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캣][마술배우기]리버스 카드마술
- 제작년도
- 2007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1978년 3월 16일 아침 9시 10분. 이탈리아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한 기독교 민주당 대표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날은 기독교 민주당이 서구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공산당과의 연합정부를 구상하고 신임투표에 들어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일명 ‘역사적 타협’의 설계자였던 모로는 당 안팎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납치, 살해, 테러, 총격전이 횡행했던 이탈리아의 가장 어두운 시기, 이른바 ‘납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좌우간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의 희생자 아이콘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모로는 납치 당한 지 55일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다섯 명의 경호원이 죽고 모로가 납치된 그날로부터 빨간색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모로의 시신이 발견되는 날까지,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TV에 붙어 있던 55일 간의 일을 벨로키오는 오랫동안 곱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로 사망 40주기가 되던 해에 그는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그 55일의 이야기를 다성적이고 기념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저버리고 거대한 비극을 상영했던 (벨로키오의 비유에 따르면) ‘거대한 TV 극장’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44년 후에 (이번에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탈리아 TV를 통해 다시 한번 송출된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 익스테리어, 나잇 >(2022)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첫 시리즈 작품이다. 6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러닝타임 330분에 이르는 이 시리즈는 애초 TV 방영을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자 극장용 영화로 확장되었다. 제작 방식뿐 아니라 작품의 릴리스 방식 또한 무척 이례적이고 예언적이다. 시리즈물로서는 영화제부터 극장, TV, 무료 스트리밍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배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고, 이 사례가 예외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예언적이기도 하다. 사실 시리즈물이 유수 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22년 칸영화제는 <익스테리어, 나잇>을 칸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했다. OTT 영화에 대한 거부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온 칸일지라도 83세 이탈리아 거장의 시리즈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칸에서의 프리미어 상영 즈음에 두 파트로 나눠 이탈리아 극장에 순차적으로 개봉됐고, 이탈리아 TV에서 방영된 다음 이탈리아 넷플릭스와 무료 플랫폼 라이플레이(RaiPlay)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적어도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쉽게, 다양한 통로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럼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1978년의 TV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을? 벨로키오는 2003년에 모로 사건을 이미 한차례 영화로 만들었다. < 굿모닝, 나잇 >(2003)은 붉은 여단의 관점으로 밀실에 감금된 모로를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내부 시선의 영화라면, <익스테리어, 나잇>은 시선을 외부로 전환하고 확장한, 리버스 버전의 영화다. 자연스럽게 여기엔 주인공이 여럿이다. 벨로키오는 정치인, 교황, 가족, 붉은 여단원을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 삼아 사건에 얽힌 그들의 내면 풍경을 자꾸만 반복 변주되는 악몽의 사이클로 재현한다. 에피소드 1에서는 기독교 민주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구상하는 모로의 정치적 이상 뒤에 숨겨진 그의 불면과 연약함, 관용과 사랑을 그린 다음, 에피소드 2에서는 그의 정치적 동지인 내무부 장관 코시가의 죄책감과 정신분열적 망상을, 에피소드 3에서는 모로를 구하기 위해 온갖 방도를 강구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절박한 무력감을, 에피소드 4에서는 붉은 여단 내부에 번져가는 정치적 의심을, 에피소드 5에서는 모로의 아내 엘레오노라의 고통과 소외를 거쳐 에피소드 6에 이르러 환상과 상상, 꿈으로는 바꿀 도리가 없는, 총체적인 파국으로 맺는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IMDb (촬영: Anna Carmerlingo) 에피소드마다 불현듯 끼어드는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환상과 꿈이 구현하는 것은 대개 알도 모로의 환생이다. 역사적 비극을 다각도로 재고하는 벨로키오의 상상력은 불가역적인 역사의 결말을 그렇게 뒤집는다. 공히 모로 사건을 다룬 <굿모닝, 나잇>과 <익스테리어, 나잇>에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바로 그 점이다. 역사에 환상과 상상, 그리고 꿈의 이미지를 덧대어 숨겨진 진실의 일단을 들춰 보이는 것. 어쩌면 결론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 그 환영의 세계에서 모로의 운명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그렇게 <굿모닝, 나잇>의 엔딩에서 다시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감금된 밀실에서 탈출한 모로가 새벽 거리를 비척대며 걸어가는 몽환적인 장면으로 끝나고, <익스테리어, 나잇>은 로마 병실에 누운 모로가 문병 온 동료 정치인들에게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우 초현실적이고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이 오프닝의 환영은 러닝타임 330분을 관통하는 일련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거기서 모로는 코시가의 방음된 밀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침실 의자에 앉아 불면의 밤을 보내고, 홀로 십자가를 진 채 고난의 길을 걷고, 동료 정치인들과 함께 익사한 시신으로 강물에 떠내려가고,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걸어 나온다. “그 남자는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했다.” 벨로키오는 감독 노트에 그렇게 적어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의 수사가 아니라 실제의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재현해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새롭게 밝히지 않으면서도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허구를 통해, 오직 상상력만으로. (좌) <굿모닝, 나잇> 중 / (우) <익스테리어, 나잇> 중 / 사진: IMDb( 1 , 2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탈리아가 기묘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기다. 벨로키오는 그 시대의 풍경을 장대한 프레스코화처럼 펼쳐놓고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인물들을 차례로 무대 중앙에 세웠다. 1막이 오르고, 2막이 오르고, 3막에서 또다시……. 그렇게 여섯 개의 장에 33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로의 정치적 동지와 정부가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영화는 낮은 톤으로 서늘하고 선명하게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벨로키오는 자신의 첫 시리즈물을 만들면서 그걸 무어라 규정하든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익스테리어, 나잇>은 영화제와 극장 스크린, TV와 OTT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시네마의 경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를 즐겁게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완전한 몰입의 330분이 지나고 나면, 이걸 뭐라고 부르든 간에 저 멀리 제 길을 가는 시네마의 발걸음을 좇느라 바빠진다. 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영화는 매번 시네마의 경계를 탐문하느라 머뭇대는 우리를 저만치 앞질러 간다. 강소원(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영화제에서 일한다. 매년 엄청난 편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나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얕은 부감으로 촬영한 것뿐인 대화 신이다. 이 신은 카메라와 대상 간의 거리 감각을 왜곡하는 것을 목표로 찍혔는데 두 인물의 대화를 보여주기 위함인지 카메라는 처음에 시계 반대 방향으로 패닝하다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의 회전 방향은 불규칙하게 흘러간다. 이 신이 낯설어 보인다면 연출자 에두아르도 윌리엄스가 360도 VR 카메라, 즉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방사되는 여덟 개의 렌즈를 사용하여 영상을 촬영하는 구형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VR 카메라의 특성과 작업방식 덕분에 윌리엄스는 후반 작업을 할 때 신의 구도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는 촬영할 때와 다른 형태로 장면을 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의 형태와 질감, 조형에 있어 실험을 멈추지 않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신가 윌리엄스는 10년 간의 커리어 동안 노마드와 같은 여정을 통해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도입해 왔다. 디지털과 셀룰로이드 포맷(16mm)을 혼합하여 촬영한 < 인류의 상승 >(The Human Surge, 2016), 고프로(GoPro) 360으로 촬영하여 < 인류의 상승 3 >로 진화하는 단초를 제공한 초현실적인 질감의 단편영화 <파르시>(Parsi, 2019), 내시경 카메라를 내장 기관 속으로 삽입하여 인체 해부도를 그려낸 <매우 긴 지아이에프>(A Very Long GIF, 2023)까지, 하나같이 영화 표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들이다. 글로벌 환경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불안한 젊은이들의 행적을 연결한 <인류의 상승>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상승 3>는 페루, 스리랑카, 대만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청년들의 삽화를 뜨개질한다. 중심 서사랄 것이 없는 이 영화는 국가, 캐릭터, 대화의 사이에서 방황하는데, 1편의 네트워크 내러티브 구조를 완전히 유동적인 스타일로 재구성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는지에 대한 놀이의 영화를 발명하였던 윌리엄스는 걷고, 말하고, 시시덕거리는 십대들의 목적 없는 여행이 호수와 평원, 언덕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마술적인 시청각 조형술을 통해 연출한다. 야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인물들과 달리 윌리엄스의 예술적 야망은 원대하지만 결코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자연스럽고, 더 가벼우며, 더 장난스러운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들은 마치 웜홀을 통과한 것처럼 그들 각자의 거처에서 튀어나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구의 친구들과 함께한다. 표랑하는 존재의 상태와 연결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수의 상황은 화면 안과 화면 바깥에서 동시에 펼쳐지거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쇼트 또는 매치 커트, 쇼트-리버스 쇼트 편집 따위의 영화적 관습을 회피하면서 몰입형 스토리텔링에 도달하는 시퀀스들을 제시한다. 롤 플레잉 게임(RPG)이나 가상현실 영상에서처럼 360도 기술의 한계를 넘어 이미지에 기묘한 단절과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물결과 같은 파장 효과, 형상의 굴절, 비디오 스트리밍이 지연될 때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흐름, 리듬이 개입하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재현의 불완전함은 영화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파노라마적인 풍경 쇼트의 흐름을 방해하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정지 상태, 즉 육체와 우주가 만나고 인간과 풍경이 합치되는 듯한 초월의 느낌을 자아낸다. 동시대 영화감독들과 달리 윌리엄스의 모든 작업은 이론의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감각적인 호기심에 이끌려 진행되어왔다. <인류의 상승 3>에 나오는 인물들은 1편에서처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 갇히지 않는다. 거주의 장소로부터 해방된 이들은 여러 장소를 순간 이동하며 이동의 경로를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한다. 느슨하게 떠돌고 표류하는 놀이의 분위기뿐 아니라 오류, 예측 불가능성, 탈 중심성 등은 전작으로부터 이어진다. 극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명상적인 여정을 통해 안정된 개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스토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 러닝타임 내내 저들은 꿈, 환각, 이미 보았거나 앞으로 보게 될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며, 한 신 안에서 두 가지 언어의 교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광경과 소리, 말들이 누적되면 단일한 타임라인으로 내러티브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부질없어진다. 표면의 물리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확장된 공간에서 이를 통합하는 능력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윌리엄스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경로들은 한눈에 보지 못하는 무한한 수의 잠재적 경로에 대한 인식을 활성화한다. 우리들 앞에 놓인 상황을 실재라고 가정하면, 잠재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을 실재와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상승 3>를 보는 것은 실재 현실과 가상 현실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 공존하는 전례 없는 체험이 된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제한적인 아트하우스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노정된 예술영화의 상투형을 탐구하는 것에 만족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의 야심은 광대하며, 심지어 <인류의 상승 3>에서 시네마의 존재론적 가소성(可塑性)을 시험한다. 영화가 비디오 게임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증거 중 하나이다. 게임 속 인물은 전통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여러 장소들을 이동하는 ‘아바타’에 가깝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의 미학에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윌리엄스의 미학은 특정 기술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술이 미학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인류의 상승 3>는 ‘가상’이라고 부르는 효과가 가상현실의 기술적 작동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제작의 고정된 프레임을 해체하려 한다.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에서 ‘연결’에 대한 감각과 마찬가지로 매체들의 경계와 기원, 쓰임, 효과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믿는 감독과 현실을 믿는 감독’이라는 앙드레 바쟁의 이분법에 윌리엄스는 도전한다. 그는 카메라가 실제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에 영화의 본질이 있다고 믿는 ‘존재론’의 전제를 붕괴 직전까지 밀어부친다. 열대우림의 울창한 숲속을 탐사하는 한 장면에서, 인물들이 큰 나무 주위에 모여 있을 때 카메라는 인간 피사체를 떠나 윙윙거리는 곤충을 따라가며 몇 초 동안 이 생물체의 클로즈업을 담는다. 촬영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윌리엄스는 곤충을 발견하고 사후에 프레임에 담는 대안을 구상했다. 윌리엄스의 방법론은 촬영의 순간 카메라가 현실에 임하였고 함께 존재했는가, 라고 하는 실존적인 계율에 의문을 던진다. <인류의 상승 3>의 마지막 부분에서 윌리엄스는 명료한 설명을 제공한다. 원숭이가 천천히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기나긴 쇼트를 촬영할 때, 카메라는 피사체에서 서서히 멀어지면서 360도 회전한다.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덟 개의 렌즈 이음새가 이미지를 만화경처럼 흐릿하게 표현한다. 이미지가 확대 및 축소됨에 따라 픽셀화되고, 이미지와 현실의 구분이 디지털 노이즈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이 반역적인 이미지들의 안무가 끝나갈 즈음 번개가 번쩍하며 페루의 작은 산 정상으로 순간 이동한다. 공상과학의 영역으로 발을 디디는 것처럼 보이는 이 클라이맥스 신에서는 일곱 명의 십대 청년들이 산을 오르면서 이야기하는데, 360도 VR 이미지가 삼중으로 왜곡된다. 여기서 기술의 효용성은 그 차이와 특성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해 때때로 3D 이미지와 2D 평면 사이의 접점이 노출되는데, 이는 윌리엄스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5분 정도 지속하는 이 신들의 연결에서 줄기차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정글을 촬영하기 위해 제자리에 고정된 직후 나무를 지나서 프레임 상단에 위치한 들쭉날쭉한 교차점에 초점을 맞춘 다음 그 주위를 회전하여 어지럽고 만화경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쇼트를 이어 안개에 휩싸인 경사로를 따라 산 정상으로 향하는 단체 하이킹을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시각화한다. 각각의 장소들, 그들 장소의 이동은 비현실적이고 기괴하며 외계의 공간 감각을 자아내는데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디지털 오아시스,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뒤집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하늘과 땅은 구부러지고 왜곡된다. 얼굴과 몸은 줄무늬로 분해될 것처럼 보이고, 중력조차도 선택적이 되어 일부 사람들은 붕붕 뜨거나 공중제비를 돌기도 한다. 순간, 리얼리즘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놀이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변형되는 이 기이한 언덕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을 변위된 촉각의 영역으로 바꾸어 관객들이 자신의 신체를 새로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윌리엄스의 목표와 맞닿는다. <인류의 상승 3>은 평범한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영화이다. 영상을 보면서 발견한 것들은 새로운 장소, 낯선 장소, 현실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의 인상을 주는데 이미지의 질감뿐만 아니라 다양한 촬영 상황에서 이러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은 경이롭다. 비디오 게임을 배신하는 기괴한 시각적 기법과 모호한 주제와 철학적 레토릭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지루함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현대영화에 대한 기대를 거스르는 창작 방법을 활용하여 새로운 네트워크가 세상과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낸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의 담대한 실험은 영화 이미지의 해체, 세계화에 대한 탐구, 다성적 테크놀로지의 공존이 만들어내는 비디오 아트를 하나로 녹여 버그에 비견할만한 시네마 쿠테타를 기도(企圖)하고 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 류(신하균)는 신장병을 앓고 있는 누이(임지은)의 수술비를 변통해야 한다. 언어소통의 불가능성은 영화 내내 류와 누이의 대화를 자막이나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도록 만든다. 이야기의 도입부, 한 라디오 방송에 류가 보낸 사연이 DJ의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카메라는 라디오를 든 류의 손, 환자복을 입은 누이의 손을 차례로 클로즈업한 뒤 이어폰 줄을 더듬으며 느리게 올라간다. 류와 누이는 옥상에서 각자의 귀에 이어폰을 하나씩 꽂고 라디오 사연을 듣는다. 마른 눈물이 흐르는 누이의 얼굴, 류의 뒤통수가 보이고, 다음 쇼트에서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그리고 옥상의 전경이 사선 앵글의 익스트림 롱 쇼트로 제시된다. 액션이 벌어지는 공간을 총체적으로 조망해주지 않고 세부로부터 시작해 전체로 나아가는 쇼트의 위계는 일반적인 장면 구성 방식을 뒤집는다. 원경에서 전경으로 쇼트의 크기를 점진적으로 증감함으로써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돕지 않고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거리를 증감하면서 장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지연시킨다. 말보다 이미지를 통해 스토리를 기술하는 박찬욱의 시청각적 스토리텔링은 쇼트 구성의 관습을 파괴하고 하나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두 개 이상의 맥락으로 확장하는 편집의 전략을 구사한다. < 복수는 나의 것 >은 자연스러운 쇼트의 배열이 스토리의 흐름을 매끄럽게 잇는 스타일의 표준 관행을 파괴한다. 다른 기술적 요인들보다 편집은 마음의 눈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새로운 관람의 경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소비에트 몽타주 편집 전통의 재래(再來)를 볼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에이젠슈테인이 ‘어트랙션(attraction)’이라고 부르는 몽타주의 효과는 폭력적인 결말을 향하는 캐릭터의 나선형 여정과 그것을 기술하는 편집 스타일을 통해 보증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는 관습적인 쇼트-리버스 쇼트 체계를 찾기 어려운데 대화 장면에서 이를 대신하는 것은 카메라를 보고 말하기이다. 카메라를 보고 말하게 하는 것은 정면 클로즈업이 배우의 표정과 그것이 자아내는 인상을 가장 잘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류와 그의 여자 친구 영미(배두나)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정면을 향한 두 인물의 얼굴을 수직으로 찍는다. 류는 벙어리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영미 혼자이고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건 저들의 표정, 특별히 대사를 읊어주는 영미의 입술 모양이다. 몽타주 체계와 관련하여,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둘 이상의 상황을 나란히 배열하는 평행 편집의 활용이 잦다. 일련의 병렬 편집은 딸 유선(한보배)의 유괴 사실을 알게 된 절망에 빠진 아버지 동진과 류 사이에서 시점을 앞뒤로 이동한다. 여기서 유선의 장난감 인형은 그래픽과 주제를 연결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인형은 캐릭터를 연결하며 장면의 초점을 류에서 동진으로 옮기며 이들의 융합을 예고한다. 어느 시점에서 유선이 가지고 놀던 인형의 클로즈업 쇼트와 함께 동진의 목소리가 “아빠는 유선이를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유선이도 아빠를 사랑해요, 진짜”라는 유선의 목소리와 함께 끔찍하게 분장을 한 새로운 인형으로 이행한다. 인형을 둘러싼 조명은 어둡고, 눈에서는 피가 흐르며, 흥정을 위한 몸값 메모가 첨부되어 있다. 인형의 몽타주는 류와 동진을 연결하며 몸값 흥정을 기술하는 서사적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유선, 류의 누이, 영미가 죽은 후, 류와 동진은 각자의 복수 계획에 의해 인질로 잡혀 이 나란한 이미지들의 뒤틀린 변주를 형성하게 된다. 평행 편집을 활용한 쇼트의 연속성 패턴은 장면을 하나로 모아 캐릭터 개발에 도움이 된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도 평행 편집이 나타나며 라스트의 강력한 대결 장면에서 류와 동진이 만날 때까지 속도와 강도는 높아진다. 이처럼 해설적이기 보다 묘사적인 편집의 맥락을 따라갈 때 모든 플롯 요소를 하나의 응집력 있는 스토리로 연결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대화가 최소화되기 때문에 관객은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쇼트의 배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창의적인 사운드 몽타주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사례도 있다. 사운드 몽타주는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 스토리 세계에 흩어진 위치들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동원된다. 류가 누이의 자살을 알고 울부짖는 신에서 절묘한 사운드 몽타주의 사례가 나온다. 류의 감정적 상처가 깊은 이 신은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시퀀스이다. 누이의 자살 메모와 핏물 속에 잠긴 그녀의 팔을 보고 류는 울부짖는다.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유선이 보는 동물 만화가 재생되고 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세상을 잠식해가는 동안 몸값 거래가 이루어진 공원에서는 검은 비닐이 얼굴에 씌워진 채 묶여 있는 동진의 앞에서 개가 짖고 있다. 그 짐승 소리의 질감과 리듬에 맞춰 동진도 울부짖기 시작한다. 카메라의 주관적인 시점은 비명을 지르는 동진과 멀리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도시를 응시한다. 이 신에서 사운드 편집 및 청각 신호는 다른 위치의 캐릭터들을 나란한 좌표 위에서 연결하고 고도로 양식화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편집 스타일에 담긴 영화적 효과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은 동진에게 류가 죽임을 당하는 신이다. 먼저, 관객은 동진이 류를 끌고 냇가를 가로지르는 조감 쇼트를 본다. 두 번째로 물속에서 류의 발목이 보인다. 이어 동진과 류의 투 쇼트로 커팅하여 동진이 복수의 정당성을 고지한다. 탁한 물에 잠기는 동진. 카메라는 방금 절개된 류의 아킬레스건을 클로즈업 쇼트로 잇는다. 류의 소리 없는 절규나 고통받는 노동 계급의 외침을 들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심이 낮은 시냇물에 빠져 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진. 핏물이 얼굴에 튀었을 때 동진은 눈을 깜박일 뿐이다. 마침내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 동진은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다. 자본가의 노동계급에 대한 가혹한 승리를 함축한 류의 죽음 신은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복수’라는 아이러니한 주제를 달성하였다. 결국 모든 캐릭터는 복수를 찾는다. 그러나 관객은 복수심에 불타는 캐릭터 둘 다에게 공감하는지, 공감하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영화는 복수의 길을 택하면 아무도 이길 수 없고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이들의 죽음과 복수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유선을 인질로 삼으려는 류의 계획을 알게 된 누이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누이의 자살에 이어 류는 유선과 함께 죽음을 향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유선의 납치는 불필요했고, 누이를 돕기 위한 류의 노력은 연쇄적인 죽음의 원인이 된다. 류가 비극적으로 죽은 누이를 냇가 돌무더기에 안장하며 애도하는 동안 유선은 우발적으로 익사한다. 관객들은 류보다 먼저 위험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관객들은 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전에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박찬욱은 이 플롯 기법을 자신의 해석적 관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용하여 스토리와 주제를 연결하도록 촉진한다. 에이젠슈테인에 따르면, 쇼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트 간의 전환이 특정 시청각적 자료를 생략하여 관객을 오도하는 것처럼 보일 때 종종 의미는 모호해진다. 시공간을 오고가는 편집은 미지의 상태로 관객을 데리고 가서 인상과 느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캐릭터가 생각하는 것을 해석하도록 한다. 스토리의 더 큰 세계로 이끌려가기 위해 이 견인의 과정은 진정한 의미의 어트랙션을 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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