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union2012][힘내라MBC]릴레이인터뷰11 - 변영주 감독
- 제작년도
- 2012
<폭싹 속았수다> 중 (사진: 한겨레 /© 넷플릭스)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며칠 전, 12.3 비상계엄 이후 1년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그 시간을 통과할 때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 모두 참으로 위험한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내란 사태를 수습하느라 사회 전체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상황 역시 불안정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많은 이들이 ‘각자의 내란’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2025년의 시리즈에는 유난히 어려운 시절을 버티며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버틴 사람들의 이야기 올해 가장 많은 이들이 언급한 드라마는 < 폭싹 속았수다 >(김원석/넷플릭스)가 아닐까? <폭싹 속았수다>는 거친 바다를 온몸으로 견뎌낸 해녀, 광례( 염혜란 )에게서 시작한다. 광례와 딸 애순( 아이유 · 문소리 ), 손녀 금명(아이유)으로 이어진 모녀 3대는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파도에 맞선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댄 이 이야기에는 해녀 공동체의 연대, 애순과 관식( 박보검 )의 풋풋한 사랑, 그리고 모두의 생애를 지탱한 가족애가 가득 담겼다. <폭싹 속았수다> 속 인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과제를 감당하며 버텼다면, <태풍상사>(이나정, 김동휘/tvN)의 태풍( 이준호 )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경제적 폭풍을 견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어닥친 회사의 위기 앞에서 태풍은 직원들을 신뢰하며 열정적으로 회사를 지키고 살려낸다. <태풍상사>는 마치 ‘국난’을 극복하듯 회사를 되살리는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평범한 곳부터” 도려내졌던 IMF 시대를 살아낸 보통 사람들의 얼굴도 놓치지 않는다. 태풍이 청년 사업가로 성장하던 IMF 시기, 낙수( 류승룡 )는 치열한 취업 전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어느새 명예퇴직 대상자가 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조현탁/JTBC)는 사회의 중심축에서 밀려난 중년 세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사회적 ‘쓸모’가 사라졌다는 자각과 거듭되는 실패 앞에서 낙수는 모멸감과 상실감, 불안 속에서 흔들리며 우울과 공황을 겪는다. 이 시리즈는 중년의 위기를 유머와 애잔함으로 감싸며, 낙수가 가족의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 <폭싹 속았수다> 중 (사진: 한겨레 , PD저널 / © 넷플릭스) (하) <태풍상사>,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중 (사진: tvN , JTBC ) 여성들의 세계, 더 넓어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 너머, 여성을 생애사적·사회적 이야기로 확장한 시리즈도 눈에 띄었다. < 은중과 상연 >(조영민/넷플릭스)은 은중( 김고은 )과 상연( 박지현 ), 두 여성의 30년에 걸친 관계를 따라가며, 서로를 사랑하지만 미워하기도 하고,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배신도 하는 등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들의 복잡한 관계를 밀도 있게 그린다. 그중에서도 상연을 단순한 ‘빌런’이 아니라 결핍과 외로움이 빚어낸 인물로 끝까지 이해하려는 시선이나, 성소수자인 상학( 김건우 )의 죽음과 안락사를 선택한 상연의 죽음을 “내가 있어도 되는 세상”을 갖지 못한 존재들의 죽음으로 연결하는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미지의 서울>(박신우, 남건/tvN)은 일란성 쌍둥이, 미지와 미래( 박보영 )의 ‘삶 교환’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의 불안과 고립, 직장 내 괴롭힘, 비정규직 차별, 장애와 성소수자 문제를 복합적으로 짚는다. ‘마론제과’ 무기계약직 여성들의 이야기 <달까지 가자>(오다영, 정훈/MBC)와 아파트에서 발생한 사건을 추적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살롱 드 홈즈>(민진기, 정현남/ENA)는 가족의 확장된 형태로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보여준다. < 피라미드 게임 >(박소연/TVING)과 < 선의의 경쟁 >(김태희/U+TV)은 여고 내 계급과 폭력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미지의 서울>, <폭싹 속았수다>, <견우와 선녀>(김용완, 정우식/tvN), <첫, 사랑을 위하여>(유제원, 함승훈/tvN) 등 모녀 관계를 통해 여성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현대극뿐 아니라 시대극 역시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옥씨부인전>(진혁/JTBC)은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나 양반 마님이 되어 ‘변호사’로 활약한 구덕이( 임지연 )를 중심으로 계급, 여성 차별, 성소수자, 아동·약자 착취 문제 등을 녹여내 ‘조선판 인권 선언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 애마 >(이해영/넷플릭스)는 1980년대 충무로를 배경으로, 에로 영화 전성기의 포문을 연 영화 < 애마부인 >(정인엽, 1982) 촬영기를 극중극 형태로 재현하며 ‘남성적 응시’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를 메타 비평적으로 풀어낸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부정하던 1980년대 시골 마을에서 성인용품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인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JTBC)와 1990년대 버스 안내양들의 우정을 담은 <백번의 추억>(김상호/JTBC)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역사를 복원해,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의 문제, 노동과 우정의 연대기를 보여준다. (상) <은중과 상연>, <미지의 서울> 중 (사진: MBC /© 넷플릭스, tvN ) (하) <애마>, <백번의 추억> 중 (사진: 넷플릭스 , JTBC )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한계 이렇게 여성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고 폭넓게 등장했음에도 ‘가족’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폭싹 속았수다>를 여성 서사로도 볼 수 있지만, 결국 부모 세대와 가족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또한 낙수의 아내 하진( 명세빈 )이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지만, 시리즈는 결국 “김부장 이야기”, 즉 가장을 이해하고 북돋우며 가족애로 회복에 이르는 데 집중했다. <태풍상사>도 마찬가지다. IMF로 일자리를 잃거나 불안정한 노동에 배치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이런 이야기는 로맨스 서사에 묻히고 만다. 이런 한계에도 이 시리즈들은 ‘보편성’을 가진 좋은 이야기로 회자됐다. K-드라마의 보편성이란 여전히 ‘아버지’ 중심의 가족 서사라는 게 재확인된 셈이다. 이런 특징은 결국 세대, 노동, 차별 등 사회 구조적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른바, ‘여성 서사’라 불리는 드라마에서도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가족 다양성, 가족 너머의 서사를 온전히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봐야 할까? 『페미니즘 리부트』(2017)에서 영화평론가 손희정이 IMF 이후 영화의 여성 재현에 관해 지적했듯, IMF 이후 또 다른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는 지금, 이런 흐름은 가족이라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켜 ‘위기의 시대’를 손쉽게 통과하려는 징후가 아닐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태풍상사> 중 (사진: JTBC , tvN )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족과 연대로는 포착되지 않는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도 있었다. 가족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폭력, 사회가 방치하고 묵인해온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그 ‘사이코패스’들은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올해 시리즈의 또 다른 흐름은 < 하이퍼나이프 >(김정현/디즈니+)의 소시오패스 의사 세옥( 박은빈 )을 비롯해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단지 반사회적 인물로 등장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재현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질문했는가에 있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변영주/SBS)의 연쇄살인범 이신( 고현정 ), < 친애하는 X >(이응복, 박소현/tvN)의 사이코패스 아진( 김유정 ), < 당신이 죽였다 >(이정림/넷플릭스)에서 남편을 살해하는 희수( 이유미 )와 그의 친구 은수( 전소니 ), < 자백의 대가 >(이정효/넷플릭스)의 모은(김고은) 등 폭력을 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반사회적 여성들을 통해 아동 학대, 가정폭력, 성폭력을 묵인하는 가부장제와 권력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 시리즈들은 반사회적 선택이 개인의 선택이나 비정상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산물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초반의 기세와는 달리, 후반부에는 장르적 쾌감이나 개인에 대한 처벌로 귀결되며 구조 비판의 힘을 잃었다. 그 결과 폭력은 사회의 문제로 제시되지만, 변화의 책임은 다시 개인의 파멸이나 응징으로 환원된다. 2010년대 이후 빈번하게 등장한 ‘사적 복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자백의 대가> 중 (사진: SBS , 넷플릭스 ) 결국,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2025년 시리즈를 회고하다가 ‘돌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폭싹 속았수다>의 해녀 공동체가 서로를 살피고, <태풍상사>의 태풍이 직원들을 신뢰하며 회사를 지켜내고,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가족이 함께 위기의 시간을 견디고, < 다 이루어질지니 >(안길호/넷플릭스)에서 마을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인 가영( 배수지 )을 사랑으로 키워내는 것. <미지의 서울>에서 미래가 딸기 농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추스르고, <첫, 사랑을 위하여>에서 골수암에 걸린 효리(최윤지)가 꽃 농사를 짓는 보현(김민규)을 만나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폭군의 셰프>(장태유/tvN)에서 지영( 윤아 )이 음식으로 사람을 살리고, <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김혜영, 최하나/TVING)에서 이미 죽어 저승사자가 된 람우( 공명 )가 생기를 잃고 사는 첫사랑 희완( 김민하 )를 살리고, <견우와 선녀>에서 곧 죽을 운명에 처한 견우( 추영우 )를 무당인 성아( 조이현 )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리는 것. 이 모든 장면의 공통점은 어떤 대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이야기라는 점 아닐까? 그래서인지 올해 시리즈에는 유난히 식물을 키우는 설정이 자주 등장했다. 식물을 정성껏 가꿀 뿐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서로의 곁을 지켰다. 올해 시리즈는 ‘죽이는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살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가족주의라는 안전한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그것을 넘어서려 애쓰면서 2025년 시리즈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돌봄과 버티기만으로는 구조를 바꿀 수 없다. 가족 간의 사랑을 앞세우고, 개인의 파멸로 끝나는 응징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상상력의 시계를 좁게 한다. <애마>에서 희란( 이하늬 )과 주애( 방효린 )가 “각자의 링” 위에서 싸우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세계로 나아갔듯, 지금 우리에게는 낡은 세계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앞당기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미지의 서울> 중 (사진: tvN )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작진은 종종 스스로 만든 것이건 혹은 피사체의 삶과 환경에 의한 것이건 함정에 빠지곤 한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중심이 상상에 의해 건설된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로를 해석해오던 관계와 삶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공동정범 >의 김일란 , 이혁상 감독도 어쩌면 이 함정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가 그들 작품의 첫 번째 미션이었을지 모르겠다. 전작 < 두 개의 문 >은 그 탁월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시퀀스가 빠져있다. 바로 그때 망루에 있었던 당사자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그 당사자들이 석방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제작진의 의도와 상관없이 < 공동정범 >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비극의 시간들을 함께 “기록”해낼 수 없었다. 각자의 기억은 이어지지 않는 파편들로 가득했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상태였고, 서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여기서 김일란 , 이혁상 의 훌륭한 “함정 빠져나오기”의 선택이 이뤄진다. 두 감독은 파편화된 기억을 억지로 조합하여 봉합하지 않는다. “도시 재개발의 야만적 폭력”과 “공권력의 남용”이라는 깃발 같은 화두를 앞세워 이 상황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들은 바로 지금의 상태에서 더 작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제 투덜거리며 누군가를 원망하는 사람 (천주석), 죄의식에 스스로와 주위를 괴롭히며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 (김주환), 자신의 기억과 객관적인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 (지석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와 지금을 연결시켜 읽어보려 애쓰는 사람 (김창수), 그리고 모든 것을 봉합하며 깃발만을 바라보자고 말하는 사람 (이충연)과 함께 두 감독은 엔딩을 알 수 없는 깊은 대화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 대화가 놀랍도록 기이하다. 보통의 경우,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그들 곁으로 가서 이야기를 꺼내도록 독려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실은 피사체가 아니라 그것을 주워 담는 제작진이다. 그러나 < 공동정범 >은 다르다. 마치 카메라는 대나무 숲처럼 그들 곁에 부유하고, 그들은 세상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거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귓속말하듯 카메라에 속삭이기 시작한다. <공동정범>을 독해하고자 할 때 너무나 다층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메라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그 자발적이고 폐쇄적인 웅얼거림을 듣고 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난 감옥에 있을 때 < 두 개의 문 > 이야기를 들었어. 니들은 내 편인 것 같아. 저 카메라는 실은 내 일기장이 될 것이야”라고 주장하는 다섯 명의 생존자들이 카메라에 부탁을 하는 형국이다. “나는 좀 힘든데, 네가 내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전해주겠니?” 그래서 <공동정범>은 영화의 대부분이 주관적이며 복합적이다. 카메라는 옵저버가 아니라 메신저이거나 대나무 숲의 바람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곁들에게 조심스레 전한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 이충연이 눈물을 흘릴 때 관객은 긴장한다. 누군가는 눈물이 흐를 것을 예견하며 제발 카메라가 그때까지 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예견했음에도 눈물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 눈물은 결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충연도 카메라를 자신의 메신저로 여기게 된 시작으로 느껴졌다. 바꿔 말하면 <공동정범>의 마지막은 봉합이 아니라 이제 겨우 스스로의 상처 밖으로 조심스레 나와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그들의 결심인 것이다. <공동정범>에 표현주의적인 자유로운 이미지들이 오히려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카메라가 결국 옵져버의 태도로 돌아왔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갖게 되는 어떤 아쉬움은 어쩌면 메신저로서의 카메라 그 너머의 바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가 완성된 후,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영화를 본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천주석은 이충연이 망루에서 제일 먼저 나간 것이 자신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살길을 먼저 보여준 것이고 그래서 결국 그로 인해 우리가 살아남은 것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했다. 난 영화가 세상에 복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역할 중에서 이보다 더 찬란하고 고마운 역할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 공동정범 >은 나에게 이제 세상의 상처받은 모든 피해자들에게 그 상처 너머의 대화를 시작해보자고 넌지시 독려하는 친절하고 상냥한 쪽지처럼 느껴졌다.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김소영 의 비평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아가 그녀는 이제 영화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 무언가가 계속되고 있을 때 그것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볼 길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90년대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로서의 그녀의 면모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실 90년대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페미니즘이 약진했던 분야가 바로 영화비평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여성 친화적인 매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문학이나 미술에 비해 여성 비평가들의 진입이 유독 활발해 보이는 것이 단지 착시현상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김소영 의 활동이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좀더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화적 이력 초기에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를 결성했던 것, 여러 연구자들을 아울러 『시네-페미니즘, 대중영화 꼼꼼히 읽기』(과학과 사상, 1995)를 출판했던 것은 모두 그러한 활동방식의 소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에서 페미니즘 영화론의 부싯돌이 된 것은 68혁명 이후의 담론적 자장 안에서 ‘시각적 쾌락’의 남성적 성격에 주목한 로라 멀비(Laura Mulvey)의 글이었고, 이후 그것을 대리보충하는 논의들이 속속 잇따르면서 시네-페미니즘의 긴 역사를 형성해갔다. 이들은 주로 여성 인물과 그들의 욕망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가부장제 사회의 욕망에 부합하거나 저항하는지를 분석했다. 김소영 의 여성주의 비평도 큰 가닥은 그와 같았다. 동시대 영화에 관한 단평들을 모은 『영화 리뷰』(한겨레, 1997)를 보면 그녀가 4년여 동안 부지불식간에 걸러낸 영화들 중 상당수가 여성영화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변영주 , 임순례 , 리브 울만, 마사 쿨리지, 제인 캠피온 등의 여성 감독들과 그녀들의 영화들, < 개 같은 날의 오후 > < 코르셋 > < 두 여자 이야기 > 등 남성 감독이 만든 여성영화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재현되는 여성 주체성의 문제를 고루 다루고 있다. 한편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열화당, 1996)에서 그녀는 아예 한 장을 ‘시네 페미니즘, 성의 정치학’에 할애하며 이론과 비평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 쉬리 >와 < 공동경비구역 JSA > 등 이른바 2000년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주목으로 이어진다(「사라지는 남한 여성들」,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현실문화연구, 2001). 시네-페미니즘에 대한 김소영 의 접근법의 특이성은 그녀가 역설적으로 ‘어떤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대문자 여성으로 환원시키는 페미니즘으로부터,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한국사회에서 성취했던 여성해방운동과 단절된 채로 유포되고 있던 페미니즘 담론의 현학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페미니즘 본연의 가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안이 구태의연한 민족주의 담론일 수 없음을 김소영은 이후의 행보를 통해 보여주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페미니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 시네마를 비판하는 작업으로 전환하는 한편, 동아시아 영화를 대상으로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쟁점들을 제기하는 작업으로 입각점을 옮겨가게 된다. 김기덕 의 < 나쁜 남자 >는 한국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을 가장 자극했던 영화였고 그런 의미에서 2001년은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계의 존재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해였다. 그녀들의 그 열기는 1997년에 창립되어 성공적으로 안착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속에서 지금까지도 매년 되살아나고 있다. 여성영화제는 어쩌면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사가 남긴 가장 가시적인 유산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누구나 김소영 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