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여성
- 감독
- 박성복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최은희, 김석훈, 노경희, 이경희, 허장강, 김승호, 최남현, 성소민, 김동원, 고선애, 김주오, 한림, 남춘역, 김정옥, 이향자, 전숙, 나미례, 박광수, 이일정, 조미숙
한국영화의 또 한번의 꽃이 활짝 핀 1950년대 중반에 노경희 란 여배우의 위치는 든든했다. 흔히들 해방 후 1세대 글래머 스타가운데 노경희를 꼽지만 그는 역시 탄탄한 연기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 는 뭐니뭐니 해도 < 피아골 >의 ‘노경희’이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은 지리산의 피아골을 무대로 하여 한 여자 빨치산을 둘러싸고 빨치산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빨치산의 귀순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피아골>에서 노경희는 바로 여주인공인 여자 빨치산 ‘애란’역을 훌륭히 해냈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작품성과 함께 연기진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 김진규 는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으며 이예춘도 이 작품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허장강 은 역시 이강천 감독의 < 아리랑 >으로 데뷔하여 뒤이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노경희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현직 경찰관이 각본을 쓴 이 ‘반공영화’ (당시 용어)는 빨치산의 생태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죄(?) 때문인지 한동안 용공성(容共性) 시비가 없지 않았다. 군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상영불가론,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우수작품론을 펼쳤었다. 신문지상에도 군인과 평론가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긍재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평가했다. “…< 피아골 >은 선전적 가치로 보나 영화예술성으로 보나 아직까지 한국영화로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피아골>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가령 부상공비 A가 무기를 버리고 왔다고 해서 대장 아가리는 총살을 명령하고 뒤이어 만수로 하여금 잔인하게 돌로 쳐 부셔죽이는 것이다…”(동아일보 1955·8·1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먹물 든 빨치산 철수( 김진규 )를 사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자 빨치산 애란 역을 멋있게 해낸 노경희 는 이 < 피아골 > 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경희 자신도 세월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는 < 피아골 >이지요. 대표작입니다.” 회갑을 1년 앞둔 87년 7월 노경희 (당시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 부위원장)가 한 말이다. (주간조선 87.9.13) 노경희 는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피아골 다음으로는 < 춘향전 >(1955)과 < 망나비비사 > (1955)가 연기력을 평가받고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국영화사의 거목인 이규환이 생전 “각본 감독 편집을 손수 내 손으로 한<춘향전>은 나의 영혼이 깃든 작품이었다”(김화: 이야기 한국영화사)고 말한 작품.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전국 흥행계를 강타했다. 해방 후 최초의 춘향전 영화이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길목에 가끔씩 나타나 마치 구원의 여신과 같이 한국영화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호현찬 : 한국영화 100년) < 춘향전 >은 노경희 의 연기 길목에도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춘향= 조미령 , 이도령= 이 민 , 향단 = 노경희, 방자= 전택이 …. 당시로서는 다시 맞출 수 없는 ‘호화배역’이었다. 더구나 노경희·전택이는 부부사이었으니 향단·방자역을 얼마나 멋있게 해냈겠는가. 두 사람이 깡충깡충 뛰는, 활력 넘치는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개봉관인 서울의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20일 상영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백여만 명 ( 이규환 감독의 기록)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을 본 셈이다. 2년 동안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면소재지에서까지 상영되었다고 하니 향단이 노경희의 연기가 그만큼 평가되고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의 히트로 한국영화계에 사극 붐이 일었다.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도 노경희는 남편 전택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비사(슬픈 역사), 슬픈 이야기이다. 전택이가 망나니 ‘먹’역을, 노경희는 술집 작부‘달’로 분했다. “…얼굴 가득 불안스러움을 내비치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먹을 다루는 노경희는…”(여성영화인사전:여선정) 성격 배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노경희는 역시 글래머 스타라기보다는 단단한 연기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1955년 한해동안 < 피아골 >, <춘향전>, <망나니 비사> 3편의 작품에 출연하여 그 연기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세 작품만으로 노경희의 연기자로서의, 배우로서의 위치는 굳혀진 셈이다. 노경희 는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배화여고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다녔던 노경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극장대장’으로 통했다…”(여성 영화인사전) 노경희는 17세 때 감독 최인규와 배우 전택이 가 제작준비 중이던 <마의 산> 히로인 역에 음모하여 뽑혔다. 그러나 <마의 산> 촬영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자 노경희는 길을 잃었다. 전택이 선배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약초가극단 (단장 김해송)에 들어갔다. 이 가극단 동기생으로는 김진규 , 이예춘 , 허장강 이 있다. 신청년악극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무대생활은 모두 6년이었다. 1948년 < 수우 >에도 출연한 기록이 없지 않지만 본인이나 한국 영화사 기록에서는 1950년의 < 흥부와 놀부 > ( 이경선 감독)을 노경희 의 본격적인 데뷔작품으로 꼽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서울에서 개봉되었는데 그중 1편이 바로 <흥부와 놀부>이다. 노경희는 한국전쟁 중 종군다큐멘터리 제작에 연기자로 참여했으며 1954년 홍성기 감독의 < 출격명령 >에 출연했다. 공군 조종사간 사랑의 삼각관계와 전우애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전택이도 출연했다. 그리고 앞에서 특기한 < 피아골 > < 춘향전 > < 망나니 비사 > 3편이 1955년의 노경희를 빛냈다. 뒤이어 다음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 인생역마차 > < 자유부인 > < 애인 > < 여성의 적 > (이상 1956년) < 실락원의 별 > < 애원의 고백 > (1957년) < 산넘어 바다건너 > < 돈 > < 실락원의 별 2 > < 유혹의 강 > < 애정무정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1958년) < 고바우 > < 내일 없는 그날 > < 백만장자가 되면 > < 별하나 나하나 > < 삼여성 > < 애련의 꽃송이 > < 젊은 안내 > < 푸른 날개 > < 황금의 상처 > (1959년) < 버림 받은 천사 > < 어느 하늘 아래서 > < 울지 않으련다 > < 청춘화원 > < 추억은 영원히 > (1960년) <애정행로> (1961년) < 양귀비 > <어딘지 가고싶어> <흑태양> (1962년) < 거지왕자 > < 검은 꽃잎이 질 때 > < 약혼녀 > < 연애주식회사 >(1963년) 노경희 가 출연한 100여 편의 영화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위에서는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 것인데 1950년대 중반이후 19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계에서 노경희가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노경희가 거의 출연하다시피 했다. < 자유부인 > < 애인 > < 실락원의 별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 삼여성 >등은 연기면에서나 이야기거리로나 노경희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애인>에는 전택이가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노경희는 이 작품을 ‘전택이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곤 했다. <삼여성>에서는 당시의 스타 최은희 이경희 그리고 노경희 세 사람의 연기 대결을 보여주었다. 왕성하게 영화 출연을 하지 않게 된 뒤로도 노경희 는 선배로서 후배들의 연기지도 또는 영화인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녔다. 회갑을 넘기고도 그의 왕년의 글래머 스타의 건강을 여실히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노경희에게는 지병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1995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새벽 서울 을지병원에서 노경희는 세상을 떠났다. 67세였다. 당뇨와 심부전증이 사인이었다. 당시 83세인 남편 전택이와 4남1녀를 남겨 두고 갔다. 전택이는 3년뒤인 1998년 3월2일 86세를 일기로 아내 노경희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선배·후배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전택이가 본 부인과 이혼한 뒤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말년에도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1998·3·4)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본명 : 노숙진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 출생 배화고녀 졸업 1950년 이경선 감독의 < 흥부와 놀부 >로 데뷔 1995년 7월 7월 타계 <주요 작품> 인생 역마차 , 애인 , 삼여성 , 자유부인 , 망나니비사 , 실낙원의 별 등 <수상 경력> 1955년 < 망나니비사 > 제1회 금룡상 여우주연상 수상
한국여배우사를 훑어볼 때 '착한 여자 콤플렉스', '천사표 콤플렉스'로 관객들의 눈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배우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던 전옥 을 필두로 김연실 , 김소영 , 문예봉 , 유계선 , 김신재 , 이경희 , 고은아 , 전계현 , 문희 등 기라성 같은 명성을 떨친 여배우들이었다. 이들 여배우들 중에서도 특히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여배우가 전옥에 이어 '제2의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경희(李璟姬)였다. 이경희 는 1932년 9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여고 졸업 수 한때 레코드가수 및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연기자로는 1955년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로 데뷔하였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는 전택이 , 노경희 와 트리오로 공연했다. 이경희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재학 당시 서울방송국에 출연하는 기회도 자주 가졌으며 졸업 후 레코드사의 요청을 받아 <서울의 거리>, <서울 부기> 등의 히트곡을 취힙하기도 했다. 그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악극단 <희망>에 입단하여 <루루태자>, <라 콤파르시타>, <분홍치마>. <클레오파트라>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다. 그녀가 애수에 젖은 음감으로 <라 콤파르시타>를 불러 젖힐 때 관객들은 주저없이 '순정의 가희', '눈물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경희 의 데뷔작 < 망나니 비사 >에 따른 에피소드(<여성영화인사전>69쪽 이경희.2001년 도서출판 소도)를 살펴 보자. 55년 서울 수복 후 여배우를 물색하던 김성민 감독은 이경희가 적역이라는 조언을 듣고 당시 국도극장에서 황해 등과 <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연극을 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봤다. 노경희 , 전택이 , 이민 등 당대의 빅 스타들과 함께 <망나니 비사>에 출연하게 된 이경희는 정조을 지키려던 자신 때문에 모함에 빠지게 된 아버지와,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목을 쳤지만 자신을 사랑하게 된 망나니 ''먹''(전택이)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비운의 여인 ''채''로 분했다. 장옷를 뒤집어쓰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채''의 모습은 너무나 단아해서 잡시 발성영화에 잘못 캐스팅된 무성영화의 슬픈 페르소나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 영화 이후 청순가련한 비극의 히로인은 이경희 에게 일종의 숙명처럼 고착되었다. 영화 < 망나니 비사 >에서 여주인공 '채'로 분한 이경희 와 역시 여주인공 '달'로 분한 노경희 는 양반집 규수(전자)대 술집 작부라는 상반된 신분의 여인으로 등장하였다. -어느 고을의 교리( 이민 )가 그 고을 진사의 딸 '채'( 이경희 )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사는 자기 딸을 교리의 소실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교리는 갖은 모함을 다해서 진사를 역적으로 몰고 그의 딸을 차지하려 했다. 그랬지만 딸은 도망을 쳤다. 그 딸이 도망친 곳은 바로 망나니인 '먹'( 전택이 )이네 집. '먹'은 그 딸을 숨겨주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망나니 '먹'은 진사딸 '채'를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술집작부인 달은 사랑하는 '먹'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 이른바 삼각형 연애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 가 청순가련형의 여인상을 연기한 반면 노경희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먹'을 다루는 능동적인 하층민 여인상을 선보였다. 노경희는 이 영화의 '달'역으로 1955년 제1회 금룡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가슴에는 '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대목에서의 이경희 연기가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희 는 이밖에도 < 모정 > '58. 양주남 감독 , < 육체의 길 > '59. 조긍하 감독, < 삼여성 > '59 박성복 감독, < 연산군 >'61 신상옥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63 유현목 감독, < 단종애사 >'63 이규웅 감독, < 모란이 피기까지는 > '63 김기덕 감독, < 혈맥 > '63 김수용 감독, < 추풍령 > '65 전범성 감독, < 신설 > '74 조문진 감독, < 들국화는 피었는데 > '74 이만희 감독, < 여자를 찾습니다 > '76 하길종 감독, < 깃발없는 기수 > '79 임권택 감독, < 내가 버린 여자2 > '80 홍성기 감독, < 아가다 > '79 김현명 감독>, < 영웅연가 > '86 김유진 감독, < 이장호의 외인구단 > '86. 이장호 감독, < 아다다 > '87 임권택 감독 등에 출연하였다. 이경희 의 대표작을 들라고 하면 < 망나니 비사 >, < 잃어버린 청춘 >, < 찔레꽃 > 등 3편을 통해서 보여준 연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된다. 그 가운데서 대표작 중 1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에서 보여준 이경희의 연기(정애 역)를 평가하고자 한다. 영화 <잃어버린 청춘>의 주인공인 위진구( 최무룡 )의 직업은 전기공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전선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괴한과 맞부딪쳤다. 상대방은 바람처럼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에는 돈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위진구가 조심스럽게 돈다발을 집어들었을 때 근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구가 그 사람을 발견,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강도다!'라고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었다. 진구는 옷소매를 붙잡고 달라붙은 그 자를 때려눕히고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죽었고, 진구는 억울하게도 살인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된 진구는 신을 의지하는 애인 정애 이경희 )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결국 젊은 전기공은 경찰에 자수하지만 애인의 따스한 눈물만으로는 냉엄한 현실의 절망감을 밀어젖힐 수 없었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6.25전쟁 후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의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운명이 리얼한 영상 속에서 속절없이 농락당한다는 ''쫓기는 인생''의 삶이 비정하게 묘사된 영화에서 여주인공 정애의 마지막 내뱉은 말은 '이젠 울지 않겠어요'였다. 필자는 < 잃어버린 청춘 >이 제작된 지 45년이 지난 며칠 전 유현목 감독을 만나 영화배우 이경희 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유감독님이 < 잃어버린 청춘 >을 연출한 당시 연기자로서 이경희 씨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해서 청순가련형의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였지요. <잃어버린 청춘>의 라스트신을 찍는데, 비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때가 엄동설한이라 우중 신을 찍기가 용이치 않았어요. 소방차를 동원 호스로 물을 뿌렸는데, 물이 잘못 뿜어져 고압선에 닿으면 위험한 형국이었어요. 나는 이경희 씨에게 추우니 비닐 옷을 입으라고 권했지요. 그런데도 2시간 이상 촬영하는 동안 이경희 씨는 끝내 비닐 옷을 걸치지 않고 꼬박 혹한 속에서 물세례를 받았어요. 나는 속으로 그녀가 인내력은 물론, 프로 의식이 강한 외유내강형 연기자로구나 생각했지요. 성실하고 싹싹했고, 외모도 나무랄 데 없는 미인형이였지요.' < 눈내리는 밤 ''58>, < 목포의 눈물 ''58> 등 신파극 멜로 드라마를 연출한 바 있는 하한수 감독도 이경희 에 대해 연기평을 했다. '내 영화에 출연한 후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진 전옥 씨는 정말 전설적인 여배우로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히 ''불꽃''이라고 부를만 했어요. 거기에 비해 이경희 씨는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품의 연기자였지요. 그의 매력은 항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에 있습니다.' 1958년 초여름 결혼했던 남편 김영건과 1963년 사별한 이경희는 딸 혜정의 강한 어머니로서 모정의 세월 속에서 연기생활에 전념했다. 이경희 가 출연한 최근 작품으로는 < 세상 밖으로 >''94 여균동 , < 닥터 봉 > ''95 이광훈 , < 도둑과 시인 > ''95 석래명 , < 애 > ''99 이두용 , < 가위 >2000 윤종찬 등이 있다. 영화배우 이경희 .... 그녀는 1950년대 중반에 데뷔한 이래 45년간을 현역 연기자로 활동하였다.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는 늙음도 마다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변인식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32. 4. 27 서울 데 뷔 : 1955년 김성민 감독 < 망나니 비사 > 주요 작품 : < 찔레꽃 >, < 망부석 >, < 두남매 >, < 잃어버린 청춘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