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반란
- 감독
- 고바야시 마사키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도시로 미후네, 츠카사 요코, 카토 타케시, 에하라 타츠요시, 이치하라 에츠코, 야마가타 이사오, 나까다이 타쯔야, 코야마 시게루
1920년대 후반 일군의 조선인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그들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상해파 영화인이라고 명명될 정기탁 , 김일송(상하이 활동 당시 이름은 정일송), 이경손 , 전창근 등이 그들인데, 특히 그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기탁은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놀랍도록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8년 상하이의 주요 영화사 중 하나였던 대중화백합(大中華百合影片公司)에서 연출한 <애국혼 愛國魂>을 통해 성공적으로 상하이 영화계에 데뷔했으며(이 영화에는 김일송이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고 있으고 전창근 또한 출연 및 각본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해에만 < 삼웅탈미 三雄奪美>, < 화굴강도 火窟鋼刀>까지 세 편의 영화에 감독이자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1929년에는 대중화백합에서 만든 9편의 영화에 감독 겸 배우로 관여하였고, 대중화백합을 포함한 영화사들의 트러스트로 이루어진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가 제작한 영화 <출로 出路>(1933)를 감독했으며, 1934년에 마찬가지로 연화에서 완성한 완령옥 주연의 < 상해여 잘 있거라 ! 再會吧, 上海!>를 끝으로 상하이 영화계를 떠났다.(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상해여 잘 있거라!>는 영상자료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기탁은 1934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1937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국영화사 안에서 호명해오는 데에는 적잖은 난감함이 따라붙는 게 사실이다. 정기탁은 상하이 영화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의 <애국혼>부터 1934년의 <상해여 잘 있거라!>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은 이 영화들이 제작된 대중화백합이나 연화가 중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주류적 위치만큼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상해영화사의 전형적인 조류와 일치하고 있다. 즉, 1928-1929년의 그의 영화들은 1920년대 후반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형성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영화의 모색과 함께 하고 있으며, 이후 연화에서 완성한 두 편의 영화 <출로>와 <상해여 잘 있거라>는 1930년대 좌익 멜로드라마들을 통해 ‘중국영화의 첫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 영화사의 전형적인 영화 패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실천들은 중국영화사의 한 장 속에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내셔널 시네마적 귀속이란, 그 네이션의 성립의 전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얼마나 사후적인 것인가? 월경자들의 실천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형성되는 사후적 담론 내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후적 귀속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실천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시간대 안에서 사유해본다면 어떨까?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출연작까지 포함하여 무려 12편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1928-29년, 상하이라는 시공간은 특별히 흥미롭다. 1919년 9월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된 장소, 3.1운동과 5.4운동 이후 반제의 기치 아래 한중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미만했었던 시간. 나아가 열강들의 조계지이자 1차대전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과 무역의 거점지로서 1925년의 5.30 운동에서 시작된 반제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장소, 1927년 국민당의 우경화와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이 ‘혁명’이 폭력적으로 좌절된 시간. 또한 1928년은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문화적 자원으로 기능할 어떤 장르영화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불타는 홍련사 火燒紅蓮寺>(명성영화사)의 성공으로 불붙은 무협영화 붐은 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으며, 관객들은 홀린듯 이 새로운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운동과 시각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붐이 피크에 달한 1929년 한해에만 85편이 제작된 무협영화는 1928년에서 1931년 사이 무려 250여 편이 만들어졌다. 이 조류의 한복판을 통과해갔던 동시대인의 증언처럼 말 그대로 ‘미친 물결(狂濤)’가 같았던 이 흐름에서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었으나 정기탁이 몸담고 있던 대중화백합역시 여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영화사였다. 1928년에서 29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30편의 영화 중 거의 절반이 무협영화였으며, 같은 기간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감독 혹은 배우로서 관여했던 11편의 영화 중 다수가 이 장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영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던 자들은 상하이와 남양 일대의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들, ‘농공(農工) 군중’이라고 불려졌던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이제 막 형성된 대규모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지역 최초의 액션영화였다. 1920년대 후반의 상하이, ‘농공 군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모은 최초의 액션영화 장르로서의 무협영화, 이 장르와 연계되어 있는 조선인 망명자의 영화적 실천. 다시 한번 언급컨대, 이 점들을 잇는 첫 장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애국혼>이다. 상하이 영화계에서의 정기탁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능하게 한 이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협영화 장르가 이 지역 일대에서, 나아가 화교 문화권과 상관없는 장소(이를테면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과 같은 지역을 상기해보자)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순간은 어떤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원형이 당도한 기원의 시간이라고 할만하다. 그 첫머리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행위에 집중한 안중근 서사가 동시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의 강조로부터 무로의 이동이 20세기 초 이 지역에서 사유되었던 근대적 국가 성립에의 열정과 이를 떠받치는 근대적 신체의 문제와 관련있다면(근대국가라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상무(尙武)’) ‘법을 범하는 무’로서의 협은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상상되었던 아나키한 힘에의 열정과 관련있다. 동시에 수중의 폭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자, 협객은 <애국혼>에서 국가 간 교전이라는 주권적 행위를 수행하는 자와 겹쳐진다. 먼저 안중근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에서 안중근은 1909년의 그의 거사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찍이 량치차오가 이 거사 직후 쓰여진 「추풍단등곡 秋風斷藤曲」(1909)에서 그를 형가와 예양에 비견한 이래, 그에 관한 시문과 평전이 꾸준히 등장했으며 1919년 5.4운동 시기에 안중근 의거를 소재로 다룬 극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중국 각지의 학생연합회에서 빈번히 상연되었던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안중근의 서사는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항일 선전대에서도 중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이 이름이 지닌 반제 항일의 아이콘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의 그의 첫 번째 영화 프로젝트로 안중근 스토리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정기탁의 이 상하이에서의 첫 영화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만했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으며, 의기 충만한 격앙감”이 있는 “고상한 스토리”로 소개된 <애국혼>은 근래 ‘국산영화’ 중 사상적으로 가장 충만한 영화(《申报》 1928.11.11.)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공개 당시 쓰여진 동명의 영희(影戲)소설 碧梧, 《爱國魂》(《電影月報》1928年 第7期). 이 자료는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을 통해 면모를 확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위국(魏國)의 정치가 등박문(縢溥文)은 여국(黎國)의 간신 여용(黎庸)을 매수하여 이 나라를 침탈하고자 한다. 어느날 이들의 음모를 알게 된 샤딩춘(夏鼎醇)이 안영진(晏永鎭)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영진은 등박문을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폭탄을 던지나 실패하고 등박문의 수하에 의해 횃불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한다. 한편 영진의 아들 안중권(晏仲權)은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위국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치던 중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다. 몰래 상하이로 건너간 중권은 그곳에서 ‘중국인 혁명가’ 주한룽(朱漢龍)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한룽의 누이동생 아이란(愛蘭)과 사랑에 빠진다. 중권과 한룽은 서울로 잠입하여 거사를 치루려고 하나, 호텔에서 등박문을 향해 겨눈 중권의 총구는 빗나가고 만다. 중권과 한룽, 샤딩춘과 박재명은 다시 등박문의 암살계획을 세우지만, 여관 하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위국 병사들에 의해 중권은 체포되고 샤딩춘은 죽음을 맞는다. 하인의 회개로 힘을 합쳐 중권을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한룽과 박재명. 그 와중에 하인은 죽지만 중권은 무사히 탈출한다. 중권, 한룽, 박재명은 두만강을 건너 장일성(張一成)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여기에 중권의 동생 옥실 또한 합류한다. 뒤따라온 위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장일성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중권에게 부탁한다. 남은 자들은 홍콩으로 떠나 류동샤(劉冬夏)의 집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와중에 옥실과 한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중권을 그리워하던 아이란은 그리움으로 병들어 죽는다. 두만강 근처의 의용군에 합류한 중권, 한룽, 재명, 옥실. 어느날 적의 상황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룽과 재명이 위군 병사에게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재명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으로 목숨을 잃고, 고문으로 양쪽 눈을 잃은 한룽은 중권에 의해 구출된다. 류동샤로부터 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중권은 한룽에게 옥실을 부탁하고, 홀몸으로 하얼빈으로 떠난다. 드디어 등박문의 저격은 성공하고, 체포된 중권은 늠름한 모습으로 사형당한다. 등박문(縢溥文), 여용(黎庸), 안중권(晏仲權) 등 한자음의 종족성을 통해 희자(戲字)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고유명사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이야기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가능했던, 피식민지인과 반(半)식민지인이 항일과 구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가장 강렬한 상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혁명가와 중국 혁명가는 거듭되는 전투와 체포, 탈출, 다시 전투를 통해 피를 나누고, 급기야 한국 혁명가가 중국 혁명가에게 자신의 동생을 부탁할 때 실제로 ‘형제’가 된다. <애국혼>은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일단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와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정기탁은 안중근 스토리를 제재로 삼았지만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이야기를 오직 암살 시도, 실패, 탈출, 추적, 전투로 이루어진 활극영화로서 다루었다. 이 이야기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시작되는 저 순간이 어떤 전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혼>은 명백히 한국영화의 기원적 장면이라고 할만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 순간 정기탁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명 1927년 조선영화 최대의 히트작 < 아리랑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애국혼>은 마치 <아리랑> 이후, 혹은 <아리랑>의 저 출구 없는 결말 너머를 상상하는 소망처럼 보인다. <아리랑>의 영진처럼 <애국혼>의 중권 역시 여동생을 폭행하려는 자를 때려죽인다. 그러나 영진이 일본 순사에게 묶여 고개를 넘어가며 그저 아리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본 ‘군인’을 때려죽인 중권은 국경을 넘어 상하이로 건너간다. <애국혼>이 반복하고 있는 <아리랑>의 이 장면은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인가? 이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이다. 먼저 ‘그’는 자신의 수중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낫을 들어 죽인다) 둘째, 그러나 그 폭력이 발현되는 순간 그는 법에 포박당한다.(순사에게 잡혀간다) 셋째, 이 법은 당연한 말이지만 식민지 권력이 이곳에 강제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내부가 아닌 상하이라는 외부의 장소로 탈주한 <애국혼>은 바로 이 장면을 반복하면서 사적 폭력을 공적 폭력으로 옮겨온다. 즉 결투는 이제 전투로 옮겨갈 것이다. 식민과 수난의 땅으로서의 조선과 주권과 주권의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로의 중국 혹은 상하이. 동시에 <애국혼>의 시작 지점이 구축해놓은 등박문을 죽이려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 안영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이것은 안중근의 전기적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은 등박문 암살이라는 중권의 행위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인 원념과 나라를 구한다는 공적인 가치를 일체화시키는(게다가 이 아버지 스스로가 ‘구국’을 위해 일어섰다가 죽임을 당한 자임을 상기해보라) 한편 이 영화를 동시기의 유행장르, 무협영화의 장르적 특성으로 밀어넣는다. 무협 장르의 내러티브적 핵심은 젊은 남자(혹은 여자)가 행하는 복수에 있다. 그 혹은 그녀는 스승, 아버지,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복수는 행위의 근본적 추동 요인이다. 그런데 복수는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종종 이들은 충과 효라는 이 세계의 ‘보편적’ 윤리를 끌어들이지만) 개인의 개인에 대한 응징, 사적 폭력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혼>은 항일과 구국이라는 대의를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 원념과 일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 흥행 장르의 규약을 공유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로부터 영감 정도를 받아 자유로운 각색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중권이 의용군에 합류한 이후 등박문의 암살에 성공한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설정을 고수하고 있는 지점은 새삼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설정은 중권의 행위가 도당적 행위가 아닌 군사적 행위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다는 이 영화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이 순간 군사영화, 다시 말해 전쟁영화이다. <애국혼>은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는 아들이라는 무협영화와 구국의 항전이라는 전쟁영화를 겹쳐놓음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의 경험 위에서 형성된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하나의 원형적 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무협영화의 컨벤션과 전쟁영화를 뒤섞고 있는 <애국혼>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애국혼>은 안중근이라는 실제 인물의 표상, 반제와 항일이라는 반(半)식민지 중국과 식민지 한국의 공통적 이념 하에 협과 의리에 기반한 복수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그럼으로 이 반제 ‘액션영화’에는 무림 혹은 강호라는 판타지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근대 국제 정치의 교전/전쟁의 문제와 혁명 혹은 반란의 상상인 ‘협’의 문제가 교직된 <애국혼>은 소위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대표 장르로서의 ‘무협영화’를 통해 3.1운동과 5.4 운동 후의 한중연대의 정치적 움직임과 계급투쟁으로서의 5.30 운동과 동아시아적 액션이라는 문화적 과제가 어떻게 교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국혼>이 절반쯤 기대고 있던 무협영화는 1931년 이후 적어도 상하이의 주류 영화 산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를 비롯해 전국적 규모로 이 장르의 제작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후 중국 본토에서 거의 상영될 수 없었던 무협영화의 제2차 붐이라고 할만한 것은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정확히 첫번째의 붐을 이끌고 목격했던 자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1920년대 말 무협영화붐의 중요 에이전시였던 천일(天一)영화사의 후신인 쇼브라더스는 1965년 <강호기협 江湖奇俠>(서증굉)을 시작으로 ‘무협신세기’를 선언하며 이 장르를 ‘모던’하게 환골탈태시키고자 하였다. 쇼브라더스의 기획은 호금전의 <대취협 大醉俠>(1966)과 홍콩 영화 최초의 백만달러(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 장철의 <독비도 獨臂刀>(1967)로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영화들은 이제 남한으로 구획된 대한민국의 영화시장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최초의 무협영화가 되었으며, 이후 이곳의 남성 하위문화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중문화의 자원으로 기입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바로 이 기입의 순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협(俠)과 액션,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역사적 기원 - 정기탁의 〈애국혼〉과 상하이 무협영화」(홍지영 공저)를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시작은 올해 2월 열렸던 베를린국제영화제,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대부분의 영화제와 상영회가 온라인 상영과 개최라는 대안적 방식을 선택하기 전, 정상적인 형태로 개최된 마지막 국제영화제였던 베를린영화제에서 소다 카즈히로 감독을 만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공개된 < 멘탈 >과 이어지는 <정신: 제로>라는 신작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소다 감독과는 2018년 중국에서 잠시 만난 이후 재회한 셈이었는데, 정치 이야기, 미국생활 이야기, 작업이야기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신: 제로>가 소다 감독의 10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떨어지는 숫자나 년도를 기념하거나 그걸 계기로 행사를 도모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떨어지는 숫자에 맞춰 무엇인가를 하는 게, 명분이나 근거를 설명하기에 여러모로 용이하다는 현실적이라는 그간의 경험에 기반해, 자연스럽게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무엇이든 같이 해보자, 라는 제안을 즉석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전후로, 하라 가즈오 감독의 2019년 영화 < 레이와 시대의 반란 >을 보면서 소다 가즈히로의 전작 < 선거 >와 연결하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이후 모리 타츠야 감독의 <나는 신문기자다>를 본 후로는 ‘선거’와 ‘언론’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사회를 조망하는 기획을 해볼 수 있겠구나, 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봄이 지나면서, 민환기 감독이 작업해오던 제주도지사 선거전에 뛰어든 녹색당 고은영 후보를 따라가는 < 청춘 선거 >가 마무리단계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선거’라는 소재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쟁쟁한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과 일본사회가 공히 처해 있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함께 논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미리 그려보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올해 일어날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은 모두 강고한 체제로 굳어진 기존 정당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는 소수정당이나 보통 사람들의 무모한(?) 도전과정을 기록한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하라 가즈오 감독의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2019년 7월에 열린 일본 참의원 선거에 10명의 후보를 낸 신생정당 ‘레이와 신센구미’와 그들의 선거 도전기를 따라가는 영화다. 레이와 신센구미는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으로 주목을 받으며 한국에도 꽤 알려진 ‘거리의 정치인’ 야마모토 타로가 주도하는 신생정당으로, 진보적인 경제정책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반대와 원전 중단 등 일본사회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급진적 정책들을 내세우는 정당이다.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주인공은 야마모토 토로가 아니다. 물론 그가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하라 가즈오 감독이 집중하는 주인공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다. 도쿄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경제학자이자 2014년 커밍아웃한 트렌스젠더이자 ‘여장남자교수’로 유명한 야스토미 아유미가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건 2018년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시장선거에 출마하면서이다. 당시 말을 타고 유세를 벌이던 파격적인 모습과 이상적이면서 비현실적인 공약들로 화제를 모았던 그에게 야스모토 타로가 2019년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 출마를 제안하면서 그를 다시 선거판으로 불러들인 것. 2018년 당시 야스모토 아유미에게 흥미를 가졌던 하라 가즈오 감독은 유튜브 채널에서 그녀와 인터뷰를 하며 다음에도 선거에 출마하면, 관련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농담처럼 약속을 하는데, 그 약속을 기억한 야스모토 아유미 교수가 하라 감독에게 연락해온 것이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라 가즈오 감독은 사건과 인물을 집요하게, 오랫동안 촬영하며 기록한다. 대상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대상과 소통하면서, 최대한 가감 없이 그들의 말과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그런 점에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하라 가즈오 감독의 작품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영화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특이한 지점들을 동시에 지닌 영화다. 다작 감독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침묵하던 하라 감독은 2017년 <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으로 귀환한 이후 거의 매년 작품을 공개하고 여러 편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라 감독만의 작업방식은 8년이 넘게 촬영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도 그리고 올해 공개된 또 다른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미나마타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을 다룬 <미나마타 만다라>는 15년을 촬영했고 편집에만 5년이 걸려 6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완성된 그의 역작 중의 하나다.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완성까지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2019년 6월, 메일을 통해 야스모토 아유미 교수에게 연락을 받았고, 6월 26일 처음 만나 제작을 결정했고, 그리고 기자회견부터 이후 16일간의 선거운동 기간까지, 대략 3주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제작기간을 비교하자면 전작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초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감독의 언급이 있다. 그건 오락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인터뷰나 마스터 클래스 같은 강연에서도 감독은 관객이 흥미를 느낄 장면이나 요소들을 넣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라고 종종 언급하고 있는데,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감독의 작업 중에서 가장 재치 있고 오락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그건 아무래도 선거라는 제도가 지닌 연극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압권은 목장에서 키우던 말을 도심에 데려와 선거유세에 활용하는 장면들. ‘Protect our children, heal the world’를 공약으로 외치는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는 이번에도 말을 이용한 선거유세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도심에 나타난 말의 이질적인 이미지만큼 그의 선거유세는 우리에게 기이하게 다가온다. 오락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담당하는 캐릭터는 아무래도 주인공인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이지만, 영화는 레이와 신센구미 비례대표로 출마한 다른 후보들에게도 고른 관심을 보여준다. 비례대표 중에서도 우선 순위를 받은 두 명의 중증 장애인 후보, 환경운동가 출신의 후보, 싱글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는 여성후보, 일본창가학회가 모태인 공명당이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하면서 보수화되자, 그에 반발하는 창가학회 멤버이자 오키나와 출신의 후보, 편의점 세븐 일레븐 점주로 대기업 횡포에 맞서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후보 등이 등장해 자신들의 공약과 주장들을 당당하게 밝힌다. 선거는 말의 성찬이다. 다양한 주장과 선언들이 분출하는 열린 공간.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같은 무게를 갖지 못하고,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며, 그래서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 그건 선거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일상에서도 권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의 목소리는 늘 왜곡되고 감춰진다. 그건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의 주민들도 <미나마타 만다라>의 환자들과 가족들도 겪고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왜곡되고 소외되어 온 그들의 이야기. 그래서 하라 감독은 그들의 곁에서 오랫동안 기록하며 그들의 진심이,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말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레이와 시대의 반란>도 감독의 세계관과 닿아 있다. 주류 언론에서 배제된 소수정당 후보들의 주장과 진심들. 정치는 사람을 잇는 수단이지 소통을 가로막는 장치가 아니다, 라는 믿음. 그래서 감독은 10명의 후보들이 쏟아내는 말과 증폭되는 감정들을 가까이서 끈기 있게 담아낸다.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 시민들을 좀비처럼 만들어버린 사회에 대한 저항이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스릴러’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는 발상. 그래서 좀비들이 등장하는 플래시몹을 기획해 유세현장에서 진행하지만, 막상 영화에는 저작권 문제로 그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기괴한 사운드효과를 배경으로 깔고 자막과 함께 영상만 내보는 장면은, 하라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백미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진지한 연설을 하는 와중에, 술 취한 아저씨가 등장해 어슬렁거리자, 후보보다 취객에 더 흥미를 느끼고 카메라에 담으려 하는 장면도, 감독의 여유와 코미디적 감각이 건재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료화면과 유튜브 영상을 활용하고, 재치 있는 자막처리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을 내딛는 소수정당의 의미 있는 시작을 함께 한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돋보이는 건, 여전한 감각과 시대정신을 지닌 하라 가즈오 감독의 태도와 그의 영화세계이다.
[사진] <성벽의 뚫고>(한형모, 1949)에 출연한 이집길 이집길(李集吉)은 한림, 최은희와 간발의 차이로 1947년 <그들이 가는 길>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무성영화시대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마부와 건축기사로 나왔던 단역배우 임운학이 처음 만든 감독 진출작이었다. 세트장치 없이 뚝섬 근처의 절에서 야외 촬영한 이 16밀리 영화는 부친(정민)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친구의 아들을 데려다 길러 평양감사가 되도록 만들었으나 키운 보람도 없이 외면당하자 암행어사가 된 그의 아들(임운학)이 배은망덕한 평양감사를 응징한다는 얘기다.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 이 이조(李朝) 야사의 악역인 평양감사에 이집길이 발탁된 것이다. 엑스트라가 모자라 경동중학 연극부 학생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임운학 「예(藝)에 살다(16) 영화배우 55년」 일간스포츠, 1979.8.11)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한림과 마찬가지로, 일본국제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해외 유학파인 이집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이듬해 이만흥 감독의 <끊어진 항로>(1948)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범으로 변신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직장인인 친구(이강천)는 바르게 살자고 설득하지만 이집길은 정부(유계선)와 공모하여 밀수품을 실어놓은 배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끈질긴 친구의 노력으로 생각을 바꿔 당국에 자수한다. 그의 친구 역할과 함께 미술을 담당한 이강천은 5년 후 <아리랑>으로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이집길은 1년 후 <자유만세>를 찍은 촬영기사 한형모의 감독 데뷔작 <성벽을 뚫고>(1949)의 출연을 계기로 연기에 열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는 길>이나 <끊어진 항로>가 16밀리 무성영화인데다 반응이 좋지 않았던 반면 이 영화는 이미 검증 받은 한 감독의 35밀리 영화였기 때문이다. 1948년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에 의해 촉발된 제주 4,3사건과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공산주의 배격의 흐름은 결국 <성벽을 뚫고>와 같은 반공영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산주의자인 매부(권영팔)는 육군 소위인 처남(이집길)을 매수하려 하고 또 처남은 처남대로 매부를 설득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영화에 이어 그는 이만흥 감독의 <애정산맥>, <청춘>(이상 1953), <탁류>(1954) 등 3편과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4), <열애>(1955) 등 2편에 출연하여 편수는 많지 않으나 꾸준히 배우의 길을 걸었다. <애정산맥>은 전투 경찰과 공비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친구의 이야기로 <성벽을 뚫고>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다만 그들 사이에 마을 처녀와의 삼각관계가 설정되고 그의 배역이 육군 장교에서 전투경찰관으로 바뀌었을 정도의 차이다. <청춘>에서는 음악교사인 여선생을 둘러싸고 영어교사(황남)와 사랑싸움을 벌이는 체육교사로, <탁류>에서는 공비들에게 공급할 무기를 들여오려던 간첩단을 일망타진케 하는 방첩대원으로, <출국명령>에서는 적탄에 맞아 떨어진 라이벌인 조종사(전택이)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해내는 공군 조종사로 등장한다. <출격명령>(홍성기, 1954)에 출연한 이집길, 왼쪽은 배우 전택이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열애>에서는 나병을 앓으면서도 한 여인(염매리)을 포기하지 못했던 화가 박혁의 불우한 삶을 온몸을 사르다시피 연기했다. 그는 간장염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의 아버지 박혁 목사 역을 맡은 나운규 시대의 배우 이금룡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그 역시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술에 젖은 말년의 삶 이집길은 1923년 서울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고향이 전라북도 군산이라는 말도 있다.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제국음악학교 성악과를 다니다가 일본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데뷔 당시에는 ‘교양을 갖춘 침착하고도 겸양한 인품, 근대인으로서의 지성과 샤프한 신경, 무엇보다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굴곡 있는 입체적인 선 등이 조화된 한국영화계의 호프’로 기대를 모았다 .(한국일보, 「금주의 스타, 이집길」 1954, 11,29) 그러나 그는 배우로서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단점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연기에 임했고 구두 뒤축을 두 개나 달고 다닐 정도로 키에 신경을 썼다. 말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젖어 지내다시피 했다. 이즈음 시골에 있던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상경하여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열애>를 유작으로 11월 11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한창 활동할 나이인 32세였다. 원인은 간장염이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아내의 손을 잡고 과거의 무절제한 생활과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고 한다 .(한재수, 「배우로 본 한국영화 광복 50년」 『월간 영화』 1975년 3월호. 78쪽) 유작이 된 <열애>(홍성기, 1955)의 한 장면(아래쪽이 이집길) 뒷날 감독이 된 영화평론가 유두연은 그의 죽음에 대해 “영화인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겨우 장만한 소나무판 관을 메고 가서 해골 같이 말라버린 시체를 끌어안고 ‘영원의 출연’을 위한 메이크업을 시켜주고 있는 뼈 저리는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 붓을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추도문을 마무리했다. -그 몸뚱이와 넋을 원통 필름에 발라버렸다. 그가 생전에 출연했던 영화를 더듬어 보면 그 얼마나 대중들의 마음이 그가 움직이는 그림자 속에 뭉쳐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성벽을 뚫고>에서의 이집길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정신의 심벌이었다. 지리산 암벽에서 공비로 화한 친우와 대결하는 국군 소위의 검은 눈동자는 우정도 감상도 범할 수 없는 정의에 번쩍이고 있었다. <출격명령>의 항공 대위는 그 두꺼운 가슴팍에 자유를 갈구하는 민족의 마음을 안고 적진에 포탄을 퍼붓다가 드디어 산화하고 말았다. <열애>의 이집길은 파멸하여가는 육신을 이끌고 인간성의 존엄을 긍정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생을 찾는 문둥병 환자였다. 모두가 다 절실한 환경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 얼마나 성실하게 대중들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렇던 이집길도 가버렸다. - 「젊은 배우의 죽음 , 곡(哭) 이집길의 사(死)」 조선일보, 195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