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구교환 브이로그
- 감독
- 이옥섭, 구교환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구교환, 박종환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솔직히 내겐 사치스러운 일이다. 영화평론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건 내 돈과 시간, 자원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영화를 감상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개봉작을 부지런히 보러 다녀야 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고전 영화도 꾸준히 찾아봐야 하며 영화 관련 이론이나 최근 담론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다.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한 달에 청탁 받은 원고를 써서 받는 돈이 이 모든 활동을 하는데 드는 돈보다 더 많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본업이 있기 때문에 주로 평일 낮에 열리는 시사회에 가지 못해 일반 관객과 똑같이 직접 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다녀야 하며 OTT 콘텐츠 구독료와 영화 관련 서적, 강의에도 돈을 쓴다. 나는 궁금했다. 다른 평론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한 학계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거나 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학생이었다. 나처럼 영화와 관련 없는 본업을 갖고서 퇴근 후나 주말에 짬을 내어 활동을 이어가는 평론가가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영화를 보고 글을 쓰나? 비정규직 회사원과 프리랜서 생활을 번갈아 전전하며 혼자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30대 여자인 내게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존의 평론을 볼 때마다 나와 시선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 중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것들이 많고, 반면 주목받지 못한 영화 중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저평가 받고 그대로 묻힌 건가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주류 대중과도 기존의 평론가들과도 시선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하나씩 짚고, 내가 영화 안에서 다르게 포착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영화의 뛰어남을 형식 중심으로만 얘기할 때의 거북함도 있다. 한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한 훌륭한 형식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그 안에 드러나 있는 노골적인 혐오나 비윤리성을 아예 못 본척하고 언급하지 않는 비평들이 불편했다.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비평을 한다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어쩔 때는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볼 필요도 있다. 형식과 내용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온전히 대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가 그 생경함으로 인해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던 타자의 시선에서 구성된 형식과 내용은 기존 영화의 역사와 문법으로만은 파악될 수 없는 지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2) 중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캄보디아계 프랑스 이민 2세대인 데이비 추 감독의 < 리턴 투 서울 >(2022) 이었다. 한국의 해외입양 정책에 의해 갓난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여성 ‘프레디’가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겪는 혼란들을 불균질적으로 담아냈다. 최근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부모 세대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외국에 정착하게 된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입양되어 외국인 부모 밑에서 평생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담았기 때문이다. 프레디의 감각은 그 어떤 한국인과도, 프랑스인과도, 또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와도 다르고, 프레디의 부모 찾기 여정은 < 라이스보이 슬립스 >(앤소니 심, 2022)의 경우처럼 캐나다에 이주했다가 한국의 친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한국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동현(이든 황)의 경우와도 매우 다르게 진행된다. 입양아, 한국계 프랑스인, 여성이라는 삼중의 소수자성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감각의 특수함이 긴 시간 안에서 파편적으로 묘사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작품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영화 중엔 여성 주체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에서 만든 영화들이 많다. 작년에는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이 그랬다.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 문제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보통 그런 영화는 두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도 낳아야 한다’라는 당위성 안에서 아이 낳는 과정을 어떻게든 긍정적인 색채로 꾸미거나 또는 아이를 지울 수 없거나 결국 낳게 되어서 불행에 휩싸이는 여성의 삶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그런 이분법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어떤 선택에 직면하고 어떤 비난에 취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킬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냉정하게 담아낸 결말에 힘이 있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 절해고도 >(김미영, 2021)에서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과 감각을 마주했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 묘사가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선했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에 영향받는 등장인물의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간과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거리감도 범상치 않았다. 계절감을 갖는 자연을 풍부하게 담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각가인 윤철( 박종환 )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자신에게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한다. 그러던 중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딸인 지나( 이연 )가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한다. 예술가가 되지 못하면 스님이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윤철은 그가 갖지 못했던 재능을 갖고 그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딸을 지켜보며 변화한다. 속세에 있을 때 서로 가시 돋친 날카로운 반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던 부녀는 딸이 행자가 되고 난 후 예우를 하고 존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딸의 삶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지하면서 윤철 자신도 변화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핸드헬드에 롱테이크로 찍혀 불안감을 자아내지만 지나가 도맹 행자가 되고 난 뒤의 후반부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고정샷으로 차분히 지켜본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한때 관계가 틀어졌던 애인과의 관계 또한 변한다. 윤철은 암이 재발해 죽어가는 전 연인을 바라는 바 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고 또 그녀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호스피스로 가는 선택 또한 존중해 준다. <절해고도>를 만든 김미영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밑에서 십여 년 동안 연출부로 활동했다. 이번 작품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과 일했던 강창호 미술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이다. < 안개마을 >(임권택, 1982)을 레퍼런스로 해서 자연 안에서 인물이 하나의 요소로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 같은 불교영화에서 다뤘던 주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여성을 타자화했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인물을 주체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주체와 그를 현혹하는 타자의 이분법을 벗어나면 영화의 정서와 스토리의 방향성, 미학 등도 다 함께 바뀌게 된다. 한국 영화의 거장 아래에서 받은 영향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시선에서 이뤄진 이 전환에 대해 좀 더 주목하고 의미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해고도>(김미영, 2021) 중 한 편의 영화엔 세상과 인생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담겨있다. 무엇을 담을 것이고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간과 빛으로 그 장면을 구성할 것인가? 이건 영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더해 살아온 삶과 사유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거기엔 단순히 영화의 역사나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과하는 삶이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영화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감각도 필요하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삶을 삶고 있는 사람들은 한 영화를 비슷하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영화에 대한 비슷한 평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감상들은 그것이 전문적인 영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서 오는 삶의 감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의견은 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넓히고,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다른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등단한 후에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쓰는 내 삶과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블로그에 취미로 영화 비평을 쓰던 아마추어 정신으로 평론을 쓰고 있다. 주류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의 흥행이나 홍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탁이 들어와도 본업에 치여 마감을 어기기 일쑤이고, 별로라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서는 에둘러서라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는 영화평론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자격을 여러모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등단한 후 뻔뻔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이런 자리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박예지(영화평론가) l 소수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쓴다. 2022 영화의 전당 영화평론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 영화비평 구독 메일링 서비스 <씨네픽션> 운영.
중반부에 영화의 스타일을 요약하는 한 장면이 있다. 늦은 밤, 열아홉의 영하( 권한솔 )는 거실 소파에 잠들어 있다. 그가 잠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영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누인 계부 영진( 박종환 )이 훤히 드러난 영하의 쇄골 부근에 찍힌 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성장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하는 듯한 이 삽화는 자식을 향한 애틋한 부정(父情)과 자신의 충동에 굴복한 남자가 느끼는 자괴 사이를 진동한다. 연출자 김유리 의 개성은 이처럼 스토리의 흐름을 함축하는 중요한 정보, 인물의 감정을 다루는 복합적인 방식에서 나온다. 부분적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플롯은 관객들이 영하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무심한 말과 행위로만 전달한다. 생면부지의 영진이 이삿짐 트럭 앞에서 서성대는 열두 살 영하(문성안)를 안아 올릴 때, 등교를 준비해야 하는 부산스러운 아침, 머리를 감는 열다섯 살 영하( 안진현 )의 목덜미 위에 그가 물을 부어줄 때, 바람이나 쏘이자며 차를 몰아갔던 비 오는 날 영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서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감지한다. 김유리 감독은 단편영화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2013)에서부터 눈여겨보았다. 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처리된 장면들을 모아 진실을 이야기할 줄 아는 연출자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주인공의 초점을 상실한 내면 상(像)을 묘사하는 이 단편에서 김유리는 스토리와 감정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 팽팽하게 제어하는 연출의 힘을 보여주었다. 김유리의 장편데뷔작 < 영하의 바람 >(2018)은 주인공 영하의 성장기를 그의 삶에 중대한 전기(轉機)가 된 세 개의 시기를 이어 붙여 구성한다. 열두 살, 열다섯 살, 열아홉 살로 도약하는 세 개의 시간 프레임에 걸쳐서 세 명의 다른 배우들이 영하를 연기한다. 이 조각난 7년의 시간 안에서 영하의 세계는 격동한다. 친부가 떠난 뒤 그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신동미 ) 슬하에서 계부와 새 가족을 이룬다. ‘박영하’에서 ‘김영하’로 전환된 이 시기 영하는 믿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또래 사촌이자 친구인 미진( 옥수분 )과 유대감을 형성한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녀는 병적으로 안수에 집착하는 어머니, 종종 다정하기도 한 계부로부터 방치된다. 가족의 붕괴와 타락한 종교, 아동 학대, 여성의 독립, 불안정한 주거 등 많은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 안에서 영하는 이 무수한 문제들과 싸우고 있다. 세 개의 챕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상술하지 않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김유리는 영하를 덮친 외풍과 세계로부터 밀려나는 존재의 비의를 침착하게 쌓는다. 보호받지 못한 성장기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그린 이 영화의 핵심 의제는 좌초된 가족이다. 집과 연결된 문제는 10대 소녀가 직면한 고독과 소외의 교차점에 있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영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이삿짐과 함께 버려진 채 서럽게 울고, 스스로 집을 떠나 골방에 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집 없이 떠돈다. 거처를 상실한 유랑의 상태로 영하를 몰아가기까지 대다수의 사건은 극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생략과 뉘앙스로 전달된다. 이를테면 신앙의 외피를 두른 어머니의 욕망과 의뭉스러운 계부와의 관계는 은근하게 암시된다.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탐사 과정은 영하의 의식이 성장하는 속도와 흐름에 맞춰져 있다. 바람은 중요한 순간마다 불어온다. 낯선 운전기사가 모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열두 살 영하에게, 완전히 혼자가 되어 폐허의 골목길을 걷는 열아홉의 영하에게도 바람이 분다. ‘영하’는 극중 인물의 이름이자 기온을 표시하는 단위이고, ‘바람’은 자연현상인 동시에 기분전환이라는 의미를 품은 메타포이고,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교회 예배에서 신에게 무언가를 기원하는 어머니와 영하의 모습으로 열리고, 휑한 거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는 영하를 끝으로 닫힌다. 의미의 다원성을 가지고 유희하는 제목처럼 인간의 말과 행위는 하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고, <영하의 바람>은 단일하게 고정되지 않는 스토리의 경계를 진동한다. 존재의 기반을 매섭게 휩쓸고 가버리는 바람, 상실감에 대한 이 이야기 안에는 애조 띈 이미지들이 많다. 특별히 신성함이 느껴질 만큼 초연해 보이는 영하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과묵한 영하가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는 동안 관객들은 캐릭터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그의 얼굴을 통해 짐작한다. 대사가 전달하는 감정을 모두 합친다 해도 무감하고 스스럼없는 영하의 얼굴을 이길 수 없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다양한 주제와 캐릭터들이 뛰놀기 때문에 비슷한 색깔을 가지면서도 그 정취가 제각각이다. 음식으로 비교하면 만두 같다. 밀가루 피는 다 비슷하지만 그 안에 고기, 김치, 두부, 야채, 새우 뭐 하여간 뭐든지 집어넣어 쪄버리면 만두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 내용물은 보지 않고 밀가루 피로 싼건 다 똑같다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장르 영화가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망한다. 가끔은 ‘한국형’이라는, 일단 붙으면 뭐든 후져보이게 만드는 수식어를 붙여서 등장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것도 대충 망한다. 아마 많이 안 만들어 봤으니 노하우도 적고, 노하우가 적으니 잘 만들어지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지기가 어려우니 관객들도 잘 안보고.. 의 악순환이 진행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독립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하고 경험을 가진 감독들이 상업 영화로 넘어가 규모와 재미를 확장시킨다면 아주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안 된다. 2000년대 초중반, 단군 이래 영화계에 돈이 가장 많이 몰렸다던 그때. 이런 시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감독들은 상업 영화로 넘어오면서 더는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종종 공포, 스릴러의 영화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왜인지 대체로 신인감독이 연출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결과물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 한국에서 장르 영화는 정말 안 되는 걸까? 이돈구 감독의 < 팡파레 >(2019)는 그래서 참 반가운 영화였다. 상업, 독립 영화를 통틀어 이런 유의 장르를 만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할로윈 밤. 제이( 임화영 )은 우연찮게 막 할로윈 파티가 끝나고 영업을 정리 중인 술집에 들어가게 된다. 데킬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있으니 2인조 형제 무장 강도가 들이닥쳐 제이는 인질이 된다. 그러다 동생 희태( 박종환 )은 우발적으로 가게 사장을 살해하게 되고, 양아치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과 달리 전과도 없고 무려 사이버 대학까지 나온 집안의 기둥, 희태를 지켜야하는 강태( 남연우 )는 이 일을 무마하려 평소 알고 지내던 깡패 쎈, 졸라 쎄서 쎈이라고 불리는 쎈( 이승원 ) 형을 부르게 된다. 현장에 도착한 쎈은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하기로 하고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무려 VIP 고객이란다.) 살인청부업자 백선생( 박세준 )을 또 부르게 된다.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이게 된 5명은 시체를 처리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한 후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린다. <팡파레>의 재미 정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를 좋아해서 맨날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삼촌이 유명하거나 볼 만한 영화는 이미 다 봤고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골랐는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고른 영화에 해당한다. 유명하지도, 어마어마한 뭔가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다만 한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섯 명이 서로 해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예산 독립 영화이니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깡패, 살인청부업자, 사이버 대학을 나온 집안의 기둥 등 뻔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묘하게 나사가 빠져있거나, 기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기는 재미가 있고 또 캐스팅이 상당히 잘 되어있어 연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맛도 좋다. 특히 쎈 역의 이승원과 백선생 역의 박세준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모습을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이돈구 감독은 데뷔작 < 가시꽃 >(2013)으로 주목받은 후 곧장 꽤 큰 규모의 차기작 < 현기증 >(2014)을 발표하며 여러 사회문제를 다소 강한 톤으로 그려왔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오로지 재미만 생각한 것 같은 <팡파레>를 내놓았다.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의 행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흥미롭다.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