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심
- 감독
- 원정수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개 기억들은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순간의 감각들로 남겨진다. 가령 유년 시절의 계곡을 떠올릴 때면 언제, 누구와 왜 갔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졌던 순간 느꼈던 알싸한 코끝의 감각과 함께 어디선가 습한 풀냄새가 흘러오는 것이다. 혀에 닿았던 철봉의 비린 쇠 맛, 몸에 들러붙는 젖은 옷의 찜찜함,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 아릿한 손끝... 그렇게 지나간 순간들은 몸 어딘가에 고이게 된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기억은 과연 남겨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감각되지 않는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남겨진다. 결국 오래도록 나에게 맴도는 영화들은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전체 몸뚱이, 그로부터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들이다.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 < 로나의 침묵 >(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2008)을 본 날은 21살의 겨울이었다. 나는 지독한 시네필이었다거나 내 삶을 뒤흔든 영화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없이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영화과 학부생이었다. 학기 중 내가 본 영화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학을 맞이하여 전투적으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그저 방학 동안 최대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곱씹을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바로 다음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는 쉽사리 다음 영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클로디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던 로나는 파블로의 감시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이윽고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간다. 어둡고 싸늘한 오두막에 주워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 로나는 자신의 빈 배를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클로디의 아기를 향해 말을 걸며 잠에 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 또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을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 허하고 서글픈 뱃속의 감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클로디가 도와달라고 외치며 로나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클로디를 휘감았을 고독과 두려움의 통증, 자전거를 사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순간 마약으로 인해 마비되었거나 혹은 너무 날카로워졌던 클로디의 몸이 생의 활력으로 일깨워지는 감각. 이렇게 <로나의 침묵>의 장면들은 나에게 컷과 이미지가 아닌 몸 어딘가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사진: " Lorna's Silence ", Rotten Tomatoes 이러한 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영화가 더 깊게 관객에게 남겨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면 당연히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고심하지만 각 씬이 품고 있는 기운 혹은 인물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된다. 늦은 밤 어린 소녀가 부모의 싸우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때 그녀가 딛고 서 있던 타일의 싸늘함, 발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 비밀을 품고 마주한 두 여고생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불의 열기. 영원히 진실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만 같던 모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녹은 아이스크림의 단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때로는 정말 실제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인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손끝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혀에, 피부에, 코끝에 남겨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컨테이너 >(김세인, 2018), < 불놀이 >(김세인, 2018) 중 <로나의 침묵>이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로나가 연속적인 변심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클로디의 청을 외면하던 로나는 점차 클로디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내 몸으로 보듬어 주기까지 한다. 거래 현장에서 갑작스레 아기에 대한 질문을 꺼내놓고 심지어 아기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끝내 부정하며 끊임없이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변심과 충동에 따른 행동들로 인해 로나는 사랑하던 애인과 이별하고 가게도 돈도 모두 잃게 된다. 급기야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초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던 로나는 실속 없이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빈 배뿐이다.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또한 줄곧 변심과 충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냉철하고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겐 그건 영영 오지 않을 세계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닥쳐오는 상황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일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는 건 모르겠고, 그중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언제까지 나 자신에게 당황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던 애인과 돈 계산을 한 뒤 이별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이외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로나의 답답한 눈물이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저 빈 배를 움켜쥘 수밖에. 그리고 믿어볼 수밖에. 내 연민과 사랑이 불러온 결과가 결코 빈 배가 아니라고. 이 배는 비어있지 않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로나처럼 믿고 싶어서였다. 연민과 사랑으로 다소 유약하게 굴었던 나에게 남은 건 빈 배가 아니다. 여기 이 배 속에 무언가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중 김세인(영화감독) l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등 연출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서영춘의 코미디와 검열의 관계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 글이다. 서영춘의 코미디에 집중해서 검열 서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악극이나 쇼 무대의 활동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저속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영춘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저속 코메디언”으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최고의 체크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1) 말하자면 서영춘의 코미디는 ‘저속함’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의 통속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검열은 코미디에서의 ‘저속’과 ‘건전’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서영춘의 영화 출세작이었던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왔으며 공보부의 검열 강화 기조에 일조했던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검열의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성적인 표현과 동성애 코드를 둘러싸고 검열에 재검열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영화검열의 기조와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과 ‘통속’ 코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코미디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악극단의 인기 배우들이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코미디영화들도 이 시기에 다양한 하위 장르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악극단과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코미디 배우들은 영화에서 자신들의 장기와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 코미디영화의 활황을 이끌었는데, 가장 먼저 스크린을 점령했던 것은 양석천과 양훈, 홀쭉이와 뚱뚱이 듀오였다. 뒤를 이어 등장했던 구봉서와 김희갑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서영춘은 다소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악극단과 라디오, 쇼 무대를 거쳐 1960년대 스크린 코미디의 총아가 되었다. 서영춘(1928~1986)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서영은의 동생으로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52년 악극단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백금녀를 만나 뚱뚱이-홀쭉이 콤비를 이루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반 라디오 코미디의 전성기에 동양라디오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쇼의 사회자이자 백금녀와 함께 하는 만담의 출연자로 등장하면서 서영춘은 “여보 마누라 가갈갈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뿜빠라뿜빠 뿜빠빠”, “살살이, 요건 몰랐지?” 등등의 유행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로 시작되는 일종의 만요와 “시골영감 기차놀이”의 리메이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다. 서영춘의 영화 데뷔작은 1961년 <인생갑을병>(박성복)으로 여기서 그는 엑스트라 급 조연을 맡았으나, 1964년 <총각김치>(장일호),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서영춘은 이 영화의 흥행을 시작으로 라디오와 TV, 스크린,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자가 더 좋아>는 서영춘을 스타 배우로 만든 영화일 뿐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여장남자코미디의 시초이자 이 시기 코미디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 즉 코미디언코미디의 활황을 선도한 영화였다. 여장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검열에서는 거의 지적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흥행을 통해 재평가된 지점이 존재했다. 한편, <오대복덕방>은 서영춘이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는 영화여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서영춘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온 영화였고 공보부의 검열강화 기조에 일조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자가 더 좋아>를 살펴보자. 코미디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였던 <여자가 더 좋아>는 오랫동안 유실된 필름이었다. 다행히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한우섭-한규호 父子 컬렉션’이 기증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2016년 5월 31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초로 일반 상영되었는데, 후반부 20여 분의 싱크가 맞지 않고 마지막 씬이 유실된 불완전판으로 공개되었다.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시나리오, 검열 서류 및 각종 기사들과 스틸 사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흡사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남녀가 뒤바뀐 설정의 코미디 버전처럼 보인다. 여자직업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일하던 규철(서영춘)은 동거하고 있던 애인 영숙(최지희)이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하자 여장을 하고 그 집의 식모로 들어가 복수하고자 한다. 영숙이 규철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규철은 변심한 애인을 벌하고자 규화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하고 영숙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시아버지(김희갑)의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식모란 식모는 모조리”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던 이 집에서 애교스럽고 일 잘하는 규화는 시아버지의 총애(를 가장한 성추행)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규철은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영숙의 남편 박문기(남궁원)에게도 호감을 사며 문기의 동료이자 악극단의 지휘자인 선우광(양훈)으로부터는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게 된 규철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질주한다. 현재는 유실되었으나 시나리오 및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엔딩 씬은 질주하던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여성이 되어 병원을 나선 규철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파격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여자가 더 좋아>는 그럼에도, 검열에서 큰 지적 사항 없이 영화화되었다. 시나리오 심사의견서는 이 영화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자 같은 남자’ 콘셉트를 베꼈다고 지적하면서 코미디에 필요한 “건전한 웃음” 없이 “난잡”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오로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비예술적 태도를 지양할 것을 주문했다. (그림 1) 공보자문위원회 영화분과위원회, 「“여자가 더 좋아” 씨나리오審査意見書」, 1965.4.22. <여자가 더 좋아>의 시나리오 검토는 제작자에게 “건전한 웃음”과 ‘코미디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다소 추상적이고 훈계적인 내용의 ‘의견서’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건전한 코미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보부에서 ‘눈깔’ 등의 대사를 시정하라는 것, 선우광과 규철의 밀회 장면을 ‘주의 깊게 취급’해달라는 것 등 5개의 가벼운 지적 사항과 함께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그림 2) 공보국 영화과,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 1965.5.31. 그리고 실사 검열에서는 위의 밀회 장면을 단축하라는 단 한 가지 지적을 받고 상영이 허가되었다. (그림 3) 공보국 영화과,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 1965.6.19. 상대적으로 ‘반공법’ 위반에 주목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영화검열은 아직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만화조 넌센스의 소극” 2) 에 불과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평단에서 의외로 영화가 장기 흥행 하며 관객 몰이에 성공하자 이 영화가 일종의 사회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속’함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의 장기 흥행을 보도하면서 한 기사는, 남자였을 때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여장을 하고 난 뒤에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성전환을 택한 “서영춘의 페이소스”와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비평을 실었다. 3) 같은 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주책바가지>(심우섭, 1965)를 혹평하면서, <주책바가지>에는 <여자가 더 좋아>의 “페이소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 기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편, <여자가 더 좋아>가 제작되었던 1965년 이후,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코미디영화 검열 역시 강도가 높아졌다. 1967년 말에 제작하여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후 필름검열을 모두 통과하고 1968년 2월 개봉 중이었던 <오대복덕방>을 공보부가 재검열하겠다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검열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와 기사, 스틸 사진 등으로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복덕방>은 김해 김씨 일가 5대의 이야기로, 영화는 90세의 1대 용태 할아범이 서울에 와서 복덕방을 차려 성공하자 자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전라도 무주에서 상경한 일가족이 한 동네에서 각자 복덕방을 차리면서 각종 해프닝을 벌인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추정하건대, 서영춘은 3대 김영근으로 등장하여 결혼 사기를 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던 5대 일가족은 사기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개심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 가족의 ‘저속한’ 행태와 말투로 인해 전라도 지역 영사기사들이 영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전북극장협회에서도 영화 상영을 거절했다. 검열 서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전라북도 내 영사기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는 기사와 전북극장협회의 상영 거절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5)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종친회 및 전라북도 도지사의 상영정지요청도 이어졌다. (그림 4)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영화상연중지요청」, 1968.2.5. (그림 5) 전라북도지사,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 1968.2.9.) 김해김씨 종친회의 민원은 <오대복덕방>이 “우리종친인 김해김씨의 명예를 형언할 수 없을 만치 훼손한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종친사회를 근본적으로 모욕한 것”이므로 즉각 상연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의 이름으로 발송된 건의서에는 이 영화가 “오락적 경지를 벗어나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하고 나아가서는 혈연의식과 지역적 파벌을 조장하는 결과를 자아내”어 “전북도민으로 하여금 격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게 하고 신문, 방송 등 이 고장 언론기관이 선두에서 이를 규탄하는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동시에 본도 전도민이 항의에 기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략)... 국민적 단합과 정신무장 면에 구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이 영화를 즉각 상영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서류에는 전북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사들도 첨부되어 있어 이 영화를 둘러싼 전북 지역의 여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에서 이 영화는 “건전하며 코믹한 오락작품이면서도 과욕과 허실된 생활을 다분히 경고적으로 풍자한 작의가 좋”다며 “극히 명쾌하고 코믹하면서도 ...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선악을 도시 생활상의 일단면에서 풍자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저속한 대사나 장면 묘사에 주의하여 제작”하라는 주의 속에서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했고, 필름 검열에서도 판잣집을 서울의 명물이라고 보여주는 장면, 화장실 씬 등 세 장면을 삭제하고 대사 한 줄 정도를 삭제하라는 수정사항을 지적한 뒤 합격증을 배부했던 것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각본심의위원회,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 1967.12.14. (그림 7) 공보부,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 1968.1.26.) 검열의 호평 속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시작되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각종 투서와 건의서가 공보부에 답지했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영화의 제작자였던 주식회사 대한연합영화사의 대표이사 홍의선은 재검열과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홍의선은 상영허가검열에 합격하여 이미 상영을 시작한 지 열흘이나 경과된 시점에서 프린트를 회수, 재편집하는 것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공보부의 “영화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여 검열해 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홍의선은 이 영화가 “정극과는 그 영역이 판이한 희극영화”로 사투리는 “코믹한 텃취로 극을 희화화해보려는 시도”일 뿐이고 전주김씨 17대손 운운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로 표현한 데 불과”하며 “예의 17대손은 4,500년 전에 존재한 인물로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재 후손들에게 불명예스럽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림 8)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 1968.2.6.) 결국 공보부에서는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영화의 재검열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 1일부터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신고시 첨부되는 각본에 대하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각본을 검토하도록 했는데, 각본심의위원회는 영화법 저촉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영화계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한 단체였다. 각본심의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하고 나면 제작이 시작되고, 제작이 완료된 필름은 실사심의를 거치는 이중의 검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 제도는 1967년 12월 1일 공보부에 6인으로 구성된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설치되면서 3중의 제도로 변경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대복덕방> 상영 분쟁이 생긴 뒤 소집되었던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와 동일한 심의기구로 추정할 수 있다. 1968년 2월 7일 공보부가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재심을 한 결과 “사회적 물의와 진정의 대상이 되는 저속한 부분은 추가 제한 조처함이 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일단 상영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제한 조치로 30여 곳을 삭제, 단축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에는 “종친을 특정하는 대사, 화면 및 저속한 대사, 화면을 추가 삭제 조치”했음을 알리는 공문을, 전라북도지사 공보실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대사삭제 29개처, 화면삭제 15개처, 화면 단축 2개처”를 제한조치하여 상영하도록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림 9)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 날짜 미상(2.7-2.9일 사이로 추정) (그림10)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1968.2.9. (그림11) 「진정에 대한 회신」, 1968.2.9.; 「극영화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 1968.2.20.) 그런데 이때 재검열의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소 저속”하지만 “넌센스 코메디임을 감안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는 결과를 회신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확인할 수 없다. 6)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일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추가제한 조치에 따라 이후 필름들이 회수, 수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2월 말까지도 이 영화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처음부터 상영을 중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재검열을 요구했던 여론의 흐름과 투서를 보냈던 단체들에 보낸 회신으로 미루어볼 때, 필름 회수 후 수정본을 다시 상영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재검열 소동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필름의 상영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대복덕방>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재검열 사건으로 인해 검열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가 한층 높은 강도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검열에서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저의 태작”이라고 평가받는 <오대복덕방>에 별 다른 문제없이 상영허가를 내 준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7) 이처럼 상황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상영허가가 “사무적 미스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이 영화의 재검열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중, 3중으로 실시되는 영화검열의 엄격함과 그 자의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홍종철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것과 윤리적 도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것은 계속 커트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8) 그간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해 왔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이후 공보부의 실사 검열은 <오대복덕방> 검열 논란이 있었던 직후인 1968년 4월 1일부터 각본심의위원회와 영화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합동으로 사전 시나리오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의 강도도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0년 2월 20일 극영화시나리오 검열 업무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으로 이관될 때까지 이러한 검열의 주체와 기조는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재검열 소동이 벌어졌던 와중에서 <오대복덕방>은 <남자 식모>(심우섭, 1968)와 더불어 개봉관에서 10만 관객을 넘겼다. <남자 식모>가 18만, <오대복덕방>이 10만을 넘기며 그 해 흥행 순위 2위와 5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크린 히트”와 함께 평단에서는 코미디영화 검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검열에서 “대중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 되었던 <남자 식모>와 “저속”하지만 “코미디”이므로 “웃고 넘길”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 받았던 <오대복덕방>은 검열의 위계상 분명히 같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평론에서는 함께 엮여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구잡이로 찍은” “저질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었다. 9) 이 시기, 검열과 평가의 기준을 달리 했던 평단은 서영춘 코미디와 구봉서 코미디를 한 데 묶어 “저질” 코미디로 분류하였으나 검열은 “저질 코미디”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설정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저속’에 대한 검열의 문제제기와 위계화에 대해서는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의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남자 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 미용사>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의 검열서류를 비교하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본다. 1) “방송가에 또 하나의 불씨/ 막다른 골목에 이른 코메디 프로 방륜마저 가벼운 경고 정도의 조치 뿐”, 《서울신문》, 1966.9.15. 2) 만화조 넌센스 소극 여자가 더 좋아”, 《조선일보》, 1965.7.15. 3) “우울한 동정에 기대어 롱런 한달 째나 「여자가 더 좋아」”, 《신아일보》, 1965.7.20. 4) “희극배우들의 여성숭배열/ 주책바가지”, 《신아일보》, 1965.11.6. 5) “복덕방 상영거부”, 《대한일보》, 1968.2.10. 6) “말썽난 70여 곳 삭제 항의 속에/다시 검열대 앞에/ 「넌센스 코메디」 오대복덕방”, 《신아일보》, 1968.2.13. 7) “「오대복덕방」 시비를 계기로 본/ 영화검열의 문제점/ 무정견한 양식의 기준/ 제 나름의 주관/ 툭하면 가위질. 영화 드라마의 뼈대를 손상시키기도/ 윤리적 면서 타락, 검열은 계속 강화 공보부의 견해”, 《조선일보》, 1968.2.22. 8) 앞의 기사, 《조선일보》, 1968.2.22 참고. 9) “한계 흐린 가위질/ 영화검열 시비/ <처제>는 저속, <엄마기생>은 OK/ 귀걸이 코걸이 재단/ 업자 당국 반성하고 전문위 두도록”, 《중앙일보》, 1968.5.25.; “관객 동원수로 본 상반기 영화/ 이상기류/ 철저한 오락물 추구/ 난센스 코미디와 검객영화 판쳐/ 흥행서 실패한 올해 수확작”, 《대한일보》 1968.7.9.; “하반기의 영화제작 경향/ 소극, 합작물의 범람/ 거의 예술성을 외면 /아이디어 부족 소재도 저속/ 관람 성향에 편승/ 인니, 태국과 합작도 기획”, 《대한일보》, 1968.7.20.) * 참고문헌: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51집, 2016.
60년대의 기운 시대적인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령 196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유럽은 프랑스의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혁명에 돌입했고, 미국은 반문화 정서에 몰두했다. 현대영화의 형식과 내용의 급진성이 과감하게 실험됐고, 미국 영화조차도 상상력의 자유가 허용됐다. 카메라 움직임과 앵글, 편집에는 금기가 없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해 “뭘 해도 의미는 만들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대형 스튜디오들에겐 위기였으나 새로 등장한 신진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계기였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정치학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이러한 시대에 동참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그는 오즈의 엄격한 조형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는 거의 인류학자의 태도로서 일본의 인간 군상들을 관찰했고, 원시주의적 열정으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차마 발언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에너지, 혹은 폭력과 무지가 그의 영화들에서 가감 없이 펼쳐졌다. 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그의 발언은 그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두 가지 문제, 즉 인간 육체의 열등함과 일본의 일상적 현실의 끊임없는 바탕이 되고 있는 사회 구조의 열등함을 결합시키고 싶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했다. 시대적 기운도 그를 상승시켰다.(당대의 제도나 사회구조와는 다른 의미로서의 시대의식, 세대성) 쇼헤이의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걸작들은 금기가 없다. 검열도 없다. 카메라 움직임과 캐릭터, 주제와 소재, 영화적 형식과 스토리도 파격적이다. 그의 모든 영화들에는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괴이한 기운도 감돈다. 괴력의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의 진실 혹은 허구 60년대 쇼헤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진 < 인간 증발 >이다. 젊은 날의 쇼헤이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현장을 지배하는 그의 강단과 천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이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원래 TV 시리즈 물로 기획되었으나 영화로 전환됐다. 당시 일본에선 한해 십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이마무라는 도대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찰청 실종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32세의 남자, 타다시 오시마를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그의 약혼녀 요시에를 동참시켜, 그녀가 오시마의 가족과 동료, 실종 당시의 정황 등을 파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문 인터뷰어로는 < 붉은 살의 >(1964) 등에 출연한 바 있는 남자배우 츠유구치 시게루를 캐스팅하여 요시에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였다. 영화는 오시마 실종 1년 반이 지난 시점부터 촬영되기 시작해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소요했다. 촬영팀은 오시마를 추적하는 수사팀과 흡사했고, 요시에와 시게루를 내세운 인터뷰들은 직계 가족부터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영화 촬영팀의 첫 추적 대상은 당연히 오시마였다. 그의 내밀한 가족사와 부모 형제, 그가 왜 도시로 이주했으며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어떤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폭로되기 시작한다. 극기야 실종 시점에 오시마는 약혼녀 요시에가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쯤 되면 영화는 슬슬 관객에게 퍼즐과도 같은 질문의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부재하는 남자,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자, 실체가 없는 남자가 오직 타인의 증언에 의해서만 관객에게 제시된다. 누군가에게 그는 무능한 일군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그는 여자들을 농락하는 자였고 결국 실종 전에 회사 공금까지 횡령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영화가 정작 질문하는 것은 오시마라는 사람의 존재 혹은 오시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아니다. 오시마를 경유해 이마무라 쇼헤이의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단편적 사실들(그의 흔적들, 증언들, 기억들, 관계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본격적인 게임은 중반에 이르면서 고조된다. 오시마 실종 2년째 되던 날, 일본의 TV와 언론 매체는 이마무라의 영화 촬영팀과 약혼녀인 요시에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디어에서 요시에는 보기 드문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추앙되었고, 어떤 기자는 “단지 찾겠다는 일념으로 이마무라의 촬영에 응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요시에는 이때쯤 이미 변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오랜 추적과정 속에 더 이상 오시마가 아니라 인터뷰어이자 배우인 시게루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이마무라 쇼헤이는 시게루를 불러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미 영화는 목적(요시에의 오시마 찾기)을 잃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관계를 밀어붙이자.” 영화와 현실, 허구와 진실의 경계 < 인간 증발 >은 명백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표방하고 시작된 작품이었다. 오시마 실종이라는 사건, 오시마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요시에의 추적은 모두 사실에 기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영화로 기록하면서 이마무라는 새로운 실험을 덧붙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마무라는 관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사실들을 추적하다 보면 진실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했다. 물론 진실은 있겠지만 여기 세 명(극 중 진실 공방을 벌이는 요시에와 요시에 언니, 그리고 어떤 사건의 목격자인 생선장수)에게 진실은 다 다르게 존재한다. ... 사람 마음은 믿을게 못 된다. 이건 픽션이다. 오시마의 실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일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다. 가공된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중반 이후 관객들은 보이스 오버 방식으로 흘러나오는 영화 촬영팀의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화면은 여전히 오시마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요시에 일행을 제시하고 있지만, 목소리들은 이 영화의 방향에 대해 극영화적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촬영팀이 사건을 왜곡하거나 정황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영화적 포커스를 오시마에서 요시에로 옮겨가며, 요시에 언니를 새로운 사건의 용의자로 제시한다. 막장에 가까운 의혹도 제기한다. 무당의 강신된 목소리가 결정적 계기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무당은 오시마가 이미 죽었으며, 그를 죽인 것은 오시마와 불륜을 저지른 요시에의 언니라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포커스는 요시에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불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생선장수의 진실게임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알려주지 못한다. 화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와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말처럼, 영화는 다 허구이며, 사실의 단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내는 명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언니와 진실공방을 하던 요시에는 목격자인 생선장수를 집으로 불러와 언니와 대면시킨다. 이 세 명은 격한 논쟁을 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때 이마무라 감독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앉게 되고, 답답해진 요시에는 이마무라에게 질문한다. “감독님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이마무라는 큰 목소리로 “세트 준비!”라고 외친다. 이에 누군가의 집일 거라고 간주되었던 방의 벽들이 뜯겨 나간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며 이들을 전경화하는데,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관객은 이들이 실제 공간인 집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에 마련된 방과 집기들, 그리고 조명 장치 및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마무라의 주장. “인간의 마음을 믿을게 못된다~(위에서 언급한 내용)”. 이 작품이 천재적인 것은 단순히 진실 게임을 능란하게 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어느 심리 스릴러 못지않은 치밀함과 긴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시마는 살았는가? 언니는 정말 동생의 약혼자와 불륜을 저질렀나? 요시에는 약혼자를 찾겠다는 건가, 유명해지겠다는 건가? 그뿐 아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60년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TV 다큐멘터리나 독립 다큐멘터리에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파격적인 형식 구조와 실험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증언자와 카메라의 관계, 관객과 사건의 관계 등 모든 것들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 속에서 놀라운 에너지로 결합된다. 이마무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아이디어로 영화의 쇼트를 구성하고 편집하며 사운드를 배치한다. 그리고 그 인공적 가공물은 더 근원적으로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 허구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67년 작인 이마무라의 이러한 파격적 실험은 동시에 유럽의 시네마 베리테나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의 정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시네마 베리테의 인터뷰법은 이 영화에서 얼핏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네마 베리테는 진실을 추동하는 카메라, 무수한 질문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그들은 영화의 진실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그들의 한 계를 이미 간파했다. 증언자들은 신뢰할만한 것인가? 카메라는 과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언자들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구성능력’에 관한 문제였다. 2차원적인 카메라 렌즈가 세상을 프레이밍 하는 순간, 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세계(드라마, 허구)를 구성할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 이창 >, 그리고 고다르의 <경멸> 못지않게 뛰어난 자기 반영적 영화로서, < 인간 증발 >에서 진짜 진실은 오시마의 실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구성능력, 현실과 영화가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오시마나 요시에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요시에 자매와 목격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사건 정황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기록한다. 촬영팀이 장비를 동원해 소란스런 촬영을 시작하고 세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의 증언이 사실이라 우기며 싸우기 시작한다. 여기에 또 다른 관련자들이 모여들고 도시의 구경꾼들이 가세하면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그러자 이마무라는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하다며 중단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하는 마지막 발언. “이 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시마의 실종에 다시금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영화는 픽션이다. 다 사실이 아니다.” 이때 카메라는 공중으로 빠지고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대화 목소리. “끝인가요?” “응 그래. 영화는 끝이지만 현실은 시작이지. 내일 뭐해?” ps. 영화가 개봉하자 여러 논쟁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윤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조작했다는 비난부터, 오시마 및 요시에의 사생활 침해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그러자 역시 강단 있는 이마무라 감독의 응수. “내가 요시에의 시련을 영화 만드는 데 이용한 만큼 요시에도 나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