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옥: 감금된 소녀들 파트1
- 감독
- 조조 히데오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타치바나 안나, 카타야마 모에미, 와고 신이치, 나고미, 신라 만조, 아나바 료이치, 와다 미사
한 평생 타인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삶이란 어떤 걸까? 그리고 나의 삶을 규정하는 무수한 명명과 논평들을 뚫고 나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어떤 물질적 조건과 태도가 필요할까? 다큐멘터리 < 나와 부엉이 >(박경태, 2003), < 아메리칸 앨리 >(김동령, 2008), < 거미의 땅 >(김동령·박경태, 2012)을 통해 동두천 기지촌 여성의 삶의 서사화와 그 재현 미학을 지속적으로 고민해 온 김동령·박경태 감독의 최신작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2019)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주인공이자 영화 속 판타지 서사의 공동 창작자이기도 한 박인순은 소위 ‘양공주’로 칭해져온 ‘미군 위안부’였다. ‘미군 위안부’의 생애는 전쟁과 탈식민,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과 지역 같은 한국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교차하고, 저간의 소문과 험담, 의회와 법정의 증언록, 뉴스보도, 학술저작, 소설·연극·영화 같은 예술매체 등에서 명명되고 의미지어지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는 동안 정작 당사자들은 각기 다른 서술자들의 관점과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삶이 맞춰 깎여나가고 조형되는 것을 목도해왔다. 이렇게 풀려나온 다수의 이야기들은 ‘미군 위안부’에 대한 정형화된 형상을 반복해온 측면이 있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그러한 이야기들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박인순이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장르와 형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해 나갈 방도를 찾도록 돕는다. 한평생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휘둘려온 박인순은 적어도 죽음만은 자신의 의지와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한다. 사실 ‘미군 위안부’에게 있어 죽음조차도, 특히 비극적인 사건이 된 죽음들은 다른 쟁점을 선동하는 도구가 되거나 자극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박인순은 적어도 죽음의 방식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죽음의 메신저들과 대면한다. 영화는 박인순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화면 사이즈와 내레이터를 바꿔가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해온 화자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그 화자들에는 김동령과 박경태 감독도 포함된다. 두 감독은 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두레방’에서 미술치료에 참가한 모습부터(<나와 부엉이>)부터 매일같이 황량한 산등성이와 동네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미국에 남겨두고 온 딸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낭독하는 풍경까지(<거미의 땅>) 박인순과 20년 가까이 함께 영화작업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자신들의 기존 작업 혹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메타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오프닝에서 박경태 감독은 스스로 다큐멘터리 감독을 연기하며 국가배상소송을 위해 실태조사를 하는 교수(변중희)와 영상촬영을 담당한 신진 미술작가를 박인순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데려가고 엔딩에서는 산을 올라가는 박인순을 뒤따르는 카메라 뒤의 목소리로 두 감독이 등장하며 박인순이 서사를 함께 만들긴 했지만 이 영화 또한 두 감독의 프레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도입부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박감독은 교수와 미술작가와 함께 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며 미군기지가 이전된 이후 수년 동안 마을이 재개발되면서 일어난 변화와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박인순과 그녀의 동료들,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 여자들의 무연고 비석, 산과 들판 등-에 대해 설명한다. ‘뺏벌’이라 불리는 그곳은 ‘배밭’에서 기원했다는 사료가 있지만 또한 여자들 사이에선 “한번 들어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죽어서도 나가지 못하는 곳”이란 의미로 통용되기도 했다. 셋은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당산나무를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 뺏벌을 지켜봐 온 당산나무는 재개발에 뽑혀나가거나 굿이 금지되어 당산나무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해있다. 당산나무는 액자 속의 액자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입구의 표지가 된다. 변교수는 법정증거로 제출할 ‘미군 위안부’의 피해기록을 박인순에게서 얻어내려 하지만 박인순의 구술은 일관성이 없고 시간대가 잘 들어맞지 않으며 이름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한 기록은 제도권에서 인정받기 힘들다. 교수는 기지촌 여성들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제도권 내에서 일하며 사용가능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가르고 걸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시를 준비하는 젊은 미술작가는 어떨까? 박인순의 이야기에 매료된 그는 이후 홀로 뺏벌을 방문한다. 그는 언어대신 사람들이 버리고 간 현장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예술적 질료로 사용하려 한다. 미술작가는 폐허가 된 클럽의 사진을 찍고 버려진 컵, 미러볼, 낙서된 전단지 등의 소품을 전시에 사용할 요량으로 챙긴다. 그는 남아있는 것들에 매혹되지만 정작 그 공간과 소품들의 주인이기도 한 꽃분이의 유령이 나타나자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미술작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보다는 이미지와 소품들을 맥락에서 떼어내 자신의 전시공간에 맞춰 놓으려 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실태조사를 하는 교수, 기지촌 여성에 관심이 있는 미술작가는 모두 좋은 의도를 갖고 있지만, 자기들만의 틀에 박인순을 맞추려 한다.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드는 것에 공조해주던 박인순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자 마침내 직접 스토리텔러로 나서게 된다. 이승에서 배회하는 유령들을 소멸시키고자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자 박인순도 그들도 함께 동네를 배회한다. 박인순은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려져 자기의 이름과 나이도 모른 채 포주인 수양엄마에게 팔려왔다. 클럽에서 일하려면 ‘패스’라 불렸던 보건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주는 동네 죽은 여자의 신분을 사서 박인순에게 줬다. 그녀를 가리키는 이름과 나이 자체가 누군가의 이야기 짓기로 구성된 것이다. 화자의 존재 자체가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지표가 된다. 꽃분이를 비롯한 젊은 여자 유령들은 박인순의 젊은 시절인 동시에 죽은 그녀의 동료들이다. < E.T >, <드라큘라>, < 엑소시스트 >를 좋아한 박인순의 취향에 맞게 장르는 호러와 코믹 판타지를 오고간다. 박인순은 자기 죽음의 서사를 원하는 대로 써내려가고자 한다. 방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감독, 교수, 미술작가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와 저승사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끼어들어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들처럼 논평을 해댄다. 거기에 꽃분이를 찾아온 미군까지 등장한다. 꽃분이와 미군이 ‘윤씨 종친 무덤’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박인순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연극처럼 상연되기도 한다. 박인순은 로맨틱한 구원자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미군의 목을 꽃분이와 함께 잘라 복수를 하고 그의 목을 끌고 직접 저승길로 향한다. 내레이터는 읇조린다. “저승으로 가는 아홉 고개를 넘기 위해 그들은 남편의 살과 뼈를 고아 감쪽같이 먹어치우고 머리만 끌고 가기로 했다. 잘린 머리는 저승의 문지기에게 뇌물로 바치기로 했다. 저승사자는 이 무모하고 자신만만한 여자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인순이와 꽃분이가 비웃음에 굴하지 않으며 아홉 고개를 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레이터는 그 동네를 지켜보던 당산나무일 수도 있다. 기품 있는 옷을 지어 입은 박인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활보하며 저승으로 향한다. 박인순은 시작은 그렇지 못했더라도 결말은 자신의 의지대로 맺고자 한다. 박인순의 이야기는 비참에서 비장으로("그런 이유로 나는 죽음을 비장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증언에서 판타지로, 잔여에서 초월로, 운명의 피해자에서 운명의 대결자로, 치유에서 복수로, 이야기 소재에서 이야기하는 자로, 진부하고 교환가능한 피해자의 이야기에서 단독자 영웅의 극적인 이야기로(“인순은 반복되는 지루한 이야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이동한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그리고 미술, 연극, 영화, 연구조사 등의 미학형식을 오고 간다. 혼란스러운 비연대기적 기억은 환상성 속에서 예민한 실재적 감각으로 살아나며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 가능하도록 만든다. 영화는 더 나아가 기존 페미니즘 미학에서 금기시되어왔던 것을 가시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페미니즘 미학은 잘 들리지 않고 주변화 되어온 존재 양식을 재현하기 위해 유령, 잔여, 지나간 역사, 재현불가능한 트라우마의 미학을 고안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미학적 형식은 반복되면서 때때로 매너리즘에 빠져 그 현존과 물질성이 의도치 않게 지워지기도 했다. 박인순은 여기서 스스로를 통제되지 않고 비규범적이며 제멋대로 구는(unruly) 자신의 신체성을 스펙터클로 내어준다. 카메라는 구석구석 꼼꼼히 씻어 내려가는 목욕하는 나체를 촬영한다. 그 몸은 적당히 살집과 주름이 있어 그 물질성을 묵직하게 감각하게 한다. 성판매를 하며 돈을 벌었던 몸이기도 하다. 박인순의 몸은 단순히 고통과 피해의 증거나 온갖 말들의 전장을 넘어서 팔을 크게 움직이며 동네를 휘젓고 성큼성큼 걸어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고, 목욕하는 몸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신체적 현존이다. 유령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것 혹은 침전 중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령과 저승사자들도 어떤 효과도 없이 뻔뻔하게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이 표현되고 구분 없이 돌아다닌다. 심지어 동네 여자들은 저승사자에게 쫓기는 옛 친구를 숨겨주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미군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윤금이의 살인 현장 사진을 사용한다. 미국의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분노를 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보진영은 한때 윤금이 살인 현장 사진을 공론장에서 사용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진의 사용은 여성의 피해사실을 선정적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2차 가해라고 비판해왔다. 그것은 타당한 비판이었고 페미니스트 예술은 피해 사진을 스펙터클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거꾸로 그 사진을 스크린에 가시화하며 기존의 관점에 도전한다. 여전히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판단에 있어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음에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한국 페미니스트 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사진의 사용은 고통의 전시가 아닌 이미지 정보 과잉의 시대에 거꾸로 그 여성의 고통의 대면과 물질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말에서 박인순은 마침내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저승사자와 대적한다. 신체성의 감각이 첨예화되는 이 장면은 그로테스크와 어이없는 코믹함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촛불이 쭉 늘어선 동굴의 연극적인 미장센을 배경으로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며 “죽어라”라고 명령하는 저승사자에게 박인순은 기합소리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인공적인 기이한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은 시원하게 터트리는 통쾌한 웃음도 아니도 그렇다고 소리 없는 비웃음도 아니다. 출처도 알 수 없고 누구의 것인지도 알기 어려운 웃음,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의문인 웃음이다. 잌히히히, 앜하하—아앜알, 잌히히키키알앜흐으, 으흐크아하하크오호호. 그러자 화면 밖에서 다른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박인순과 윤금이와 그녀의 동료들이 웃고 운다. 그것은 신체들을 깨우는 오염성 짙은 통제할 수 없고 비규범적이며 제멋대로이고 즉흥적인 웃음이다. 으흐흑아하학, 아하하흑, 이이킥이익. 때로는 울음소리, 분노의 비명소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캐스린 로위는 『제멋대로인 여자: 젠더와 웃음의 장르』(1995)에서 뤼스 이리가레이와 엘렌 시수를 경유해 미하엘 바흐친이 그로테스크의 예시로 든 ‘망령 나서 웃고 있는 임신한 노파 조각상’을 재해석한다. 노파는 왜 웃었을까? 로위는 노파는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부적절하게” 노출시켜 “그들 자신을 스스로 스펙터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오래된 금기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 웃음은 소수 집단의 기존 권위와 체제를 향한 분노이다. 그 웃음은 기존의 권위와 체제를 위반하며 공간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점유하고 신체들을 재배치한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때 묻지 않은 웃음이나 남자들에게 반응해주는 수동적인 웃음과는 다르다. 그녀들의 웃음은 “카니발적인 사회적 실천”이며 자기를 향한 응시를 함께 웃을 수 없는 상대방에게 돌려버리는 공격의 웃음이다. 그로테스크한 웃음으로 체제들을 무너트린 박인순에 대해 내레이터는 말한다. “여자는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둠속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고 창녀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아 좋았다. 모두가 거대한 환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도 사람들 중 일부가 된 것 같아 그제야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이야기이자 스펙터클로 만들며 사각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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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도에 데뷔하여 육십여 년을 작가로 활동하신 김지헌(본명 김최연)은 193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 비송리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진남포와 경성을 오가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소개령이 내린 경성을 떠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던 강원도 평창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진1] <만추>(이만희, 1966) 작가 김지헌 [사진2] 김지헌 작가는 시나리오 지망생 시절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최인규를 무작정 찾아가 영화에 대해 물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극영화, <자유만세>(1966)을 연출했다. 최인규 감독은 김지헌 작가에서 숙제를 내줬고 그 숙제는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소학교를 거쳐 명문 진남포공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본인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일본어를 쓰고 말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해방 후 작가와 가족은 서울, 장충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경동공립중학교에 진학했다. 문학과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작가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화가가 되기를 꿈꿨던 작가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가 형님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향 형님의 권유였다. 형님은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권유하였고 작가는 한달음에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시나리오와 영화에 관련된 책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시절 처음 본 책이《키네마 순보》이다. 이 후 작가는 평생 《키네마 순보》를 구독하였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며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에 찾아갔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뒤에야 최인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최인규 감독은 작가에게 한 영화가 몇 개의 커트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의 커트를 세며 보냈고 결국 좋은 영화란 커트를 세기 어려울 만큼 흡인력이 강한 영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가 터득한 결론에 최인규 감독은 관객을, 손님을 절대 놔주지 않는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라며 작가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작가 김지헌은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서라벌예술학교의 전신인 서울예술학원에 입학했다. 1949년에 설립된 서울예술학원에는 이광래, 김진수, 백철, 양주동, 박목월, 서정주, 오영진 등 당대의 문인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가는 학교에서 시나리오 부장을 맡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학교생활도 한국전쟁과 함께 일단락되고 만다. 하지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전쟁 중에 소중한 인연으로 돌아왔다. 9. 28수복 이후 작가는 친우들과 함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논산으로 떠난다. 논산에서 만난 이가 서울예술학원 동문인 시나리오 작가 하유상이다. 하유상의 도움으로 잠시 논산에 머물렀던 작가는 자형을 찾아 광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자형은 이미 광주를 떠난 뒤였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작가에게 도움을 준 이가 문학평론가 장백일이다. 장백일의 도움으로 건강을 추스른 작가 광주 군관학교에서 발행하는 정훈잡지 편집관 모집에 응시하여 편집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면접관이 작가 선우휘이다. 편집관으로 일하면서 작가는 서울에서 피난 온 그리고 광주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들을 따라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시인 서정주와 만난다. 서정주 시인에게 보여준 한 편의 시는 후일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실렸다. 작가의 시 <종 鐘>은 정전 이후 출간된《현대문학》4호(1955년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시로 실렸다. 정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문화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중 작가는《조선일보》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 신설된 것을 알고 오랜 꿈인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기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문학청년의 꿈을 일궈낸 광주로 내려가 응모작을 준비하였던 작가는 스승인 오영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찾았다. 언론계에서 일한 탓에 아는 이가 많은데다가 스승인 유치진과 오영진이 심사위원이라는 것을 알고 예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최종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인 오영진이 당선 후보자의 면모가 궁금하여 작가를 부른 것이다. 오영진 선생은 당선 후보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는 이때 사용한 예명인 ‘김지헌’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사진3] 해방 후 신세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예프로덕션에 김지헌 작가도 참여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포스터이다. 영화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당선과 함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이성구 감독, 이강원 감독, 제작자 전홍식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영화계에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일으켜보자며 의기투합한 이들을 당대의 영화인들은 영화계의 젊은 그룹이라 칭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신예프로덕션의 창립작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평론가 이영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영일은《영화예술》에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의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이제 진짜 영화가 나왔다는 평을 실었다. 영화계 원로들은 이영일의 사무실을 찾아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나친 호평이라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예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언론과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들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진4] 김지헌 작가의 대표작인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 [사진5] 1966년 개봉한 신성일, 문정숙 주연의 <만추>(이만희)의 포스터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볼 수 없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세련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6]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작품 <원점>(1967)의 포스터이다. 설악산 여행을 함께 떠난 이만희 감독과 작가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영화이다. [사진7]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는 작가가 가장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중 하나이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어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진8]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의 포스터 이다.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혜림역은 김혜자가, 신성일이 연기한 훈은 정동환이 맡았다. [사진9] <만추>(이만희, 1966)는 2010년 다시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연출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와 <가족의 탄생>(2006)을 감독한 김태용이 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시애틀로 바뀌었고 혜림 역은 중국배우인 탕웨기가, 훈 역은 현빈이 연기하였다. 김지헌 작가는 4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이 두 감독의 개성과 시대를 잘 담아내었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대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상생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것에 목말라 했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로 인해 고초를 겪을 당시 만났던 동료 재소자를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고 이를 예사로이 넘기 않은 작가가 시나리오 만든 것이 영화 <만추>(이만희, 1966)이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을 누구보다 뛰어난 연출력과 창의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와 쫓기고 있는 남자가 함께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울음이 터졌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스크린 안의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연출이 이만희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만추>(이만희, 1966)의 흥행이후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이만희 감독과 작가는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술잔을 기울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작가는 이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이만희 감독이 1967년에 연출한 <원점>이다. 갑작스런 이만희 감독의 죽음을 작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인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를 영화화 해보고 싶다는 전화통화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만추>(이만희, 1966)는 일본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 約束>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였다. 한국에서도 1981년에는 김수용의 연출로 그리고 2010년에는 김태용의 연출로 다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안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품성이 숨 쉬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태양은 다시 뜬다>(1966)로 제5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만추>(이만희,1966)의 흥행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유현목, 1966)의 대종상 수상까지, 1966년 한 해 동안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일궈냈다. [사진10] 1966년에는 김지헌 작가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만추>(이만희)와 가 개봉하였다. 작가는 <태양은 다시 뜬다>로 제5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사진11] <태양은 다시 뜬다>(1966)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특히, 문예영화 연출에 있어서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1960년대 작품성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두루 발표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작가는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4차 개정 영화법과 시나리오 사전심의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영화계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는 검열로 훼손되기 일 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본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현대물에 대한 검열은 더욱 심해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물 혹은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는 이야기했다. 작가는 1973년 한일합작영화를 준비하였다. 한일 양국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제안하여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을 계획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는 <가야금-겨울의 가락>이다. 하지만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영화의 합작계획은 표류하게 되었다. 작가는 국내영화사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유현목의 연출로 1977년 <문>이란 제목으로 완성되었다. [사진12] 1977년 개봉한 영화 <문>(유현목)은 김지헌 작가가 1973년 한일합작영화로 준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목은 <가야금-겨울의 가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는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 유현목 감독의 연출로 완성되었다. [사진13] 일제말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극장 상영 중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상영이 중지되었다. 후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비로소 본 영화는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였다. 작가는 검열로 다른 작품이 된 영화를 이국 땅에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였다. [사진14] 김지헌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 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영화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작가는 검열로 영화가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1970년 대 후반 영화의 검열은 더욱 엄혹해졌다. <야시>(박남수, 1979)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진15] 김지헌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망명의 늪>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1976년《조선일보》4월 23일자 5면에 「영화시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국산영화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에서 작가는 영화업의 허가제, 우수영화 수입추천제, 시나리오 사전 검열 한국영화의 발전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화인 모두가 공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영화인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두려워했다. 작가는 정부의 영화정책이 궁극에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것이라 예견했고 결국 스크린 위의 검열로 훼손된 영화들을 통해 그 결과가 보여졌다. 작가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발생한 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소환의 이유는 영화 <학사주점>(박종호, 1964) 때문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관련인이 명동에 학사주점을 하였는데 그것이 이유였다. 영화 속 주인공(신성일)이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김승호)를 찾아갔는데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가 “쌀값도 비싼데 왜 벌써 제대를 했느냐” 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에게 쌀값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또 남한이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는 뜻인지, 이는 이적행위라며 작가를 불러간 이들은 추궁했다. 다행히 작가는 풀려났지만 엄혹했던 한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영화가 상영 중에 금지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1977년 작품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은 검열에 합격해 극장에 상영되었으나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사전심의에서부터 불순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기독교 측의 반정부 투쟁이 격렬했고 정부는 이 영화를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상영이 취소되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합격하여 극장 상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미 미국이민을 떠난 뒤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있었지만 작가는 영화가 만들어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검열로 원안과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보는 것은 작가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야시> (박남수, 1979), <망명의 늪> (김수용, 1978) 등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검열의 과정에서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사진16]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김지헌 작가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이민 생활 중에도 쉬지 않았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시나리오 선집은 한일 양국에서 출판되었다. 작가는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1980년 1월 작가는《조선일보》1980년 1월 27일 5면에 「80년대의 한국문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나, (9) 영화 제작-표현의 자유를. 자질 향상 위한 해외연수-기금확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정치권력에게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을 타파하고 발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고 작가는 미국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욕을 거쳐 LA에 정착한 작가는 미주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화를 도모하는 한편 작품 창작도 쉼 없이 하였다. 작가는 각기 활동해 오던 한미영화학회와 미주한국영화인회의를 통합한 미주한국영화인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작가는 감독 홍의봉, 제작자 주동진 등과 함께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영화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오는 한국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영화계와 밀접하게 지냈다. 작가는 1987년 미국에 머물 당시 <별의 유역>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989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이민을 떠난 지 십년 만에 귀국하였다. <별의 유역>은 방대한 스케일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였지만 작품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한일 동시 출간된 이 작품집에는 미발표된 다수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여 시장과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인력들이 영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귀국 후 영화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요동하는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김지헌은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꿈꿨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였던 작가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전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젊은 이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고자 하였던 작가는 영화계의 신진들과 힘을 합쳐 신예 프로덕션을 설립,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을 만들었다. 전후의 영화계에서 새로운 영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한국영화계에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년 간 백 여 편 이상의 영화를 생산해내던 당시의 한국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바람은 기성의 영화인들에게는 불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당대의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음을 앞서 기술한 평론가 이영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대표작으로 <만추>(이만희, 1966)를 꼽았다. 또한 196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 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아졌다. 작가는 유신체제하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는 한편 검열과 싸우며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작가는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1990년대의 한국영화는 사뭇 달라진 환경이었다. 영화사의 설립과 관련한 법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이 되었고 수입자유화와 외화 직배 그리고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영화제작자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영화계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지헌 작가는 1990년 <홀로서는 그날에>(석래명)의 윤색에 이르기까지 60여 편의 각본과 20여 편의 각색과 윤색을 담당하셨다. 1990년 이후로는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오신 김지헌 작가는 2014년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원로영화인 구술사 작업을 마치시면서 좋은 작가란 동시대를 고민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와 60여 년을 동거동락한 작가의 경험이 깊이 새겨진 말이다.
< 독짓는 늙은이 >의 감독으로 알려진 최하원 감독은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전 세대의 감독들과는 달리 일본 문화를 많이 접하지 않고 자라났다. 대신 한국영화와 미국영화, 유럽영화 등을 보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역사소설에서부터 통속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한국적인 것과 인간의 본연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시절 문교부 편수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중앙청 인근으로 이사를 왔고, 당시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던 경무대는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였다. 1950년 농구선수가 되고 싶어 경복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채 코트에 서보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1.4 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피난을 갔다. 폭격으로 폐허가 돼가던 서울과는 달리 제주도는 평화로웠고,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따뜻한 곳이었다. 얼마 후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정해지자 아버지는 최하원 감독만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피난지 경복중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임시로 지어놓은 천막학교에서 공부가 될 리 만무했고, 영화관을 찾아 장 콕도, 빌리 와일러 감독 등의 영화를 보고, 가끔 농구를 하며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해 본격적으로 농구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최하원 감독을 눈여겨본 국어선생님이 글을 써보라 권유했고, 그 말이 동기가 되어 농구부 생활을 접고 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면서 작가와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 문예영화와 함께 시작된 영화 인생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하고 싶어 유학을 꿈꾸던 최하원 감독은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 테아뜨르 리이블과 연희극회에서 연출을 담당하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되는 등 유학을 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고, 대신 신경균 , 이병일 , 이성구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일하며 본격적인 연출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만난 작가 이상현 과 작곡가 최창권 은 영화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감독 데뷔 후 이상현 작가와 함께 한 작품은 없지만 열정 가득한 젊은 영화인으로서 영화의 본질과 비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했다. 또한 작곡가 최창권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 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고,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수렴돼야 한다는 뜻을 공유한 동료로서 최하원 감독이 연출한 영화 대부분의 음악을 담당했다. 군복무 중 <철둑> <무승부> 등의 시나리오로 영화전문잡지인 <씨나리오 문예>에 당선되기도 했던 최하원 감독은 그의 첫 번째 연출작으로 황순원 원작 소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를 연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서울 곳곳에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던 1968년,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후유증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또한 이론으로만 배웠던 몽타주 기법을 사용해 죄책감과 혼돈 속에 있는 주인공 현태의 심리 상태 등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작품은 2014년 4월 구술 인터뷰 당시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2015년 발굴되었고,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친 뒤 곧 일반에게 공개된다. 최하원 감독은 데뷔작을 통해 주목받는 감독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고, 이후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1960~1970년대 활동했던 많은 감독 중 소위 잘나간다는 감독들은 한 해에 5~8편까지 연출할 정도로 당시는 다작의 시대였다. 하지만 최하원 감독은 한 해에 1편 혹은 2편 정도만 연출했다. 당시 외국영화와의 격차를 인지하고 있었던 최하원 감독은 외국영화를 흉내 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정서를 잘 표현해 한국영화만의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재 선정과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작품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나온 두 번째 작품이 < 독짓는 늙은이 >(1969)였다. 첫 작품에서 인간 내면의 혼돈을 표현하기 위해 흑백필름을 선택했다면 두 번째 작품에서는 ‘독’의 기본이 되는 ‘흙’의 느낌을 영화 전체에 흐르게 하려고 카메라에 황토색 필터를 끼우고 촬영했다. 또한 영화의 중심이 되는 송영감의 집(집과 작업장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개울이 흐르는 집)을 표현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결국 세 곳의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것을 이어 붙여 완성했고, 이 작품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끊임없이 관객과 소통하다 이후 최하원 감독은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제와 시각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김동리 의 소설 <무녀도>는 무속과 기독교 간의 대립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영화 < 무녀도 >(1972)에서는 무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어머니 세대와 구세대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고 하는 아들 세대와의 갈등, 한국 여인의 삶에서 늘 동반되는 ‘한(恨)의 문제’를 승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물을 다룰 때에도 이어지는데 < 고백 >(1971)에서는 혼전 성관계 문제를, < 갈매기의 꿈 >에서는 당시 한창 붐이 일던 미국 이민 문제를, < 타인의 숨결 >(1975)에서는 미감아 문제를, < 마지막 포옹 >(1975)에서는 청각장애아들의 모습을, < 황혼 >(1978)에서는 변화된 가족 간의 관계를, < 절정 >(1978)에서는 부부 간의 정절을, < 겨울사랑 >(1980)은 성범죄 문제를 다루고 있어 한국사회에서 문제시되는 이야기들을 영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 출연진이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연습하고 촬영한 < 30일간의 야유회 >(1979)는 당시 들어선 신군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또한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 초대받은 사람들 >(1981), < 초대받은 성웅들 >(1984)로 이어지는 영화들은 이전에 터부시돼왔던 종교영화의 예술성과 흥행성을 입증시키며 한국영화 장르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1984년부터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설립과 함께 교수로 부임해 10여 년 동안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보다 실용적인 이론과 살아 있는 제작교육을 위해 영화 서적을 번역하고, 집필하기도 하면서 한국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