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깜찍 수호천사
- 감독
- 부치 하트맨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이선호, 위훈, 임유진, 채의진, 홍진욱, 전태열, 윤미나, 이상헌
“영화란 말야…..” < 찬실이는 복도 많지 >( 김초희 , 2019)의 첫 대사는 마치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던진 일생의 프로젝트, “영화란 무엇인가?”(What Is Cinema?)에 대한 거대한 답변으로 시작을 하려는 듯 하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다소 허망한(?) 에피소드들은 영화의 존재론적 사유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찬실이의 일상은 유쾌한 잡담에 가깝다. ‘잡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가 늘상 나누고 공유하는 보편적인 일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살, 찬실이( 강말금 )는 영화 프로듀서다. 맞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극중의 주인집 할머니( 윤여정 )가 그렇듯, “그래서 그게 뭐하는 일인데?”라며 무한반복 같은 질문이 되돌아오는, 그 정체성 제로의 직업말이다. 특히 감독이 갑자기 죽고 나선 더 그러하다. 더 이상 할 일도, 불러주는 사람도 없이 수입이 끊긴 찬실이를 친한 배우 동생, ‘소피’( 윤승아 )는 가사도우미로 고용한다. 아침마다 소피의 술병을 치우는 일에도 보람이 느껴질 무렵, 찬실이는 단편영화 감독이자 소피의 불어 선생, ‘영’( 배유람 )에게 빠져들게 된다. 영을 짝사랑 하면서부터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기가 넘친다. 데면데면하던 주인집 할머니와 우정도 나누고, 수호천사인 장국영( 김영민 )이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 고민도 들어준다. 이 가운데 찬실이는 정말 복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영에게 거절을 당하면서 그녀는 좀 전의 지지리도 ‘없는 삶,’ 즉 갈데도,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복 많은 찬실이는 서서히 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이 ‘없는 것들’ 사이를 뺴곡히 채우고 있는, 수 많은 ‘있는 것들’이다. 삶에 찌들어 미처 들여다 보지 못했던 일상엔 딸이 “꽃 처럼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웃의 아픔이 있고, 발연기로 욕만 얻어먹는 후배의 웃픈 푸념도 있으며, 찬실이의 재기만을 기다리는 동료들의 응원이 있다. 마침내 이 풍성한 찬실이의 일상은 스크린 속 누군가의 그것으로 영화적 환생을 맞는다. 이쯤 되면 정말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난제에 대해 바쟁조차도 만족스러워할 답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란 우리에게 없는 것들, 즉 결핍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비추고 의미를 메기는 일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찬실이의 시나리오 노트가 그녀의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재발견은 영화적 발견임과 동시에 영화의 소임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는 꽤 영리한 방법으로 삶과 영화를 도치시킨다. 이를테면 삶을 영화의 언어로, 영화을 삶의 언어로 말이다. 쥐뿔도 없지만 잘난 척 좀 하고 싶을때는 ‘오즈 야스지로’가, 초라한 서가를 메울 만한 서적으로는 ‘키노’가, 푸념상대가 필요할 땐 난닝구 바람의 ‘장국영’ 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세상 밖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으로 불안과 혼란의 최절정을 지나는 한가운데에 개봉했다. 그럼에도 3월 중순 기준 관객수 만 칠천명을 넘어서며 썰렁한 극장들로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치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주체할수 없을 만큼 웃어보고, 혼잣말을 해 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오즈 야스지로도, 키노도, 장국영도 분명 그것을 가능케한, 반가운 아이콘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영화적인 아이콘은 역시 찬실이를 연기한 강말금 배우다. 그녀의 얼굴에는 우리 모두의 결핍과 바램 그리고 환희가 있다. ‘말금’이라는 이름처럼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일상에 담궜다 빼낸 리트머스 종이같이 분명하고, 즉각적이다. 동시에 간간히 드러나는 그녀의 ‘시네마틱한’ 표정은 이야기의 에너지를 환기하는 유일무이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 즉 영화적이고 세속적인것을 발견하고 조합해낸 김초희 감독의 공이 크다. 2020년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봄 가운데, 그녀의 영화가, 그리고 찬실이가 이 난세를 구하고 있는 중이다.
채플린의 영화는 항상 서글프고 처량 맞았다.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요상한 것 (이를 테면 ‘ 황금광 시대 ’에서의 고무부츠 같은것) 을 우걱우걱 씹어대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결국 그의 이야기는 웃음 뒤로 지긋지긋한 가난과 계급적 불평등을 이고 살았던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역사를 드러냈다. 그의 사회적 일침이 더더욱 드라마틱하고 절실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채플린의 영화들이 언어가 아닌 몸으로 이야기하는 무성이었고 화려함과 꾸미가 빠진 흑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진 건 ‘몸’ 뿐인 노동자들의 설움이 슬랩스틱과 피상의 색(色) 이 빠진 현실의 명암(明暗)만으로 시대의 고통을 공유했다. 고봉수 연출의 < 다영씨 >(2018) 역시 비슷한 화법으로 세상의 고달픔을 나눈다. 색과 언어의 소란함없이 노동의 처절함을, 노동계급의 집단적 서러움을 로맨틱 코미디의 형태로 그린 흑백무성영화, <다영씨>는 2000년대에 재등장한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 영화는 보름달 빵과 바나나 우유를 입에 꾸겨넣고 있는 퀵 서비스기사, ‘민재’의 클로즈 업으로 시작된다. 오토바이 위에 엉거주춤 앉아 빵을 먹고나면 본격적으로 민재의 부역이 시작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빌딩을 등반 하듯 올라갔다 내려오고, 배달 중에 물건을 들고 넘어져 박스 안 상품이 깨지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민재의 일상에선 다반사다. 맨날 먹는 보름달 빵 만큼이나 지겨운 일상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다영씨’에게 온 택배를 배달하는 일이다. 작은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그녀는 밤낮 피곤과 구박에 쩔어있지만 민재가 나타나면 함박미소를 머금는, 그에게는 달콤상큼 귤 같은 존재다. 민재의 착한 동료들은 다영씨 앞으로 온 모든 택배를 민재에게 몰아준다. 그녀에게 택배가 도착할 때 마다 민재는 싱글벙글하며 귤을 챙겨 주머니에 넣는다. 자신의 쑥쓰러운 미소를 들키지 않기위해 헬맷으로 얼굴을 덮고 다영씨 책상에 몰래 귤을 얹어 놓으면 민재의 비밀스러운 임무가 끝난다. 가끔 마법처럼 생겨나는 귤 말고는 다영씨에게도 인생의 낙이 없다. 사무실에는 다영씨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네 명의 찌질한 남자 상사들과 그들을 여왕벌처럼 군림하는 사장의 딸이 있다. 상사들은 시도때도 없이 다영씨에게 커피 심부름과 각종 잡일을 시켜며 그녀의 하루를 지옥으로 만든다. 한편 민재는 다영씨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택배일을 그만두고 그녀의 회사에 입사원서를 낸다. 민재의 낮은 학력과 경력을 비웃던 상사들은 이력서에 쓰여진 그의 희망 월급 ‘50만원’에 눈을 번쩍 뜨고는 그를 고용한다. 민재가 다영씨의 회사로 출근을 시작하면서 택배기사의 삶으로 보여졌던 고단한 노동자의 촌극은 중소기업으로 공간을 이동한다. 비정규직인 다영씨는 정규직 직원들의 회식에 초대를 받지 못하고, 늘 컵라면으로 때우며 야근을 하지만 회사는 계약기간을 늘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웃픈’ 슬랩스틱은 꿋꿋이 이어진다. 코미디의 대부분은 여왕벌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비위를 맞추는 상사들 4인방과 다영씨를 위해 그들을 골탕먹이는 민재의 소소한 복수극으로 채워진다. 궁극적으로 <다영씨>는 노동현장에서 마주하는 비정한 현실을 다루고 있으나 민재의 직업전환으로 인해 대비되는 전반과 중반이후, 즉 노동직과 사무직의 대비를 통해 기업 내에서의 계급구조를 극명히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민재의 짝사랑을 위해 택배기사들이 민재를 도와주고 (동등한 위치에서) 연대하는 반면, 회사의 직원들은 대리, 과장, 부장의 서열을 통해 분리되어있을 뿐 아니라, 이를 지배하는 금수저 출신 사장 딸의 존재를 통해 계급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음을 명시한다. 결국 이 엄청난 서열과 계급의 벽은 다영씨의 수호천사로 회사에 ‘헐값’에 입사했던 민재도 어쩔수 없는 불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결국 민재는 회사를 나와 퀵서비스 기사로 돌아가고 다영씨는 고난 뿐인 그 언덕에 남는다. <다영씨>에는 코미디영화에 있을법할 유쾌한 엔딩이 없다. 커플의 진한 키스신으로 끝나지도 않고 주인공의 팔자 전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퀵서비스 기사로 다시금 나타난 민재와 다영씨의 재회는 절절하게 느껴진다. 러닝타임 60여 분에 담긴 노동자의 고단한 삼라만상 끝에 보여지는 이들의 교감은 분명 로맨스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대와 교감의 온기가 넘치는 이 영화의 엔딩은 참으로 귀한 코미디적 엔딩이자 노동자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엔딩이기도 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란 1965년 디즈니가 테마파크 건설을 위한 플로리다주 올랜도 부동산 매입계획에 붙인 가칭이다. 그렇게 지어진 디즈니월드는 여전히 성업 중이지만 가족 단위 투숙객을 겨냥한 인근 저렴한 모텔들은 2008년 경기침체 이후 극빈층의 임시거주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이라 안정된 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얹혀살거나, 차에서 먹고 자거나, 모텔에 주 단위로 투숙하는 소위 ‘숨은 홈리스’(Hidden Homeless) 현상이다. 숀 베이커 감독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192번 국도 주변 퇴락한 모텔 매직 캐슬을 로케이션으로 삼아, 디즈니 월드 지척에 살면서도 디즈니 월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에 속하는 여섯 살 소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친구들의 여름을 지켜본다. 아직 10대 티를 벗지 못한 엄마 핼리(브리아 비네트)는 하루 38달러의 방값과 다음 끼니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처지다. 그러나 말썽쟁이 무니에게 알록달록한 모텔 동네와 기념품 가게들은 신나는 놀이터고 교육의 부재는 무한한 자유다. 소녀는 관광객에게 잔돈을 얻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 엄마끼리 친구인 아래층 스쿠티(크리스토퍼 리베라), 이웃 퓨처랜드 모텔에 새로 이사 온 잰시(발레리아 코토)와 삼총사를 이룬 무니는 어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부류의 꼬마다. 자동차 창에 침 뱉기 게임을 하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두꺼비 집을 내리고, 일광욕하는 아줌마를 놀리며 뛰어논다. 말할 나위 없이 한 발 떨어져 보면 아이들의 일상은 위험투성이다. 국도에는 자동차가 질주하고, 수풀에서는 악어가 나올지도 모르고, 공사가 중단된 주택단지에선 뭐가 떨어질지 모른다. 수상한 취향의 뜨내기 아저씨가 노는 아이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무니의 매일은 여름 캠프처럼 즐겁지만, 엄마 핼리는 생계를 점점 위험한 방법에 의지하게 되고 이는 여름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보호자들이 돈을 버는 사이 본의 아니게 모텔 아이들의 안위를 챙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매직 캐슬의 관리인 바비(윌렘 데포)다. 관광 모텔이 빈민 레지던스로 변하면서 모텔 매니저인 그는 업무 내역에도 없는 ‘생활주임’ 노릇을 한다. 투숙객들은 그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의지한다. 숀 베이커 감독은 이 사내를 가부장적 시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모텔 주인의 피고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면서도 무니 모녀가 최악의 상태에 떨어질까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바비는 수호천사도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그저 다른 인간의 곤경에 감응하는 인간이다. 모녀를 염려하지만 도울 길이 무망하다는 점에서 그는 관객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는 부산한 일과를 마친 그가 어스름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찾아온다. 바비가 첫 연기를 작은 한숨처럼 내쉬자 모텔 복도 외부 등이 일제히 들어오는 순간은, 이 남자가 ‘매직 캐슬’을 지키는 소박한 마법사임을 말하는 매직 아워다. 바비는 관객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사회 주변부에서 겨우 생존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감독이 택한 윤리적 포지션도 암시한다. 우선 미국 영화에서 거의 재현되지 않는 극빈층 아웃사이더의 삶과 그들의 생활공간, 그들이 매일의 빵을 얻는 지하경제는 숀 베이커 감독이 줄곧 이끌리는 소재다. 2012년 작 < 스탈렛 >은 샌 페르난도 밸리의 백인 포르노 배우가 노년의 여성과 맺는 우정 이야기였고 바로 전작 < 탠저린 >은 매춘으로 먹고사는 트랜스우먼 친구 둘의 크리스마스이브를 그렸다. 이와 같은 소재에 접근하면서 숀 베이커 감독은 외부자로서 취하기 쉬운 분노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내려다보지 않고 옆자리를 지키며 그들의 삶에 내재한 아름다움과 어두움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핍한 삶에서 방점은 궁핍이 아니라 궁핍이라는 조건을 수반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숀 베이커의 영화는 믿는다. 예컨대 < 플로리다 프로젝트 >의 도입부에는 무니가 침을 뱉은 차의 주인이 따지러 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내키지 않는 투로 무니의 손목을 끌고 간 엄마 핼리는 피해자 아주머니와 벌 받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아주머니도 처지가 딱해진 딸 대신 손자를 키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담배를 나눠 피는 두 여자 사이에는 어느새 미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이 아이들을 보라!”는 계고의 메시지와 거리가 멀다. 숀 베이커의 시나리오와 카메라는 가난한 어린이의 가난에 집중하는 대신, 아이를 아이답게 만드는 환희와 활력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의 객관적 궁지도 직시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극 중 개인도 천사와 악마로 만들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절망을 착취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입증한 바 있다. 핼리는 누가 봐도 훌륭한 엄마가 아니다. 부분적으로 무책임하며, 어리석은 선택도 한다.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려고 어린 딸과 함께 호객하고, 매춘을 위한 프로필 사진 촬영을 딸과의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핼리의 행동은 충분히 우려스럽다. 그녀가 딸에게 선물하는 사치는, 좀 더 고급스런 모텔의 아침 뷔페에서 누리는 도둑 포식이다. 숀 베이커 감독은 핼리를 변호하지 않으나 이 캐릭터를 판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핼리를 한심해 하면서도, 이 어린 엄마가 무니에게 최고의 친구이며 무니를 온 세상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사필귀정이라는 안도감과 모녀가 헤어지는 일은 옳지 않다는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영화의 최선은 때로 관객 안에 진정한 갈등을 심는 것이다. 전작 < 탠저린 >을 아이폰 5S로 스크린에 손색없이 아름답게 촬영해 화제를 모았던 숀 베이커는 ‘아이폰 감독’으로 세상에 기억되는 일을 방지라도 하듯 < 플로리다 프로젝트 >를 35밀리 필름으로 찍었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 사일런트 라이트 > <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를 촬영한 알렉시스 사베가 카메라를 담당했다. 실제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프레임은 연보라와 오렌지, 플로리다의 환한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혹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현실의 어둠과 배치되는 컬러의 역설에서 찾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숀 베이커는 그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소의 공기를 주민의 눈으로 포착할 줄 안다. 저예산 영화 다섯 편을 만들며 세트 없이 인물의 생활공간에서 영화적 긴장을 발견해 온 경험은 그의 커다란 자산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많은 숏은 성인의 허리께에 오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순진한 흥분과 거기에 무심한 세상의 압도적 사이즈를 전한다. 그러나 숀 베이커는 특정 스타일에 고착하는 감독은 아니다. 존재감이 엷고 기동성 높은 스마트폰 촬영으로 비전문 배우의 거침없는 연기를 따라잡고 부추겼던 <탠저린>과 대조적으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주의 깊은 블로킹과 프레이밍이 만들어 낸 숏으로 지지된다. 어린 배우들로부터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는 데에 실용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뇌관인 무니 역 브루클린 프린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널리 회자될 터라 여기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공개된 후 프린스와 자주 비교되는 대상은 최연소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됐던 <비스트>(2012)의 크반자네 왈리스인데 왈리스가 아이로서 존재를 그대로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연기를 했다면 브루클린 프린스의 그것은 타고 난 배우의 철저히 리허설 된 연기다. 이런 영악한 속성이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믿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무니라는 소녀의 성격과 조화롭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내 관객을 이끌고 무니의 세상을 기웃거리고 뛰어다니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달리지 않았던 것처럼 달려나간다. 질주인지 비상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미지 앞에 떨면서 나는 딱 한 가지만 잊지 않으려고 했다. 예술이 세계를, 예술가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좋은 방법을 아는 영화를 방금 봤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