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솔저:그 두번째 임무
- 감독
- 믹 로저스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장 끌로드 반담, 마이클 제이 화이트, 헤이디 샨쯔, 키아나 톰, 빌 골드버그, 저스틴 라자드, 샌더 버클리
나의 <보이후드>를 떠나보내며 근래 본 영상 중 가장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올해 블리즈컨에서 공개된 <디아블로4>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였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이 영상은 단편영화라 해도 손색없는 완성도로 보는 이를 홀린다. 트레일러는 게임을 위한 일종의 예고 영상이지만 게임 <디아블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상 속 소환된 악마 릴리트의 오싹한 자태를 마주하는 순간 감각적으로 반할 만 하다.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흘낏 향할 때 형용하기 어려운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건 독립된 창작물로 충분히 즐길만한 영상이다. 하지만 <디아블로>의 설정과 사전 정보를 숙지할 때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쾌감을 선사하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단계 나아가 이 영상을 접한 시청자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면 릴리트의 오묘한 눈빛을 계속 떠올리며 또 다른 생생함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본래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목적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디아블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는 9분 20초의 단독작품인 동시에 안팎으로 연결되는 의미망을 통해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슷한 사례를 픽사의 애니메이션 < 업 UP >(피터 닥터, 밥 비터슨, 2009)에서 발견한다. <UP>이 픽사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UP>의 초반 칼의 인생을 압축한 무성 몽타주 시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열 개 남짓한 쇼트로 구성된 이 몽타주 시퀀스의 역할은 이후 전개될 영화를 위해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해주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이 우아한 몽타주 시퀀스는 <UP>의 전체 서사보다 훨씬 격렬하고 효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고전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몽타주 없이 <UP>의 정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칼의 70년 인생을 3분 남짓한 시간에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UP>을 다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완결성을 지닌 짧은 영상들에 감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득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한 편의 영화는 감독에 의해 창조된 고유의 호흡과 리듬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종종 단일영화에 구속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피어오른다. <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이하 <엔드게임>에 별 네 개 반을 준 뒤 한동안 ‘영화 보는 안목이 형편없다’는 쓴 소리에 시달렸다. 별점은 최소한의 가이드라고 생각해온 입장에서 별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비판이 따라올 걸 짐작하면서도 굳이 <엔드게임>에 높은 평가를 남긴 건 일종의 고백이자 포스트 시네마를 향한 탐색 때문이었다. <엔드게임>이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어렵다. 단순히 기계적인 완성도로만 놓고 봐도 전작인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가 좀 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피니티 워>가 발상을 뒤집어 타노스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의 역학관계를 재배치했다면 <엔드게임>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수습하는데 공을 들인다. 전 우주를 무대로 하면서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나가는 방식 역시 <인피니티 워>가 <엔드게임>보다 좀 더 영리하고 실수가 적다. <인피니티 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대단원의 서막답게 이야기의 탁월한 균형 감각이 빛난다. 수많은 캐릭터를 적재적소 배치하는 조율 능력이야 말로 오늘날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완성한 원동력이다. 반면 <엔드게임>은 서사는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나쁘게 보자면 다소 밋밋하다. 우연과 행운이 남발되는 등 이야기의 구멍이 꽤 있는 편이고 토니의 장례식과 캡틴의 은퇴 등 후반부 사족도 적지 않게 늘어진다. 무엇보다 <인피니티 워>가 깔아놓은 무대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놀라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나를 뒤흔든 쪽은 <엔드게임>이었다. <엔드게임>에는 11년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반칙 같은 감동이 있다. 나 역시 개별 영화는 각각의 성취로만 판단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거장의 작품이라고 더 보탤 것도 없고 신인의 영화라고 얕봐서도 안 된다. 영화는 러닝 타임 안에 구축된 독립된 세계이며 온전히 영화 내적인 완성도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만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상영 시간 내내 불쑥불쑥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들이 치고 들어와 마치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 토니 스타크가 아버지를 대면할 때 < 아이언맨3 >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배불뚝이가 된 토르가 과거의 아스가르드로 몰래 잠입할 땐 < 토르: 라그나로크 >는 물론 고전 오페라 같던 < 토르 > 1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 어벤져스 > 1편 시점의 스타크 타워로 잠입해 들어가는 장면은 또 어떤가. 캡틴이 귓속말로 “헤일, 하이드라”라고 속삭이며 < 윈터 솔저 >의 유명한 엘리베이터 씬을 재현할 때의 즐거움을 개별영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엔드게임>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연속극의 최종장에 가깝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11년의 세월동안 개별영화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관을 이어 붙여 거대한 우주를 창조했다. 이건 단순히 설정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차원을 넘어 관객의 시간이 축적되어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은 일견 매우 느슨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별영화로도 충분히 즐길 만 하지만 22편의 경험들이 축적되었을 때 발생하는 쾌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 새로운 종류의 어트렉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혹은 평가 절하 할 수 밖에 없다. <엔드게임>을 철저히 개별영화로 논하자면 무난한 완성도의 기획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3시간의 상영시간이 기계적인 조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 아이리시맨 >(2019)이 비슷한 3시간동안 한 호흡으로 감싸여 있다면, <엔드게임>은 1시간은 분절된 3편의 에피소드가 연속되는 형태다. 첫 1시간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전 우주의 절반이 날아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이 에피소드는 한적한 행성에서 소임을 마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타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지만 상처는 회복할 수 없고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버텨야만 한다. 블록버스터 프렌차이즈 영화에서 이렇게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건 이례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작에서 한껏 끌어올렸던 피날레의 분위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어지는 1시간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오는 미션을 보여주는데 <어벤져스> 초창기의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있는 에피소드다. 무엇보다 이 파트는 11년을 이어온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인상이 강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숨겨진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건 개별영화 바깥으로 체험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단원의 1시간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답게 물량을 쏟아 붓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미리 본 미래의 계획이 발동하여 모든 히어로들이 한 자리에 집결할 때 짜릿한 전율이 관통한다. 이건 <엔드게임>의 피날레가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11년 동안 준비한 피날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난한 완성도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다.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나의 고민과 질문이었다. 다시 돌아가, 명쾌한 답을 낼 순 없었지만 우선 내가 느낀 ‘감정’에 충실하기로 하고 높은 별점을 매겼다. 시간이 지나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 개봉과 함께 마블영화에 점령된 극장가에 일침을 가하며 ‘시네마’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뉴욕타임즈의 기고문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글의 제목은 “왜 마블영화는 시네마가 아닌가”였지만 나는 거꾸로 거기서 마블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말한다. “히치콕 자체가 하나의 프랜차이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우리의 프렌차이즈였다. 새로운 히치콕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였다....(중략) 극장 안에 형성된 관객과 영화 사이의 팽팽한 교감 혹은 화학작용 때문이었고, 이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가히 짜릿했다.” 여기서 ‘히치콕 영화’를 ‘마블 영화’로 바꾸면 이상한 짓일까. <엔드게임>은 21세기의 프렌차이즈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 <엔드게임>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은 극장이란 한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촉수를 넓혀나간다는 점이다. 개별영화가 가지는 팽팽한 교감과 화학반응은 분명 <아이리시맨>과 같은 시네마(좁혀서는 내러티브 영화)에 비해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엔드게임>은 3개의 분리된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조립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리된 에피소드들, 조각난 시퀀스들은 몇 년 전 다른 영화에서 뿌려놓은 떡밥들을 회수하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엔드게임>은 관객의 체험 속에서 <아이언맨>의 특정상황과 연결되고, < 앤트맨 >의 장면들과 이어지며, < 닥터 스트레인지 >의 세계와 겹쳐진다. 요컨대 이것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 극장이라는 밀폐된 시공간으로 볼 땐 느슨하고 조악해보였던 조각들이 11년의 세월동안 뿌려놓은 다른 조각들을 소환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 감상할 수 없다.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12년 동안 촬영한 < 보이후드 >(2014)를 봤을 때 유사한 감흥을 느꼈다. <보이후드>에는 서사의 절정이 없다. 매 순간 진실이 묻어있고 각자의 정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영화다. <보이후드>가 시간을 압축하는 방식을 통해 시간 흐름 자체를 목격할 수 있다면, <엔드게임>은 11년의 체험과 축적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이언맨>의 탄생을 목격한 내가 핑거스냅을 튕기는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를 듣는 다는 건 단순히 한 편의 영화 안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엔드게임>이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싶진 않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미학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른바 세계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니 <엔드게임>은 비록 영화의 껍질, 영화산업의 육체를 빌리고 있지만 이미 ‘(전통적인 개념의) 영화가 아닌 어떤 것’이다. 21세기 프렌차이즈의 결과물을 보며 새로운 종류의 체험이 당도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엔드게임>의 피날레에서 느꼈던 전율은 단지 3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덧 11년의 세월동안 길들여진 끝에 나온 보상이었다. 가치판단을 잠시 미뤄두고 이야기해보자. 이제 영화를 온전히 영화라는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을 갈고 닦아 나가는 시네마들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제 극장의 문이 열려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우주의 탄생 역시 사실 우연이었다. <아이언맨>의 성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끝은 필연과 의지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니 드디어 한편의 영화가 끝이 났다. 물론 또 다른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계속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시 그 세계에 첫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쳤던 2008년 <아이언맨> 이후 11년 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즐거움만큼이나 피로도 안겨주었다. 어쩌면 <엔드게임>을 향한 나의 찬사와 박수에는 이별의 홀가분함도 약간은 묻어 있으리라. 이렇게, 아니 이제야 한 편의 영화를 떠나보낸다.
존 포드가 66세가 되던 해에 만든 < 러틀리지 상사 >는 평자들이 존 포드의 세계를 말할 때 거의 거론되지 않는 영화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실패작으로 생각하며 아직 재평가받을만한 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실패에는 뭔가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짧게 말하려 한다. < 러틀리지 상사 >는 분명히 실패작이다. 물론 포드에게도 실패작 혹은 범작의 목록이 있다. 하지만, 도덕적 감정이 화면의 활력을 억누르거나(< 밀고자 >), 인물들이 이야기에 끌려다니거나(< 모호크족의 북소리 >), 반대로 인물의 과도한 성격 표출이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영광의 길 >), 너무 설명적이어서 밋밋한 산문이 되어버린(< 마지막 함성 >) 영화들과는 다른 의미의 실패가 여기엔 있다. 뭔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혹은 불성실로 인해 엉성해지고 느슨해진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고의로 작품을 파괴하려는 듯한 기괴한 몸짓이 있다. 그 몸짓을 아름답다고도 고결하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그 작가가 파괴와는 정반대의 것을 너무나 능숙하게 해오던 사람이라면, 거기엔 무어라고 단정하기 힘든 어두운 결기가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제9 기병대 소속으로 흑인이지만 ‘탑 솔저’로 불리며 존경받던 러틀리지 상사(우디 스트로드)가 군사 법정에 선다. 부대장을 살해하고 그의 딸을 강간 살해한 혐의다. 러틀리지와 함께 전장을 누빈 젊은 중위 켄트렐(제프리 헌터)이 변호를 맡고, 백인 인종주의자가 검사를 맡은 법정에서 증인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그들의 진술이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범인은 따로 있었음이 밝혀진다. 존 포드의 영화를 봐온 사람들에게라면 이 이야기는 너무 건전해서 놀랄 지경일 것이다. 백인의 인종주의와 몽매한 군중심리를 비판하며,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된 흑백차별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흑인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삼는 모험을 감행했다는 점 등에 주목하면 < 분노의 포도 >(1940) 이후 20년 만에 포드가 진지한 사회성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조너선 로젠봄처럼 명민한 평론가도 이 영화를 인디언을 전면에 내세운 < 샤이엔의 가을 >, 여성이 주인공인 <일곱 여인>과 더불어 만년의 존 포드가 정치적 소수자에 시선을 돌린 영화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와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IMDb 사이트에 오른 이 영화의 평점은 놀랍게도 7.6이다. 우리가 걸작으로 칭송한 < 도망자 >(6.6), < 라이징 오브 더 문 >(6.8)보다 월등히 높다.) 이런 부류의 도덕적 판단에 더 이상 귀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작품의 자질과는 완전히 무관하며, < 아파치 요새 >를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이 포드의 세계에서 고결함과 야만성은 인종이나 젠더와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이미 여러 영화에서 확인해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직업적 감독으로서의 포드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과도한 건전함이나 정치적 올바름이 이 영화의 자기 파괴적 몸짓과 연관돼 있는 건 아닐까라고 추측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법정 스릴러에 서부극, 전쟁물, 로맨스를 뒤섞은 이 영화의 표면적 실패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실패다. 영화의 초반에 이미 우리는 러틀리지가 강간 살해범이 될 수 없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임을 본다. 정답의 반은 이미 처음부터 제시되어 있는 셈이다. 하워드 혹스나 빌리 와일더가 손댔다면 곳곳에 수수께끼와 트릭이 숨겨진 미스터리가 되었을 테지만, 포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중범죄를 다루는 판사들이 법정에서 술 마시고 휴정시간에 도박을 하는 장면들, 그리고 사안의 중대함에 무관심한듯한 가벼운 농담과 유머의 장면들, 그러니까 이제는 포드적 클리셰라고 부를만한 이완과 중지의 장면들이 들어서 있다. 엉성하다기보다는 정교하고픈 의지가 없는 미스터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이다. 러틀리지 변호의 실패가 예상되는 순간, 한 남자가 증인을 자처한다. 그는 인디언에게 피살된 자신의 아들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 번의 신문 끝에 변호인 켄트렐 중위는 바로 그 남자가 범인임을 밝혀낸다. 이 과정이 너무 짧고 너무 갑작스럽다. 남자가 자기 아들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도 갑작스럽지만, 더 갑작스러운 것은 켄트렐의 공격이다. 그는 신문을 하다가 갑자기 남자를 때린다. 치밀한 신문의 자리에 들어선 돌발적 폭력. 이상한 일은 남자가 가격을 당하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백해버린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논리로는 변호인의 폭력으로 인해 증인이 진실이 말하게 된다는 것이지만, 정교한 신문으로 증인을 심리적 궁지에 몰아넣는 치밀한 전개가 여기엔 없으며, 켄트렐의 가격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가혹하지도 않다. 미스터리 영화를 봐온 우리에게 특별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범인이 마침내 밝혀진다는 표준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슬랩스틱에 가까운 켄트렐의 주먹질이다. 이 주먹질은 서사 내적으로는 켄트렐의 분노의 표현이거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술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행위의 돌발성과 우스꽝스러움은 오히려 미스터리 서사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려는 영화 자체의 초서사적 몸짓처럼 보인다. 존 포드가 이런 부류의 장르에 서툰 감독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보다 2년 전 그가 영국에서 만든 <기데온 경감>은 마치 빌리 와일더의 것처럼 보이는 매끈하고 정교한 짜임새의 형사영화였다. 켄트렐의 주먹질 쇼트는 그렇다면 주어진 표준적 서사의 한계 지점에서 펼쳐지는, 우리를 종종 감동시켜온 존 포드 특유의 강한 쇼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이 장면에는 장면들의 연쇄 안에서 그 연쇄의 구속을 초월했던 그 위대한 쇼트들이 지닌 심원한 떨림과 반짝임이 없다. 켄트렐의 주먹질은 그저 이 미스터리 서사의 자기훼손 행위일 뿐이다. 존 포드는 왜 이런 훼손을 태연히 저질렀을까. 자포자기일까, 아니면 (스튜디오에 대한) 모종의 저항일까. 아니면 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한 은밀한 반대의 표현일까. 알 수 없다. 다만 1969년의 한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렇게 말한 적은 있다. “난 거창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주방에서 영화 만들고 싶어.... 옛날 열정은 사라졌어, 그런 거 같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주관적인 동기는 아니다. 켄트렐이 주먹을 휘두를 때, 변호인으로서의 그의 자격과 미스터리로서의 이 영화의 자격, 나아가 작가로서의 포드 자신도 동시에 부정된다. 이 발작적인 부정의 결단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정당화되거나 의미화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자기훼손이 모종의 비극성을 띠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의문을 염두에 두고 다른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러틀리지와 켄트렐, 그리고 그의 부대는 아파치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맞아 전투를 치른다. 이미 체포된 상태인 러틀리지는 돌아가면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망가지 않고 용맹하게 전투에 참여한 뒤 밤을 맞는다. 부대원들은 ‘들소 대장(Captain Buffalo)’의 노래를 부르고 켄트렐은 친절하게도 ‘들소 대장’이 이상적인 군인을 뜻하는 말임을 설명해준다. 노래와 설명이 함께 이뤄지는 동안 카메라는 동상처럼 서서 경계임무를 서고 있는 러틀리지를 부감으로 비춘다. 이 장면이 놀라운 것은, 포드의 세계에서 이처럼 영웅을 노골적으로 찬미하는 장면이 이 영화 전에도 후에도 없기 때문이다. 영웅을 묘사할 때의 전형적인 촬영 각도에다 영웅을 찬미하는 노래, 그리고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까지. 보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로 진부하고 게으른 장면이지만, 아마도 포드 자신이 더 화를 냈을 만한 장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드가 러틀리지라는 영웅을 찬미하기 위해 이 장면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절대 믿을 수 없다. 그가 20대 초반에 만든 데뷔작에서도 이처럼 진부한 장면은 없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서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과도한 진부함에는 포드 자신의 자기 조롱이 있다. 이 장면에서 포드는 마치 이 영화 전체를 진부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봐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상투적인 장면을 만드는 게 필요했을까. 자신이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도 어쩔 수 없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환멸의 다른 표현일까. 아니면 이 역시 자포자기의 선택일까. 이 장면의 자기 조롱에는 또 다른 이상한 점이 있다. 러틀리지는 지금 가만히 서 있다. 그는 지금 경계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지만 여하튼 눈동자 외엔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그를 카메라는 동상처럼 찍고 있다. 혹은 하나의 사진으로 보이도록 찍었다. 포드가 영화사상 인물의 움직임을 가장 아름답게 찍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마치 포드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처럼 찍혀있다. 켄트렐의 주먹질이 미스터리 서사로서의 자기훼손이라면 들판의 러틀리지 장면은 영화로서의 자기훼손처럼 보인다. 좋은 영화를 보기 원한다면 이런 영화까지 챙겨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이런 자기 조롱과 자기부정을 태연히 저지르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대답을 알고 있지 않으며, 그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복잡한 인간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