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의 비밀
- 제작년도
- 2002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1.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가 홍릉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30여 년간 운영해오던 필름 현상 업무를 종료했다. 이를 끝으로 국내의 모든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사실상 한국의 상업적 필름 관련 산업 대부분도 정리되었다. 이제 무비 필름을 현상하고 프린팅 하려면 해외로 보내야만, 무질서하게 흩어진 필름의 은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점점 더 멀리 밀어내고, 디지털 이미지의 매끈하고 평평한 표면만을 우리의 시각 경험 중심에 남겼다. 미디어의 발전은 흔히 필름에서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궤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비디오와 디지털을 먼저 접한 뒤 필름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 적어도 필름은 과거의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였다. 그러나 내가 필름이라는 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 ‘뉴미디어’는 이미 영화산업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었다. 사물의 가치가 경제적 효용성과 합리성을 통해 판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름은 디지털 매체의 편리성과 효율성에 밀려 점차 추방되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효용의 관점에서 퇴보한 기술로 여겨졌던 이 사물을 직접 다뤄 보기 전까지는 필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흔히 필름은 그저 과거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거나, 디지털과 이분화된 대립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이 사라진 매체를 추억할 기억도, 향수에 젖을 과거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매체가 발생시키는 관계 를 통해 필름을 이해하고, 다룬다. 오히려 이런 관계가 미디어가 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대한 기성의 인식을 갱신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투명한 감각>(2022) 독일 하메른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뒷이야기를 다룬 <투명한 감각>(2022)은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필름 애호가들의 실천을 사라진 친구를 기억해 내기 위한 세 사람의 분투로 알레고리화한다. 카메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리를 저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이. 이 세 아이는 피리 소리를 쫓아 사라져 버린 친구들이 남기고 간 사물들을 매개로 그들을 기억해 낸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조각을 덧대고 연결해가면서 서사를 작동시키고자 하는데, 이들이 재연해 낸 서사는 사라진 친구들의 시간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공동의 증언을 통해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여전히 필름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창작하는 방식에 관한 은유로, 이들은 더 이상 산업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장비와 장치를 3D 프린트를 이용해 직접 생산하고, 그것들을 온라인 공간에 올려 자신과 같은 애호가들과 공유한다. 3D 모델링으로 새롭게 고안되어 공유되는 16mm 현상장비 3D 모델링 영사기 부품 중 필름 롤러 (사진: Thingiverse ) <투명한 감각>이 공동의 실천을 통해 과거의 매체를 ‘지금, 여기’로 불러냈다면, <베르팅커>(2022)의 경우 상상력을 통해 실존하는 별자리와 가상의 신화를 연결하여 매체를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베르팅커>(2022) <베르팅커>는 실제 존재하는 별자리 ‘파리자리’에 착안해, 별자리가 된 사물의 삶을 은유한 작업이다. 1603년, 독일의 천구 지도 제작자인 요한 바이어(Johann Bayer)가 만든 천체 지도 ‘우라노메트리아(Uranometria)’에는 51개의 별자리가 표기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파리자리이다. 이 작품은 ‘파리자리’에 대한 가상의 설화를 만들어 필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베르팅커>는 과거에 사물과 장소를 실로 묶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한 적 없는 ‘베르팅커’라는 대상을 상실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디지털로 이미지를 촬영하고, 3D로 이미지를 생성한 뒤 이를 필름에 프린팅하고, 필름 위에 잉크로 직접 드로잉하는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추상화된 이미지는 필름의 물질적 표면 위에 드러나며, 그 후 잉크라는 물질 자체가 필름 표면 위에 새겨지는 화학적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기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제작된 <베르팅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하지 않은 시각적 경험을 제안한다. 2.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경험은 더욱 개별화된 가운데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다. 영화 역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작 과정에서도 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선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이라는 체계는 우리의 선택의 폭을 익숙하고 비슷한 관심사 안에 가두고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역시 정해진 프로그램과 에셋(Asset)의 사용에 의존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는 디지털 기술이 전례 없는 창작의 자유와 효율성으로 모두가 영화를 제작, 배포할 수 있는 민주적 시대를 열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대로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세계가 과연 우리의 경험을 민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확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패터슨>(2016) 영화 < 패터슨 >(짐 자무쉬, 2016)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버스 안에서 만나는 무작위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 또한, 진료 현장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탄생했다. 영화 속 래퍼가 읊조리는 윌리엄스의 시구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는 이러한 ‘직접적 접촉(immediate contact) *주1 ’이 창작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직접적 접촉’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람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해가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접촉을 통해 개별화된 ‘나’ 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이 접촉의 중요성은 비단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데,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 예상치 못한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낯선 이야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 영화는 그런 낯선 접촉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반면 최근 디지털화된 우리의 경험은 점차 통제 가능하고 선택된 것들로 제한되며, 예측 불가능한 접촉에 대한 면역력을 잃어 가는듯하다. 이런 디지털 시대에, 필름 작업은 창작에서의 접촉과 제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필름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퇴역한 군인의 삶, 때로는 사라져 버린 극장의 은퇴한 영사 기사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필름이라는 물질적 저장 매체는 단순 도구를 넘어, 창작자와 물리적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작업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좌) 카메라 관련 장비수리 진영사 / (우) 서울아트시네마 전 영사 기사님의 작업실 또한, 필름의 물리적 특성은 창작에 있어 물리적 제약을 제시한다.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필름의 길이에 의해 제한되며, 이미지를 보기 위해 복잡한 현상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온도와 습도, 스크래치 등 물리적 조건에 민감한 필름은, 디지털 기술에서 간과되는 물질성과의 상호작용을 다시 일깨우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경험이다. 작업 중 만나게 되는 이러한 예상 밖 사람들과 물리적·시간적 제약은 상상력을 요청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했던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상상력은 현실적 제약과 접촉을 토대로 성장하며, 디지털 세계의 무한한 자유만으로는 물질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최근의 작업 <루프>(2024)는 이렇듯 디지털 장치들의 물질적 조건이 신비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 세계는 디지털 매체가 지닌 물질성을 얇은 표면 안으로 숨기고 이음새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마치 그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특징은 디지털 이미지가 무한히 확장 가능하고, 물리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신비화의 전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단편만을 경험하게 한다는 비판 아래, 최근 이미지 지지체들의 얇아진 세계를 열어젖혀 이미지 기기의 기능 중 하나인 반복 재생의 기능을 루프라는 시스템으로 가시화했다. 보다 가볍고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디지털 미디어의 시간에서, 인간의 몸을 비롯해 유한할 수밖에 없는 물질세계와 마주해 보려는 의도로 진행한 작업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디지털을 경유한 필름의 이미지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계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필름 이미징 작업은 단순히 과거 매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주어진 선택지를 활용해 지금의 선택지들을 재평가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필름은 우리에게 ‘관념이 아닌 사물’로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진 제약과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예상치 못한 응답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불편하고 현실적인 제약에 끊임없이 응답해야 하는 접촉과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필름 작업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영화가 가진 힘을 재조명하며, 다양한 존재와 현실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는 상상력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주1. 윌리엄스는 시는 도서관 같은 고독한 공간에서 벼려진 시인의 독특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거의 무시되어온 사물이나 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쓰여져야 한다고 믿었다. (진은영, 김경희,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호,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81쪽.) 윌리엄스가 다루는 대상은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오로지 평범함을 통해서 평범함을 벗어나([the] banal to escape the banal)(SE 236)고자 하였으며, 오로지 상상력을 통한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사소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류기택,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적 상상력과 상대성 이론」. 『영어영문학연구』 41호(1), 32쪽.) 한우리(미술작가) l 물질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포털>(2024), <루프>(2024), <베르팅커>(2022) 등 작업.
짧은 여행의 기록 1-1: 파주행 성공한 사람 곁에는 성공한 사람이나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 모인다. 실패한 사람 곁에는 실패한 사람이나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모인다. 그리고 외톨이 곁에는 외톨이만 모인다. 구분하자면 나는 외톨이에 가깝다, 라는 말로 오한기는 [바게트 소년병]을 시작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따지자면 말이지만. 나는 지금 파주를 향하고 있다. 자유로를 타고, 피치포크 선정 90년대 최고의 노래 250곡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늘 그런 것처럼 내가 가야하는 장소가 파주가 아니라 블레인 카운티라는 가벼운 착각 속에서… (좌: T맵, 우: [GTA5] 맵) 하지만 그곳에는 샌디 해안이 없고, 칠리아드 산이 없다. 보기만 해도 팔이 아픈 것 같은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폭주족들이 모여 사는 트레일러촌도, 깊은 산 속의 컬트 본부도, 마약을 제조하는 버려진 수퍼마켓나 최신형 기관 단총을 등에 매고 자전거를 타는 시골 힙스터들도, 모래 바람 부는 누런 황야도, 회전초도, 야생 늑대도 없다(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마지막 세 개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개쯤 더 있을 수도 있고…). 지금 나는 수상할 정도로 서로 닮은 남자들이 운영하는 집단 농장을 불태우러 가고 있지 않다. 오한기를 만나러 간다. 그러니까 외톨이가 외톨이에게, 그런데 이제 자동소총 대신 바게트빵을 곁들인… 1-2: 메타포 외톨이와 외톨이가 모이면 그들은 여전히 외톨이일까요 외톨이가 아닐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외톨이야+외톨이야=Daridaridara du? 내가 묻자 오한기가 말했다. 정연씨, 좋아보이시네요. 우리는 출판단지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인쇄에 쓰이는 기계들이 전시된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날이 어둑해지도록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서.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실이 아닌 문장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나의 무능과 아직도 오한기의 소설을 영화화 하지 않은 세상의 무능에 대해서… 문득 그런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오한기가 말했다. 영화 < 파주 >에서 서우가 이선균한테 이렇게 묻잖아요.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그러자 이선균은 얼빠진 표정으로 담배를 한모금 피우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 처음엔 멋져 보여서 한 거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 라고요. 나는 물었다. 도대체 그런 대사는 어떻게 외우고 있는 거예요? 언제 봤는데요? 그런 나를 오한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안 봤는데요. 정연씨, 그건 그냥 메타포에요. (상: 서우, 하: 이선균) 1-3: 총 맞은 것처럼 아직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문학동네 편집자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천변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헤르만하우스 옆길로 들어섰다. 심학산 입구쪽으로 올라가는데, 식당이며 커피숍들이 보였다. 어쩐지 엠티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식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이게 오늘의 첫 끼니라는 사실이 떠오르며 미친 듯이 배가 고파졌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당장 먹을 걸 준다면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딴딴딴 따단 따단, 딴딴딴 따단 따단, 리듬에 맞춰서, 배고픈 사람의 춤을, 밤이 깊도록. 춤을 추지 않아도 음식은 나왔고 날은 저물었다. 파스타와 피자를 먹고 카페에 갔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였다. 창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그렇게 사라져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원고를 쓰느라 꼬박 밤을 샜다. 이제 인스타 라이브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일은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모레는 광주에도 가야 하는데.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지만 촬영을 시작하면 늘 긴장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담당자의 시작 신호를 못 알아듣고 몇 분 동안 멀뚱하게 카메라와 아이패드 화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좌: 오한기와 금정연, 우: 장 뤽 고다르) 작가로서 본인의 10년을 되돌아본다면, 어떠세요? 출판사 분들이 쿠팡에서 주문했다는 고소한 빵 냄새가 나는 모형 바게트를 앞에 두고 내가 물었다. 저는 작가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건 진짜 어려운 질문 같은데, 질문을 들으면서 딱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제가 회사에 다닐 땐데, [의인법]을 냈는데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 [의인법]에 대한 이야기가 문예지에 실렸다, 문예지를 보내주겠다, 그래서 저는 어? 문예지를 보내줄 정도면 되게 좋은 이야기가 실렸겠구나. 그래서 기다렸죠. 마침내 와서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진짜 제 소설에 대한 완전한 악평. 두 분이 대담을 하셨는데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제 기억에는 되게 안 좋은 말들, 비판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총 맞은 기분? 그 기억이 자꾸 났어요. 이 질문을 들으면서. 그게 제 작가인생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슬펐다. 라이브가 끝났다. 밤의 자유로를 달려 오한기를 합정에 내려준 다음 나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바게트 소년병]을 펼쳐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었다. 오한기는 이렇게 썼다. 희망을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 비공식적으로는 전 세계 백 등 안에 든다고 확신한다. 착각일까. 언제나처럼, 아마도 그렇겠지? 데뷔할 때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라는 제목의 수상 소감을 썼던 게 기억난다. 수상 소감 속에서 나는 볼링장에서 일하는 포르노 작가였고, 시상식장에서 한 원로 작가에게 수상 소감이 허구여서는 안 된다고 꾸지람을 들었다. 왜 안 될까. 글쎄. 도무지 모르겠네. 2-1: 뉴욕에 간 사나이 오늘의 일정. 일산 집에서 은평 작업실에 간다, 다시 일산으로 돌아와 나윤이와 장모님을 태우고 안산에 간다, 안산에 차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학로로 간다, 대학로에서 일산으로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로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윤이 데리고 소아과 다녀와서 작업실로 운전해서 가는데 정지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이 그날이라 이것저것 이야기도 할겸 미안하고 고마워서 전화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됐고 뉴욕은 어떻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지돈이 대답했다. 여러분이 없는 뉴욕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여기 사람들은 진짜 말이 안 통한다고, 물론 그건 거의 전적으로 제 잘못이겠지만 너무 안 통해… 근데 지돈씨 지금 뒤로 들리는 이게 뉴욕의 소음인가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정지돈이 대답했다. 그렇죠, 들리나요? 뉴욕의 소리가. 근데 지금 길거리는 아니고 카페에 있는데 여기가 무슨 카페냐면 밥 딜런이 단골인 완전 유서 깊은 카페로 여기에 또 누가 단골인줄 알아요? (이하 생략)(이하 생략)(이하 생략)… 나는 지금까지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런저런 영화를 통해 보았고, 음악을 통해 들었으며, 책을 통해 읽었다. 그래서 종종(실은 자주) 뉴욕이 어릴 때 떠나온 옛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끔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우탱 클랜의 [Enter the Wu-Tang(36 Chambers)] 앨범을 들으며 살인적인 주거비용 때문에 직주근접을 이루지 못하고 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뉴욕의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뉴저지 사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but <I’m not there>) 2-2: In Between Dyas 안산에 도착하니 3시 15분이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가? 낮인데도 차가 제법 막혔다. 대학로까지는 딱 두 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다. 아슬아슬했다. 77번 버스 타고 초지역에 갔다. 4호선을 타고 지상구간을 지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도시들, 이미지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음악도 듣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문득 [나의 해방일기] 구씨 생각이 났다.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 건강은 좀 어떤지, 염미정이랑은 잘 만나고 있는지… 언젠가 정지돈은 여행이 좋지만 공항에 가고, 비행기를 타고, 환승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서 여행까지 싫어질 때가 많다고 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아침부터 적지 않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지만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나는 그게 전혀 싫지 않다. 정확히 그 반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진실은 이렇다. 나는 그냥 자동차에 앉은 채로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행복한 순간 은 오직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뿐이다.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만 행복하고, 도착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된다. 어디에 도착하든지 상관없이, 도착하는 순간 나는 불행하다.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장소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오직 떠나 온 장소와 도달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한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이라도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고 [GTA4]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그냥 택시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리버티시티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리버티 시티에서 택시 타기) 2-3: 치질에 대해서 (ㄱ) <스위밍 풀>에서 샬럿 램플링이 했던 말 기억해요? 편집장이 20년 전에 자기를 세뇌시켰던 말이라면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상은 치질 같은 거라고, 모든 작가들이 언젠가는 받게 된다고요. 지돈씨, 네 번째 치질을 축하합니다.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해요? 서울국제도서전에서였잖아요. 지돈씨는 출판사 부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저는 다른 친구와 같이 도서전을 구경하고 있었죠. 그 친구는 지돈씨랑 아는 사이였고요. 아, 네,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던 지돈씨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이 새낀 또 뭐야? 같은 눈빛이었는데. 그날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각자의 일로 돌아갔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요. 제가 지돈씨를 두 번째로 본 건 문지 신인상 시상식 자리였습니다. 예의 친구가 지돈씨에게 초대를 받았다며 저를 불렀는데, 시상식장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인사는 하지 못했어요. 그때 저는 화정동에 있던 영화 창작공간 시나리오작가존에 입주해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자리를 빼야 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가방 가득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지돈씨가 상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시상식이 끝나기 전에 친구와 둘이 그곳을 빠져나왔죠. 그날 지돈씨가 수상 소감을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멋진 재킷을 입고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죠. 준비해온 소감이 있어서 그걸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멋진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물론 지돈씨는 본인의 목소리는 원래 떨린다고 말하겠지만요), 아주 긴 수상 소감을. 저는 지금 지돈씨가 제게 선물한 재킷을 입고 있습니다. 안주머니에는 지돈씨가 쓴 수상 소감도 들어 있고요. A4 6장이면 짧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오늘은 지돈씨의 대리 수상을 하는 자리인만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지돈의 시상식을 최대한 재현하는 것이 오늘 저의 목표입니다. 잘할 수 있을까요? 굳이 잘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벌써 다음 역이 혜화네요.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겠어요. 곧 다시 연락할게요. 안녕! (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 베른하르트가 했던 말 기억해요? 시상식이란, 상이 주는 돈만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역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이런 시청과 강당 안에서 남들이 내게 똥물을 뿌리도록 놓아두었다. 상이란 한 사람에게 똥물을 뿌리는 행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남들이 내 머리 위에 똥물을 뿌리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상금이 지불되니까. 지돈씨, 오늘 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위트 앤 시니컬 2층이었어요. 그 안에서 남들이 내게 똥물을 뿌리도록 놓아두었죠. 심지어 상금도 없이… 지돈씨,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죠? 맹세컨대 시상식이 이런 건줄 알았다면 저는 아무리 지돈씨의 부탁이라도 결코 대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 [더 보기] (좌:정지돈, 우: 신해욱) (다음 회에 계속)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방송에서 죽음을 다루고 싶어요.” 무려 30년 동안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받은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이끈 피클스 아저씨는 갑자기, 주시청자인 아이들에게 ‘죽음’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상해볼까? 색종이 한 장으로 어린 시절을 알록달록 채워준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선생님이 어느날 빨간색 종이를 접어 시체를 만들자고 한다면 그걸 보는 부모와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른 건 몰라도 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끊기질 않을 거다. 어린이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세트장은 검은색보단 핑크색 계열이 어울리고 음악은 돈 얘기나 욕이 들어간 랩보단 동요가 흘러나오는 게 정상으로 보인다. 여기에 기분이 우울해지는 목소리 톤보다는, 듣는 것만으로도 운동장으로 뛰쳐나가야 할 것 같은 뽀미 언니의 하이 레벨 톤도 필수! 귀여운 단발 스타일을 한 피클스 아저씨 역시 노래하는 인형을 통해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어른들에겐 잊고지낸 동심을 찾아준다. 모두가 바라는 그대로… 그런 피클스 아저씨는 어째서 어린이 프로그램의 금기인 ‘죽음’을 다루고자 했던 걸까. 나는 그 점이 흥미로워 <키딩>을 밤새서 보고 말았다. 마지막 화를 막 끝낸 시점에, 난 알아버렸다. ‘죽음’을 다루기 좋은 매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린이 프로그램이라는 걸.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가볍게 <키딩>의 흐름을 살펴보려고 한다. 짐 캐리가 연기하는 피클스 아저씨는 오랜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사랑받아온 TV 프로그램 진행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선한 영향을 끼쳤냐면, 거리에 주차된 차량을 훔친 강도들은 부품 하나하나를 팔려고 하다가 피클스 아저씨의 친구, 우쿨래리(사실은 피클스가 연주하는 악기)를 발견하곤 분해된 차를 재조립해서 그대로 되돌려 놓는다. 강도에게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 선이 ‘피클스 아저씨’인 것. 이렇게만 설명하면, 피클스 아저씨는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지만 그에게도 어른들의 세상이 존재한다. ’인형극장’ 프로덕션 사장이자 피클스의 아버지 셉은 동심을 더 많은 돈으로 바꾸고 싶어하고, 프로그램 밖에서 제프로 살아가는 어른 피클스는 아내와 이혼한 돌싱으로 누구보다 외롭게 홀로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인 ‘피클스’이자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못한 어른 ‘제프’. 동시에 그 둘은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키딩>의 주요 이야기는 그 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물 ‘제프’ ‘피클스’를 따라 진행된다. 그걸 지켜보는 게 이 작품의 묘미. 이쯤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질문. 피클스 아저씨는 왜 ‘죽음’을 다루려고 하는 걸까? 그냥 하던대로 하기만 해도 유명토크쇼에도 출연하고, 피클스 인형도 잘 팔수 있는데 말이다. 원래 어른이 된다는 건 새로운 도전보단 가진 걸 지키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혹시 제프에겐, 반드시 ‘죽음’을 다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게 뭘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주제에 따라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은 방송된다. 오늘 주제는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서 다룬 아름다운 색. 얼마나 지겨웠는지 제프는 아버지 셉에게 “색깔에 관한 방송을 또 해야 해요? 하늘이 파란색인 건 애들도 안다”고 말하지만 1억 1200만 달러짜리 가치를 지닌 피클스 아저씨를 지키기 위해 사장 셉은 제프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네 안에 두 사람이 있어. 한 명은 피클스 아저씨. 다른 한명은 제프야. 별거 중인 남편이자 슬픔에 잠긴 아버지.” 아- 차, 현실을 사는 제프에겐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한 명을 교통 사고로 잃어버린 것. 이 글을 쓰면서도 놀란 건 나조차 죽음을 ‘죽었다’라 표현하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우회해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나름 어른이 된 나조차 죽음은 이토록 어색하다. 그러니, 평생을 아이들과 소통해온 어른 제프에게 죽음은 얼마나 낯설었을까? 게다가 다른 누구의 아이도 아닌 자기 자식의 죽음은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을 서투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프’와 ‘피클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한 아버지가 바로 그 증거. 제프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피클스는 현실의 슬픔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마주할 수가 없다. 그건 거짓말이니까. 거짓말을 하는 어른은 나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 이런 상황에서 제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딱 하나다. 자신의 또다른 분신 ‘피클스 아저씨’를 통해 아이들을 만나 죽음을 설명하는 것. 이제 피클스 아저씨가 굳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죽음’을 다루려고 한 속사정을 알게 됐다. 여기까지만 알고 봐도 <키딩>은 한 인간의 내면을 현실과 방송으로 분열시키고, 다시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보는 이의 마음을 치유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보고 나면, 누구나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제프와 피클스를 연기하는 짐 캐리의 얼굴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엔 끼 많은 배우였지만, 지금은 주름 사이로 이야기까지 담아낼 줄 아는 배우가 되버렸다. 짐 캐리가 연기한 피클스 아저씨 얼굴만 봐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니까. 여기까지 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데, <키딩>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앞서 나는 ‘죽음’을 다루기 좋은 매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했다. 실제로 죽음을 다룬 어린이 프로그램을 본 적은 없기에 부득이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예로 설명해야 함을 이해해주시길. 일단, 죽음이 무엇일까? 파스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죽음에 대해선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이처럼 똑똑한 어른도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죽음’이라는 거다. 그런 ‘죽음’을 도대체 제프는 어떻게 피클스 아저씨로 빙의해서 아이들에게 설명한 걸까? ‘제프’와 ‘피클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그는 급기야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뒤 소아병동에 있는 한 아이를 찾아간다. 뇌종양 수술때문에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낸 아이에게 피클스는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린 두피 표면을 만지게 한다. 보기엔 흉한 것이 만지고 나니 별 게 아니다. 이윽고 수술로 인해 비어버린 자신의 두피를 만지는 아이. 아이는 웃는다. 이처럼, 아이들이 ‘죽음’을 미리 만져볼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다음 피클스 아저씨는 셉에게 말한다. “이번 시즌엔 사라진 것들에 대해 다루려고요. 머리카락처럼요.”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제프는 피클스를 통해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 제프는 사장 셉에게 “우리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지 않으면, 아이들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겼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라는 셈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식을 한순간에 잃은 현실의 제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며 TV 속 피클스로 살고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제프는 죽음을 미리 만져볼 수 없지만, 피클스는 가능하다. 피클스 아저씨는 여러 인형 친구들이 있는데, 그 중하나가 심장을 표현한 쿵쿵이다. 마냥 귀여운 쿵쿵이가 고통스러워하자 피클스 아저씨는 단 번에 그걸 쭈욱 뽑아버린다. 피클스는 쿵쿵이를 만지며 방송을 보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 고통엔 이름이 있어” 이 짧은 순간을 다시 살펴보고 싶다. 심장을 상징하는 쿵쿵이를 뜯어내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 그 ‘죽음’에 동반되는 고통. 피클스는 이젠 멈춰버린 심장을 만지며, 이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려고 한다. 나는 살면서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 않는가. 단지 그걸 표현해도 되는 지 모를 뿐인 거다. 제프가 고통스러운 건 그때문이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도 그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표현하라고 말하는 어른도,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도 많아지면 좋겠다. 밝은 색이 아니라 어두운 색을 칠해도 좋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걸 뒤늦게 알게된 제프가 피클스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애들이.. 심장이 있던 곳에, 느끼는 감정을 표현 못 하는 건 두려운 일이에요” 비록 작품 속 어린이 프로그램이지만, 어른이든 어린이든 집에서 <키딩> 속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봤으면 좋겠다. 단언컨데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용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키딩>은 청소년 관람 불가로 분류됐고 그 말은 아직 피클스 아저씨가 바라는 (아이들에게 ‘죽음’을 소개할 수 있는) 세상은 <키딩>에서도, 현실에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