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세계
- 감독
- 김수로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강지석, 황순윤, 신난애, 서휘원
팬데믹 시대의 호접몽: < 바람 > ( 백미영 , 2015) #01. 지금, 봄은 창 밖에 있다. 우리는 창 너머로 봄꽃을 바라보고, 봄볕을 느낀다. 자연은 보이지만 닿지 않는다. 익숙했던 자연은 이제 이미지로서 스스로를 격리시킨다.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있었음에도 드러나지 않았던 자연의 미세한 존재가 갑자기 등장했다. 맨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는 포착되는 코로나 19. 신종 바이러스는 실제 크기보다 확대되어 모든 매체를 뒤덮고 있다. 지극히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바이러스는 확대되고 복제되고 매일 재생산되는 이미지로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02. 몇 해 전, 독립애니메이션 협회가 매달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 상영을 전시와 함께 꾸린 <애니살롱> 프로그램에서 백미영 감독의 GV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독립 애니메이션의 청록파”라고 수식하면서, “미세먼지로 뒤덮힌 요즈음, 감독님의 작품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청정함을 느낀다”는 멘트를 날렸다. 그때는 다분히 쇼맨십에서 비롯된 말이었지만, 현재 백미영의 작품을 다시 보니, 나름 적확한 평가라고 여겨진다. #03.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서정성은 다루기 쉽지 않은 테마이다. 서정성은 독립 애니메이션의 덫이자 독이기 십상이었다. 외따로 고독하게 작업하는 창작자는 곧잘 자신의 내면 세계에 빠져들어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개인적 서정은 쉽사리 자기 연민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지나친 관념이라는 블랙홀에 삼켜져 버린다. 서정성을 오롯이 생기있게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감각과 이로 인해 포착되는 섬세한 디테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이 담아낸 서정은 모호함 속에서 헛돌았다. 애석하지만 이를 부정할만한 작품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이 점에서 백미영의 <바람>과 의 김도연 의 < 6월의 산 >은 주목할 예외작이다. #04. <바람>은 바람과 마주한 나비의 날개짓을 한껏 담은 작품이다. 이상으로 작품 설명 끝…?! 백미영의 작품들은 멀리 떨어져 닿지 않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다루고 있다. 그리움은 합일에 대한 열망을 낳고, 작품들은 그렇게 ‘대상과의 하나됨’을 향해 나아간다. 전반적으로 그러한 작품들은 마지막에 이루어낸 ‘물아일체’를 보여주며 끝맺는다. 그런데 <바람>은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난다. 나비의 날개짓은 자기가 소망하는 것에 다다르지 못하고 멈추어 버린듯 싶다. 거기까지가 이 작품의 첫 마디이다. 그리고는 또다른 날개짓으로 다시 날아오른다. 또다른 마디의 시작이다. 작품 제목 <바람>이 wind이면서도 desire인 까닭이다. 날개짓을 이끄는 것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바람’에 대한 소망이다. #05. 바람wind을 그려내기란 쉽지가 않다. 형체없는 공기의 움직임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이 건드리는 것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를 형상화할 뿐이다. 머리카락이나 옷이 나부끼는 식으로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에서 바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고양이 버스를 고안해 냈다). 백미영이 바람을 다루는 방식은 자연에 충실하다. 아무 것도 그려내지 않는 정공법! 바람이 머무는 자연조차도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고 모두 거둬냈다. 수묵화의 미덕인 여백을 고스란히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왔다. 충실하게 집중할 것은 오직 나비의 날개짓 뿐이다. 그 날개짓은 바람wind을 마주하고, 새로운 바람desire을 향해 퍼덕이는 존재의 춤사위이다. #06.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욕망을 꿈꾼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존의 욕망이 필요하니까. 백미영의 <바람>이 바로 지금, 비로소 존재의 의의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가 잊어왔던 본래 그대로의 자연을 이제서야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람> 속에서 나비는 안에 갇혀있는지, 밖에 나와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나비는 자연 안에 있었던가, 자연 밖에 있었던가? 나비는 스스로 자연의 일부였던가, 아니면 자연을 동경하는 외부인이었던가? <바람>은 한두번의 감상만으로 쉽게 그 답을 드러내지 않는다. 쉽사리 깨어날 수 없는 장자의 호접몽이 그러했듯이…
<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 >(클로이 자오, 2017)를 보는 동안 몸이 아팠다. 이건 영화의 인상에 관한 수사가 아니라, 물리적 경험의 차원에 대한 표현이다. 그 감흥은 이 세계가 특별한 육체성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후에야 나는 인물을 연기한 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 브레디 블랙번은 실제로 로데오 카우보이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했던 브레디 잰드로고,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잰드로 가족이며, 스타 카우보이였으나 낙마 사고로 장애를 입은 레인은 같은 과거를 가진 레인 스콧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연기에 모방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껴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느낌은 그들의 연기가 숙련되고 능숙하다는 평가와는 좀 다른 맥락의 문제다. 연기 경험이 없는 자가 영화 안에서 자신으로 분해 과거에 겪었던 사건을 재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효과가 따르는 건 물론 아니다. 요컨대 브레디 블랙번과 브레디 잰드로가 동일 인물이라고 해서 실제 육체와 극의 육체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에 진짜가 들어오는 순간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이 돌출된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캐릭터를 분석해서 서사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일반 배우들과 비교한다면 이 경우 ‘나’는 영화 안에서 ‘나’를 가장 어색하게 흉내 내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로데오 카우보이>가 성취한 자연스러움은 신기하고 기이한 것이다. 감독의 뛰어난 역량이나 이 영화로 데뷔한 이들에게 잠재된 배우로서의 재능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앞서 말했던 <로데오 카우보이>의 ‘특별한 육체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이를테면 레슬러도 음악가도 무용가도 아닌 로데오 카우보이의 세계라는 점이다.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현실을 재연하는 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그들의 실제 직업적 활동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감독은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정체성을 영화의 몸으로 반복하고 싶어 한다. 잘 알려져 있듯, 로데오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나 소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을 선발하는 일종의 스포츠 혹은 엔터테인먼트다. 흩어진 소들을 직접 한 곳으로 모는 카우보이의 일거리가 점차 줄면서 로데오는 공식적인 경기가 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울타리가 쳐진 작은 공간에서 조련되지 않은 말 위에 올라 최대한 오래 버티는 행위. 그래봤자 몇 초 안에 승부가 판가름 나는 말과 인간의 싸움. 로데오를 보다 보면 개인적으로는 짜릿함보다는 씁쓸함과 비애감이 먼저 찾아온다. 그건 아마도 사라진 서부의 자리와 의미를 더없이 인공적인 행위를 통해 오직 육체만으로 가까스로 좇고 있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말을 타고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거나 황야로 근사하게 사라지는 카우보이가 아니라, 저 비좁은 곳에서 오래 버티는 쇼로 단시간의 흥분에 도취된 카우보이의 형상. 말은 카우보이의 조력자가 아니라, 이겨야만 하는 대립항이 된다. 아니, 말은 가짜 적이 되어 카우보이와 함께 ‘서부의’ 연극을 수행한다. 로데오의 장소는 자기 죽음을 외면하는 서부의 시간이 극단적인 오락의 형태로 돌아온 곳처럼 보인다. 로데오 카우보이가 야생마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몇 초는 말하자면 그 환상이 유지되는 짧은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카우보이가 몸을 다쳤다. 몸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로데오 카우보이가 서부의 환상을 구현하거나 그 안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이 <더 라이더>의 시작점이라고 짐작한다. 영화는 로데오 경기장에서 밀려난 그를 서부극의 행위자를 연기하는 장소로 부른다. 그곳은 고전적인 서부극을 지탱하던 장르적인 구조와 질서가 사라지고 다친 카우보이와 거친 말만 남은, 달리 말해, 실은 서부극이 성립되기 어려운 세계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미 사라진 서부의 시간을 영화의 몸으로 환기하며 불러내기 위해서는 로데오라는 환상만큼이나 간절한 환상의 활동이 필요하다. 현실의 로데오 카우보이는 육체적 충돌을 피해야만 그 환상을 유지할 수 있지만, <더 라이더>에서 그 환상은 육체적 충격을 통해서 지연될 수 있다. 그 사실이 이 영화에 고인 슬픔의 기원인 것 같다. 로데오 카우보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경기 장면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찍어둔 영상으로 나올 뿐이다. 그 영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몸은 로데오 쇼에 임할 수 없을 만큼 이미 망가진 상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우리는 그들의 육체적 상흔을 마주한다. 브레디는 머리 한쪽에 붕대를 감은 채 등장해서 붕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박은 철심을 뜯어내는데, 수술 부위엔 피가 맺혀있다. 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손가락에 마비가 와서 말고삐를 제대로 쥐지 못하는 장면들도 종종 보인다. 그를 찾아온 카우보이 친구들은 로데오를 하다 갈비뼈가 부러진 경험이나 뇌진탕이 일어난 순간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고통에 굴복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레인의 모습이 나올 때, 우리는 그 다짐의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고 말도 하지 못하며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생각을 전달한다. 이전 장면에서 친구들은 그의 재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만, 레인의 장면은 그 염원을 아프게 무력화한다. 그러니까 로데오의 활동이 아니라, 그것에 의한 육체적 충격의 결과, 혹은 여전히 진행 중인 충격의 잔상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 카우보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환상을 지탱하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브레디가 데려온 아폴로는 조련을 거부하는 말이었지만, 점차 브레디의 손길에 익숙해진다. 더 이상 로데오 경기에 임할 수 없는 브레디에게 아폴로는 카우보이로서의 마지막 소망이 투영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말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리가 심하게 찢어져 피를 흘리는 상태로 발견된다. 아폴로가 탈출을 시도하다 철창에 다리를 찔린 것으로 생각되나, 영화가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다리를 다친 말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히 상기시키고는 브레디의 아버지로 하여금 총을 쏴 죽이게 한다. 말의 급작스러운 부상과 영화가 멀리서 지켜보는 죽음의 광경은 말의 운명을 극화하며 그것을 서부극의 시간과 풍경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말이 달리며 생성하는 행로가 아니라 말이 쓰러진 자리에 생긴 구멍을 응시한다. 어떤 가치나 사건이 아니라 충돌, 찢김, 구멍이 <로데오 카우보이>의 시간을 버티게 한다. 육체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한계에서 육체성을 체념하지 않기 위해 이 세계는 육체에 충격을 각인하는 방식으로 존립하려 한다. 이를테면 브레디는 로데오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한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레인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그건 회복할 수 없는 몸을 가진 로데오 카우보이가 육체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하고 막다른 방식이다. 로데오에 다시 도전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다음, 브레디는 레인을 찾아가서 그 문신을 보여준다. 그런 브레디에게 레인이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자 브레디는 휠체어 앞에서 레인의 손을 잡고 마치 말의 고삐를 쥐고 로데오 경기를 하는 것처럼 움직여본다. 그 간절한 동작에 담긴 마음을 실현해주듯, 영화는 하얀 말을 타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브레디의 장면으로 전환되며 끝난다. 서로 마주 보며 과거의 육체적 기억을 함께 더듬는 두 남자의 장면에는 로데오 카우보이의 표식들, 이를테면 말도, 안장도, 로데오 경기장도, 무엇보다 육체적 부딪침의 격렬한 현재성도 없다. 오직 두 남자의 부자유한 몸과 서로의 몸을 주시하는 눈빛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과 인간이 공존하며 함께 운동하는 마지막 장면의 서정은 앞선 브레디와 레인의 경직된 몸의 장면이 꾸는 꿈일 것이다. 언젠가 도래할 미래도 실현될 희망도 아니라 불가능한 육체가 접속한 불가능한 환상. 이 끝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그래서 더없이 비통하다.
< 크로노스 >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길예르모 델 토로는 1994년 미국 마이애미 필름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어느 스페인 감독이 언젠가 같이 작품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온다. 그는 이제 막 국제적 거장으로 떠오르고 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델 토로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지는데, 이내 <미믹> 으로 꿈의 무대 할리우드 입성에 성공하지만 촬영 내내 받았던 메이저 스튜디오의 압박과 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고국 멕시코로 돌아오고 만다. 차기작을 준비하며 알모도바르와의 약속을 떠올린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스페인 만화 ‘파라쿠에요스’에 영감을 받아 오랜 기간 준비해온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시키는데, 이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델 토로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그 작품, < 악마의 등뼈 >. 스페인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36년, 부모의 죽음으로 후견인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진 카를로스가 이곳에 출몰하는 유령 산티와 마주치며 그 속에 숨겨진 어둡고 추악한 사건의 진실과 마주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약속대로 제작을 맡아 전폭적인 지원 아래 스페인에서 촬영된다. 잔잔하고 슬픈 호러면서도 공포의 외피를 뒤집어쓴 일종의 소년 성장 드라마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후 델 토로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역시 스페인 내전이 담긴 후속작 아닌 후속작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를 만들어 대구를 이루며 기묘한 균형을 맞췄다. <악마의 등뼈>가 파시즘에 맞선 세력에 대한 강렬하고 적극적인 직유라면, <판의 미로>는 이미 파시즘 치하에 갇힌 이들의 도피와 해방의 염원을 환상적이고도 잔혹한 동화 풍의 은유로 풀어내, 서로 같은 시대상의 아픔과 굴곡을 소년과 소녀의 캐릭터에 대칭 시켜 변주하고 있다. 그런 세계관을 두 작품에 걸쳐 공유하고 완성하는데 무엇보다 큰 힘을 발휘한 건 길예르모 네바로의 눈부신 촬영과 필라르 레부에타의 아름답고 숨 막히는 미술이었지만,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서정적이고도 슬픈 음악 또한 잊어선 섭섭하다. 그전까지 국내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전혀 무명에 가까웠던 하비에르 나바레테는 1956년 스페인 태생에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인물로, 처음에는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이나 가브리엘 브른칙 스타일의 전자음악에 빠져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현대음악에 몰두했으나, 점차 현실과의 격차와 학구적인 분위기에 지쳐 콘서트 작업과 연극무대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가 영화음악을 담당하게 된 건 1987년 아구스티 빌라롱가 감독과 만나면서부터였는데, 이후 호러와 판타지, 스릴러와 SF 등의 자신이 좋아하는 서브컬쳐에 주력하며 착실히 내공을 다져나간다. 그에게서 변화가 감지된 건 데뷔작을 함께 했던 빌라롱가 감독의 2000년 작 <엘 마르>. 전쟁과 고아원,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종교를 오가는 이 심리 드라마에서 나바레테는 그간 자신의 본령과도 같았던 일렉트릭 사운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며 섬세하고 풍부한 화성과 아름답고 애수 어린 선율, 스케일과 다양성을 갖추며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찾아가기 시작한다. 델 토로는 원래 내정돼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음악적 동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스케줄 문제로 하차하자 <악마의 등뼈>와 몇몇 유사한 분위기를 가졌던 <엘 마르>의 음악을 담당한 나바레테를 주저 없이 대타로 뽑아든다. 그리고 그 전략은 아주 주효했다. 사실 <악마의 등뼈>는 이후 델 토로와 작업해 아카데미 음악상에 노미네이트됐던 <판의 미로>나 또 다른 판타지 < 잉크하트 >, 블록버스터 < 타이탄의 분노 > 등과 달리 뚜렷한 주제부를 갖추고 있지도, 또 스케일의 위용을 드러내거나 드라마틱한 서사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의 영화음악과 달리 호러영화 특유의 기능적이고 과시적인 사운드에 집착하지도,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도전 정신과 예술적 자의식에 취하지도 않는다. 마치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처럼 무색무취 투명한 애수를 띈 서정성이 유령처럼 부유하다 사라진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듯 멜로디의 부재가 갖는 나바레테의 서정은 실체 없는 파시즘의 악재처럼 영화 내내 긴장을 선사하고, 죽음을 드리우며, 슬픔을 지배한다. 그 중심을 차지하는 건 묵직한 저음의 현악편성이다. 때론 미니멀하면서도 무조성에 가까운 불협화음과 짧은 오스티나토로 심리적인 압박과 긴장을 담아내는 선율은 고아원 내부에 얽힌 인물들 간의 관계와 비밀을 암시하며 모호하고도 (어찌 보면) 비극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간헐적으로 오보에와 바순 같은 중저음의 목관악기가 쓰이며 위협 앞에 놓인 소년들의 가녀린 처지를 대변하는데, 꺼질 듯 말 듯 서늘하고 침울한 음색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들린다. 피아노와 하프의 차가운 울림은 지하 웅덩이 속에 갇힌 유령 산티의 존재감처럼 희미하게 현악편성에 녹아들지만, 때때로 불쑥 수면 위로 나타나며 명징한 잔상을 남겨 여운에 잠기게 만든다. 영화 후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며 뒤늦게 약동하는 퍼커션과 함께 터져 나오는 풀 관현악의 위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폭탄만큼이나 강력하고 충격적인 사운드 효과로 하비에르 나타레테의 진가를 들려준다. 그 외 영화상에서 쓰인 1930년대 스페인권 노래들이 같이 담겨있는데,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영웅 카를로스 가르델의 노래 2곡과 스페인의 대중적인 악극인 토나디야 가수 라퀠 멜러, 그리고 카멜리아 앰버트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더 잘 알려진 임페리어 아르헨티나가 마눌로 러셀과 부른 듀엣곡 등 5곡이 그것이다. <악마의 등뼈>는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중간 기착지 같은 사운드트랙이다. 이 속에는 그가 오랜 기간 스페인에서 작업했던 초기 일렉트릭 사운드의 모습과 현재 할리우드와 다른 유로권 국가들에서 작업한 큰 프로젝트성 풀 오케스트라의 단초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나바레테는 이 변곡점을 통해 달라졌고, 또 놀라워졌다. 작고 개인적인 영화였지만 길예르모 델토로가 이를 통해 현재 위치에 올랐듯, 국제적으로 무명이었던 스페인의 한 영화음악가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재발견되었다. 그게 바로 이 사운드트랙을 놓쳐선 안 되는 이유다. Track List 1. Que es un fantasma? 2. Un evento terrible 3. Condenado a repetirse 4. Una y otra vez 5. Un instante de dolor 6. Quiza 7. Algo muerto 8. Por momentos vivo aon 9. Un sentimiento 10. Suspendido en el tiempo 11. Una fotografta borrosa 12. Un insecto atrapado en ambar 13. Un fantasma 14. Eso soy yo 15. Besos frtos / Performed by Raquel Meller 16. Una lagrima / Performed by Carlos Gardel 17. Recordar / Performed by Imperio Argentina & Manolo Russell 18. Presumidos / Performed by Carmelita Ambert 19. Yo no se que me han hecho tus ojos / Performed by Carlos Gard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