “또 한 명은...”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읽던 지사가 잠시 멈칫한다. “...또 한 명은 미국의 왕이었다.” 어이없게도 풀잎 면류관을 쓴 길훌리가 고장 난 축음기를 들고 등장한다. (#23) #24 이 순간 폭우가 쏟아진다. 모두 예상한 듯 우산을 꺼내 들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과 ‘미국의 왕’ 길훌리는 물세례를 받는다.(#24 ) 이것이 이 영화에서 인종주의를 다루는 포드의 방식이다. 서사의 기술이 아니라 액자화된 퍼포먼스로 인종 간의 화해를 노래하기. 포드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는 서사의 정교한 장치를 채택하지 않는다. 허구로서의 서사적 해결을 설득하는 대신 그는 인종주의를 다룬 하위 서사를 과장되고 날조된 퍼포먼스로 제시한다. 과장과 날조를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지위, 인간의 서사를 다루는 포드의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여전히 대지의 감독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