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
- 감독
- 양승룡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이영, 권수영, 장성광산 및 강원광산 소속 광부들
(사진: " La roue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미처 1분이 넘지 않은 상영시간으로 시작한 영화의 상영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상영시간은 현실적이고 상업적인 이유로 무한정 길어질 수 없었다. 대중들이 스크린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그걸 허락할 수 있는 영화관의 상영시간은 관객의 노동시간과 휴식 사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락의 정치경제학 시간 안에서 (영화 산업연구가 존 벨튼의 표현을 빌리면) 문자 그대로 ‘중층결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배급과 입장료라는 복잡한 계산이 뒤따라오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다른 ‘영화사의 순간’에서 다시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것이다. 상영시간은 야심적인 영화가 영화라는 제도와 전투를 벌여야 하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되었다. 아벨 강스는 < 바퀴 >(1923)의 촬영을 이미 일 년 전에 마쳤다. 그리고 네거티브 필름을 들고 편집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완성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온갖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흉흉한 괴담도 있었다. 1921년이라는 생각을 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편집실을 방문한 이들은 편집본의 일부를 미리 볼 수 있었다. 보고 온 이들은 열광적인 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나쁜 상황을 덮으려는 거짓이라는 소문이 다시 돌았다. 아벨 강스는 소문을 진압하기 위해서 아직도 ‘편집중’이라는 발표를 하는 자리를 가져야 했다. 자신이 편집하는 영화의 제목은 <La roue(바퀴)>이고, 촬영장에서 편집실로 가져온 네거티브 필름은 911,624피트라고 밝혔다. 1,000피트가 15분 분량이니 계산해보시기 바란다. 하지만 이 발표를 한 다음에도 아벨 강스는 1년 반을 더 편집실에 머물렀고, 1923년 2월 17일에야 첫 개봉을 하게 되었다. (역시) 전하는 소문에 따르면 아벨 강스의 편집본은 7시간 30분이(라고 한)다. 다른 소문에 따르면 9시간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32개의 릴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극장상영을 위해서 아벨 강스 자신에 의해서 2시간 30분 ‘단축판’이 완성되었다. 이 판본이 영화사에서 공식 상영본으로 알려졌다가 2008년에 DVD 판본으로 4시간 30분 상영본이 출시되었다. 아쉽지만 <바퀴>의 아벨 강스 편집본은 남아있지 않다. 아벨 강스의 열광적인 탐구자들에 의해 남겨진 필름들을 모아서 아벨 강스의 원래 의도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2019년 프랑스 뤼미에르 영화제에서 아벨 강스의 편집본에 가장 가까운 7시간 ‘복원판’이 상영되었다. 처음부터 위대한 걸작의 반열에 올랐고, 그런 다음에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해서 열광적인 새로운 지지자들을 낳았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사진: "La roue"( 좌 , 우 ), IMDb) 만일 영화를 보기 전에 <바퀴>의 줄거리를 먼저 ‘읽는다면’ 그렇게 훌륭할까, 라는 의심보다 먼저 이렇게까지 긴 상영시간을 어떻게 진행 시켰을지 의아할 것이다.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다. 기관차 운전수 시지프는 사고로부터 어린 고아 노르마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로 입양한다. 시지프에게는 또래 나이의 아들 엘리가 있다. 세월이 흘러 둘 다 어른이 된다. 시지프는 노르마가 자란 모습을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껴 돈 많은 부자 친구 에르산에게 의논을 하지만 노르마를 보고 욕심이 생겨 자신이 가로챈다. 이때 엘리도 자신이 노르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몇 가지 우여곡절 끝에 시지프는 시력을 잃고, 엘리와 에르산은 몽블랑 산벼랑에서 대결을 벌여 죽음을 맞는다. 아들을 잃은 시지프는 노르마에게 화를 내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고 다시 아버지와 딸로 돌아간다. 노르마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지프를 돌보면서 세월을 보낸다. 마을 축제가 있던 날 시지프는 축제에 춤을 추러 간 노르마를 기다리며 숨을 거둔다. 열광적인 찬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조언은 <바퀴>에서 줄거리를 거들떠보지 말라는 것이다. 입체파 화가이자 영화를 제작한 페르낭 레제는 그 찬미자 중의 한 명이다. “영화는 극적인 상태, 감정적인 상태, 조형적인 상태가 있다. (...) 아벨 강스는 <바퀴>로 영화를 조형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라고 예찬했다. 그러면서 “시네마토그래픽한 혁명은 우리가 거의 주시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바로 그걸 <바퀴>가 성취했다고 말했다. 아벨 강스는 <바퀴>의 네거티브와 함께 편집실에서 긴 시간을 보낼만한 가치가 있었다. <바퀴>를 보면 즉각적으로 당신의 눈앞에서 홀린 듯이,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한데, 시각기관을 감전시키는 것처럼 압도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의 리듬이다. 기관차의 속도, 뿜어내는 연기,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이어지는 철도, 철도 옆의 신호판들, 기관차의 바퀴, 달려가는 속도에서 바라보는 풍경, 클로즈업과 롱 쇼트의 거의 무한정한 교차. <바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배우들이 아니라 기관차다. 이 속도의 리듬감에 홀려서 <바퀴>의 화면 구도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달리는 기관차의 바퀴와 그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 인물에 대한 롱 쇼트와 클로즈업 <바퀴>를 보고 열광한 것은 파리의 시네필뿐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의 쿨레쇼프 공장의 학생들, 그중에서도 예이젠슈타인은 < 시월 >(1927)에서 분명히 빠른 교차편집을 (긍정적인 의미로) ‘베꼈다’. 할리우드의 편집실에서도 <바퀴>는 감탄을 자아냈다. 도쿄의 ‘영화광’들은 아낌없이 ‘傑作’이라고 불렀다. 일본 개봉 제목은 <철로의 백장미>였고, 이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불렸다. 좀 더 섬세하게 <바퀴>를 지지한 에밀 뷔이에르모즈는 “흑과 백의 교향곡”이라고 부르면서 “석탄 먼지와 기차 연기의 비극적 어둠으로 시작해서 영원히 쌓인 눈의 순수함과 고통을 달래는 조용함으로 끝난다”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바퀴의 시각적 테마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그리피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아벨 강스가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바퀴>를 지지한 명단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장 콕토와 루이 델뤽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언어의 진화」에서 몽타주의 성공적인 예로 삼았다. 프랑수아 트뤼포도 여기에 가세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포토제닉한 이미지와 몽타주가 운동하는 액션영화라고 불렀다. 내가 <바퀴>를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설명할 만한 비평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영화에서 카메라의 이동 쇼트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를 처음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간절하게 아벨 강스가 편집한 <바퀴>의 첫 번째 판본이 보고 싶다. <바퀴> 중 아이비 클로제(좌)와 가브리엘 드 그라본느(우) (사진: " La roue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우미관은 1912년부터 1959년까지 서울 관철동에 존속했던 영화관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소였다.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와 시바타 미요지(紫田三代治)가 동업하여 1912년 12월 11일 관철동 89번지에 건립한 우미관은 수용 인원 1,000명 규모의 2층 벽돌 건물로,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종로2가 큰길에서 관철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위치했다. 우미관의 설립자 하야시다 긴지로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어용상인이었다. 잡화 판매를 비롯해 석탄 판매업,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일군 대표적인 상업 자본가로 경인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하야시다상점(林田商店)을 경영했다. 한편 동업자 시바타 미요지는 청계천 모전교 부근 무교동에 처음으로 목욕탕을 세운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영위해서였는지, 비슷한 시기 건립된 다른 영화관과 달리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하는데 두 사람은 거부감이 없었다. 1912년 당시 조선인 관객은,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필름을 상영했던 원각사나 유광관(有光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했던 장안사와 같은 연극장에서 특별 프로그램 형태로 활동사진을 접했다. 물론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알려진 경성고등연예관을 통해서도 영화 관람했다. 그러나 경성고등연예관은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함께 받아 민족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당시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하여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 후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짧은 길이의 영화에는 유용했지만 장편영화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영화 중간에 설명하는 중설(中說)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장편영화의 경우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자연스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따라서 1912년 설립된 대정관과 1913년 설립된 황금관은 애초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으며, 1912년 설립된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을 두어 오로지 조선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다. [자료] 우미관 신축 낙성 개관 광고(《조선신문(朝鮮新聞)》, 1912.12.11.) 조선인 극장으로서 우미관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절은 1910년대 중반,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적으로 상영하던 때였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에서 들여오던 생필름의 수입이 중단되고 파테사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수입되던 영화의 수도 현저히 줄면서 필름 가격이 폭등했다. 반면 1915년 미국의 유니버설사가 할리우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인 유니버설시티를 짓고 영화를 양산, 세계 시장을 향해 대규모 수출을 시작했다. 1916년 무렵 영국의 필름 마켓에서는 미국영화가 무려 9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위력을 떨쳤는데, 특히 유니버설의 필름들은 영국의 필름 마켓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태평양 건너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폭풍처럼 미국산 필름의 인기를 몰고 온 것이 바로 ‘시리얼’(serial)이라 불리는 연속영화였다. 연속영화는 주로 모험과 사랑을 소재로 한 액션 영화들을 일컫는데,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영화 흥행의 중심을 차지했던 장르다. 일반적으로 2권 분량의 에피소드가 1편을 이루며 대략 15편으로 완료되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료될 때마다 다음 편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소위 ‘클리프행어 효과’가 관객들로 하여금 상설관을 지속적으로 찾게 만들었다. 조선에 처음 소개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는 1916년 6월 10일 황금관 신축 이전을 기념하여 상영된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프란시스 포드(Francos Ford)가 만든 이 작품은 1915년 일본에서 상영되어 이미 큰 인기를 얻은바, 일년 뒤 조선에 소개될 때는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 말고도 조선인 극장인 우미관에서 상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한편 <명금>을 배급하던 유니버설사는, 1916년 7월 이전에 제작하여 이미 수입업자들에게 판매한 필름들을 제외한 모든 신작 필름에 대하여 유니버설의 일본 법인이라 할 수 있는 하리마(播磨)-유니버설(훗날 유니버설 동경지점)을 통해 임대 계약을 체결한 후에라야 상영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유니버설의 정책이 필름을 판매에서 특약관 임대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조치는 유니버설의 다양한 작품들을 배급할 수 있게 하여 유니버설 영화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료] 우미관이 유니버설사와 특약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의 광고(《매일신보》, 1916.12.17) 장편영화 1편을 상영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의 상설관은 여러 편의 짧은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오늘날의 TV 편성처럼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묶어 3시간 정도 분량이 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었는데, 대정관이나 황금관과 같은 일본인 상설관은 서양영화와 더불어 일본의 구파, 신파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러나 조선인 상설관인 우미관은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고 오로지 서양영화로만 프로그램을 짰기 때문에, 유니버설과 특약관 계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본격 상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이런 이유로 우미관은 1916년 12월 유니버설과 특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유니버설영화를 독점 상영하게 된다. 그 결과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들 외에도 ‘블루 버드’(The Blue Bird)니 ‘레드 페더’(Red Feather)니 하는 브랜드의 장편 영화들이 우미관을 통해 소개될 수 있었다. 우미관에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를 상영하던 즈음 가장 큰 인기를 끈 변사가 서상호였다. 그는 굵다란 목소리로 웅변조의 설명을 했는데, 막간에는 무대에 나와 가랑이 사이에 자전거 클랙슨을 끼우고 ‘뿡뿡’ 소리를 내며 이른바 ‘뿡뿡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한때는 혁신선미단(革新鮮美團)이라는 신파극단에 가입해 신파배우로도 활동했다. 유니버설의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인기를 끌면서 서상호를 위시한 우미관의 변사들이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1918년 이후에는 변사들이 각 상설관의 흥행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서상호 같은 인기 변사는 각 상설관이 주목하는 최고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1910년대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은 1918년 설립된 단성사와 1923년 설립된 조선극장과 경쟁하며 삼파전을 벌이던 중, 1924년 5월 발생한 실화로 건물 전체가 전소된다. 같은 해 12월 신축되기는 하였으나 시설이나 프로그램 경쟁력이 다른 극장들보다 떨어져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파격적으로 전석 10전이라는 싼 관람료를 책정,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에 비해 화장실의 규모가 작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소의 대명사가 된다. 시설이 형편없다 보니, 1943년 조선흥행엽합회가 영화관의 시설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책정된 가격 이하로만 요금을 받기로 했을 때, 우미관은 전체 11개 등급 중에서 6~7급 정도를 받았다. 1~4급까지는 개봉관, 5~10급은 재개봉관, 11급은 문화영화관으로 크게 구분되던 당시의 기준에서, 명치좌와 동보영화극장, 성보영화극장이 1급을 받았으며 동보중앙극장, 희락관, 대륙극장이 5급을, 우미관, 낭화관, 신부관이 6~7급이었다. 서울의 영화관이 1류극장-2류극장-3류극장으로 구분됐 때 우미관은 3류극장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서양영화만 상영하던 우미관이지만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제정된 1934년 이후로는 일본영화를 주로 상영하게 된다.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상설관에 일본영화 의무 상영이 강제되자, 재정이 어렵던 우미관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우미관은 경성촬영소 및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가 맡아 경영했다. 경성촬영소를 설립하여 조선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와케지마는 조선인 상설관 운영도 고려하여 우미관을 임대했는데,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한 <아리랑 고개>(홍개명, 1935) 같은 작품이 우미관에서 개봉되었다. 우미관은 오랫동안 종로의 조선인 흥행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우미관이 건립되자 조선인 관객들은 관철동 골목으로 모여 들었고 미로 같은 관철동 골목은 환락가가 되었다. 1920년대 3류 영화관으로 전락하면서 우미관은 저가의 입장료로 관객을 유인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때도 역시 우미관 주변은 사람들로 넘쳤으며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몰려 있던 그곳은 변사 서상호뿐만 아니라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깡패들 혹은 그들을 소재로 한 활극영화의 주요 무대로도 기억된다. 해방 후, 전쟁 후까지도 관철동 골목을 지키던 우미관은 아쉽게도 1959년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화신백화점 옆에 우미관이란 이름의 영화관이 신축되지만, 새로운 우미관은 1982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역시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구보씨, 우미관 영화 보러 갈래요?」, 『구보학보』 17호, 2017, 9~40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59~171쪽. * [사진](상단). 우미관을 세운 하야시다 긴지로와 그가 경영하던 하야시다 상점의 모습(『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매일신보》, 1916.12.17[사진2 참고] 十二月 十四日 브터 / 特別大寫眞 / 泰西大々活劇 야구이 全五卷 今也 歐洲戰乱 의 結果 日本 에셔 輸入 ᄂᆞᆫ 「 후이룸 」 은 米國 이 獨有 ᄒᆞᆯ 이라 . 此時 ᄅᆞᆷ 當 야 本館 은 米國 에 在 活動寫眞 의 有一無二 大會社 인 「 유니바사루 」 社 ( 資本金 五億萬圓 으로 米國 의 活動寫眞 「 후이룸 」 製造會社 十七社 를 合倂 고 彼 名寶 와 黑箱 等 을 製造 會社) 東洋總代理店 된 東京 「 유니바 - 사루 , 하리마 」 商會 와 早速 히 特約 을 締結 고 本日 로 爲始 야 全部 同社 의 封切 寫眞 을 上場 ᄒᆞᆷ은 他館 에 類例 가 無 고 本館 이 獨有 ᄒᆞᆯ 이오니 此 가 全 혀 觀客 諸賢 의 平素 愛願 야 주신 結果 로셔 其 感謝 ᄒᆞᆷ을 一筆 難記 로소이다 . 仰乞伏望 노니 倍舊 愛護 샤 續 々 來觀之榮 을 賜 심을 伏望々々 나이다 . 謹白 [자료] 《매일신보》, 1943.07.03. 1 級 ( 封切館) 八十錢 으로 / 今日 부터 映畵常設館 入場料 를 引上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이 二 일부터 올낫다 . 조선흥행연합회 ( 朝鮮興行聯合會 ) 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을 올릴려고 당국에 신청 중이든 바 二 일부 관보로써 개정 요금이 고시되엿다 .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안에 잇는 영화관을 최고 一 급으로부터 최저 十一 급 지 구별하야 그 입장 요금도 최고 一 급 八十 전으로부터 대걔 五 전씩 차이를 두고 최저 十一 급 二十五 전 지 현재보다 三 할 三 부가량 빗싸게 결정하엿다 . 一 급 八十 전 / 二 급 七十五 전 / 三 급 七十 전 / 四 급 六十五 전 / 五 급 六十 전 / 六 급 五十五 전 / 七 급 五十 전 / 八 급 四十五 전 / 九 급 三十五 전 / 十 급 三十 전 / 十一 급 二十五 전 그런데 四 급 지는 봉절관 ( 封切館 ) 으로 하고 五 급부터 十 급 지는 재상영 ( 再上映 ) 상설관으로하엿스며 十一 급은 문화영화 『 뉴 - 스 』 영화 등의 상설관으로 하엿다 . 이 『 급 』 을 결정하는 것은 각 도의 사정에 의하야 결정되는 것인데 경성의 예를 들면 명치좌 ( 明治座 ) 동보 ( 東寶 ) 영화극장 , 성보 ( 城寶 ) 영화극장 등은 一 급 ( 八十 전 ) 에 속하고 동보중앙극장 ( 中央劇場 ) 히락관 ( 喜樂館 ) 성남극장 ( 城南劇場 ) 대륙극장 ( 大陸 ) 등은 五 급 ( 六十 전 ) 우미관 ( 優美館 ) 낭화관 ( 浪花館 ) 신부좌 ( 新富座 ) 등은 六 급 내지 七 급에 속한다 . 이번 결정된 요금은 영화를 흥행할 의 요금으로서 최고 요금이므로 영화에 한하여서는 이상은 더 못 밧기로 되엿다 . 입장료에는 세금과 관남료 지 전부 포함되여 잇는데 세금은 전액의 一 활 五 부를 차지하고 잇다 . 즉 八十 전은 그 중 十 전이 세금이고 七十五 전은 九 전 六十五 전은 八 전이 세금인데 『 뉴 - 쓰 』 나 문화영화관의 입장료 ( 二十五 전 ) 에는 세금이 붓지 안는 현역 군인 ( 하사관 이하 ) 과 七 세 이상 十四 세 미만의 소인은 그 입장료의 반액을 밧는다 .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