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 감독
- 김기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신성일, 정영숙, 임동진, 김형자, 한소룡, 윤유선, 이재학, 정민섭
<버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해미( 전종서 )는 조금 뜻밖의 말을 한다. 팬터마임으로 눈앞에 없는 귤을 먹던 그는 종수( 유아인 )에게 마임의 원리를 설명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이 말은 < 버닝 >(2018)의 초반부에 불쑥 건네지고 나서 영화 전체를 실종과 부재의 미스터리로 물들인다. 해미는 갑작스럽게 사라지지만 종수는 해미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종수에게 남겨지는 이 말이 뜻밖인 이유는 이창동 영화 속 인물들이 갈구하던 질문과 정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 밀양 >(2007)에서의 신애( 전도연 )의 비명. “신이 어디에 있어요?” < 시 >(2010)에서의 미자( 윤정희 )의 외침. “시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찾아 헤매던 질문들과 다르게, 해미는 세계를 관통하는 자명한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해미의 방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껍질 벗겨진 귤이, 함께 사는 고양이가, 마침내 해미 자신마저도 그곳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다.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 전망대 유리에 햇빛이 반사돼서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곳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만 딱 한 번의 햇빛이 종수의 눈에 보인다. 무언가는 보이지 않고 기억에서 지워진다. 다른 어떤 것은 잊히지 않고 남겨진다. <버닝>이라는 이 거대한 야심의 영화 속 해미의 작은 방이 한국영화 비평을 말하기 위한 실마리일 수 있다면, 비평은 언제나 특정한 좌표 위에 놓인 공간에 거주하는 일이며 그 안에서 잔존하는 것과 지워지는 것들을 오가며 수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찬욱 은 정성일 , 허문영 평론가와 나눈 긴 대담에서 < 박쥐 >(박찬욱, 2009)와 <밀양>과 < 마더 >(봉준호, 2009)의 주인공들이 모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을 겪은 이후로 망각을 선택한다는 공통점을 지적하는 두 평론가의 말에 “이래서 평론가들이 필요한 거구나!”라고 웃으며 반긴다(언급된 영화의 세 연출자는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 <버닝>과 < 기생충 >과 < 헤어질 결심 >으로 다시 한번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공통의 우화를 작성한다). 이 일화엔 영화와 비평,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근접조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농담 섞인 감탄과는 반대로 비평은 망각된 것들을 기억하고 흩어진 기억을 서로 연결하는 일이 아니라 망각 자체에 속하는 일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행위다. 최근 영화잡지 《씨네21》은 잡지의 3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서 2024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화/해외영화 10편의 베스트 목록을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목록의 재생산이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영화문화에 과도하게 채워져 있는 목록과 관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조우가 아니라 사라짐의 체험이고 따라서 비평은 그 사라짐에 관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버닝>은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그리고 한국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관습을 정조준한다. 태양이라는 선명한 광원 아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팬터마임으로. 태양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21세기 한국영화가 설정한 특별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란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의 부작용을 포착해 온 영화적 관찰기의 다른 말이다. 이는 <밀양>과 <버닝>에서 우리가 머무는 세계 안으로 간신히 전해지는 미세한 빛을 프레임에 담아낸 이창동만의 화두는 아니다. 도망칠 수 없는 두 뱀파이어를 태양에 불태워버리는 <박쥐>, 햇빛을 바라보며 시큰거리는 눈에 안약을 넣는 남자의 비극(<헤어질 결심>)과 태양의 과도한 빛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희극(< 어쩔수가없다 >)을 오가며 끊임없이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를 불러들이는 박찬욱의 영화들. 봉준호 의 <마더>는 오후의 도로를 통과하는 관광버스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포착해 그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어두운 실루엣으로 덮어버린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쏟아지는 빛, 어찌할 수 없는 열기. <기생충>은 간신히 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의 어둠에서 통유리로 태양을 반사하는 거대한 저택으로 이동한 뒤 더 아래에 있는 어둠으로 내려간다. 한국영화의 불길을 통과한 뒤 경력을 중단한 장선우 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짧은 단편은 이장호의 영화 제목을 빌린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2019>였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쁨으로 회고하는 대신 검열과 금기라는 역사의 태양을 공격하고 야유한다. 태양 아래 있는 21세기 한국영화는 언제나 한 가지 특별한 장소와 결부되어왔다. 번쩍이는 태양의 가시광선을 피해 시선을 숨길 수 있는 어둠 속의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빛을 피해 숨을 수 있지만 그곳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 눈에 날카롭게 베인 듯한 상처를 입는다. 터널 속에서 영화는 눈빛을 숨기고 시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좌표를 망각한다. 2000년대를 여는 첫 번째 한국영화로 이창동의 < 박하사탕 >(1999)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영화가 새로운 세기 초입에 새겨둔 터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공간과 시간을 이행하는 데는 어둠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무심한 기계장치처럼 역방향으로 터널을 통과해 나간다. 거기엔 숨겨진 빛이 있고 우리는 그 빛을 잊어버린다. 태양이 가려졌으므로, 영화는 세계를 정확히 보는 것에 실패한다.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중 (사진: ㈜이스트필름, ㈜싸이더스, 디씨어터) 21세기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으로 회고되는 2003년에 ‘한국영화’의 외형과 속성을 상징적으로 각인한 두 편의 영화에서 솟아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깊은 어둠으로 인해 보는 것에 실패하는 터널 이미지다. 봉준호의 < 살인의 추억 >(2003)에선 영화의 마지막에 빈 농수로를 보여준다. 전직 형사 박두만( 송강호 )은 과거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시골을 찾아 농수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의 눈앞에 있는 텅 빈 공간은 마치 터널처럼 가을의 태양을 가로막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가 고개를 숙여 농수로 깊숙한 곳에 놓인 여성의 시체를 쳐다볼 때, 어두운 수로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근처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 빛을 반사해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저편에 있던 어둠은 우리가 있던 곳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하여 영화의 결말은 살인 용의자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더 이상 터널을 들여다볼 수 없는, 본다는 것의 실패다. 박두만이 다시 용수로를 찾았을 때, 터널은 어둠으로 닫힌 모든 것이 투명하게 열려 있다. 우리는 그 명확하게 빛나는 어둠 앞에서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다. < 올드보이 >(2003)에서 오늘만 대충 살아간다고 다짐하던 오대수( 최민식 )가 감금된 밀실의 복도는 기나긴 터널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곳의 작은 방 한 칸에 갇혀 있던 이 남자가 15년 만에 석방될 때도 그는 조그마한 상자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실은 풀려나는 시점조차 정확히 통제된 것이므로 제대로 풀려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시간의 터널 속을 맴돌고 있다. 밀실에 되돌아온 오대수는 장도리를 들고 수많은 적을 넘어서 터널을 통과하지만, 그 어떤 것도 통과한 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오대수는 시종일관 태양의 빛과 열기를 피하는 검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영원히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마주하더라도 회피와 망각을 선택하려 든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한국영화가 직면하고 응답했던 이 치명적인 곤경은 이창동의 <시>(2010)에서 시인의 말을 빌려 울려 퍼진다. “틀렸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한국영화비평에 대해 말할 것들이 남았다면, 여기에 제도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는 비판이 아니다.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촉구와 반성 역시 아니다. 그 반대다. 해미의 조언처럼 우리는 여기에 무언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을 잊어버리고,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영화감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을 잊어야 하며,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분류하는 영화제와 개봉 체계의 시각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인식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평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전개해야 한다. 이창동과 박찬욱과 봉준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긴 걸작들로 비루한 목록을 채우는 대신, 변함없는 명사로 자리 잡은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곤경의 장소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을 들여다보는 질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저 걸작으로 남아 있는 영화를 숭배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팬데믹이 초래한 대규모 봉쇄의 기억을 뒤로하고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친 지금 시점에 우리는 한국영화의 ‘장소’가 어디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터널을 지나친 한국영화의 흔적 뒤편에서 우리는 또 어떤 장소를 발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 비평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 하락에 있지도 한국 작가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에 있지도 한국영화 산업의 붕괴에 있지도 않다. 손쉽게 영화산업 일부분에 기생해버린 비평이 한국영화가 곤경을 투사하고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한밤에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에 빗댄 피에르 파울로 파솔리니는 두 가지 종류의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강력한 아버지의 규율과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무기력한 아버지를 마주해야 하는 세대다. 90년대 후반에 촉발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을 공유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단절된 아버지의 강력한 규율에 저항함으로써 그와 연결되려는 절차였다. 지금껏 언급한 한국영화의 ‘걸작’들은 모두 부모가 되는, 혹은 되지 않으려는 방식에 관한 서로 다른 시도들이고 적잖은 이들이 불필요한 결론이라 비판한 바 있던 <기생충>의 에필로그는 그 연대기의 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을 렌즈로 삼아 세계를 인식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들의 아들은 조그마한 렌즈에 눈을 대고 있는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지켜볼 뿐이다. 우리에겐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한국영화’가 보이지 않는다. <기생충> 중 순환어법처럼 들리지만, 한국영화 비평이 성립하기 위해선,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언젠가 특별한 비평의 감각을 자극했던 《씨네21》의 ‘전영객잔’ 코너가 건드린 것은 ‘긴 호흡의 비평이 있어야 한다’라는 하나 마나 한 저널리즘적 진단이 아니라 ‘한국영화에 어떤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라는 특수하고 역사적인 물음이었다. 그 지면에서 다뤄진 것은 넓은 의미의 비평일뿐만 아니라 임권택 , 이만희 , 김기영 , 배창호 , 강우석 , 임상수 , 박찬욱, 홍상수 , 이창동, 봉준호, 그리고 21세기에 새 영화를 만들어낸 한국영화 감독들의 시간에 대한 특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짧은 호기심과 문답의 시간이 지나고 비평은 너무나 쉬운 관성에 안착해버렸다. 투박한 비교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지금 영화를 해설하고 의미를 발굴하는 비평은 한국영화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구현하고 싶었으며 무엇에 실패하고 어떤 곤경을 직면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업무의 한 부분에서 성실하게 문장을 채우고 완성된 결론을 생산할 뿐이다. 다른 지면에 적었던 이들의 운명을 다시 빌려오자면, “비평이 테러리스트 역할을 자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고작해야 제작사와 수입사의 홍보문장을 작성하는 대리인이거나 이름 있는 연출자의 의도를 정제된 언어로 세공하는 복화술사거나 제도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성실한 일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 한국영화에 어떤 곤경의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동시대 한국영화 비평이 영화에 드리운 특수한 곤경에 호기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어쩌면 한국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들조차 그들 자신이 처한 곤경에 응답하지 않는 걸까?). 영화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역량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카메라 바깥에 있다. 한국영화는 그것들이 동시에 거주하는 장소다. 비평가들이 이미 결정된 한국영화의 외형과 위계와 비평의 문법을 잊어버린 채로 영화와 만나지 않는다면,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평가받는 모든 영역에서 빈틈없이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그것이 위태롭고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끝없이 불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는 비평이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 없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 한국영화가 이룩한 제도에서 비평은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무언가 부재한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비평의 역량이 약화되었고, 위대한 작가 감독이 존재하지 않고, 경이로운 영화들이 나오던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사라졌다는 자각. 그 사라짐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를 대상으로 하든 비평의 첫 문장이 작동하기 위해선, 어떤 한 가지 장면과 생각을 영화의 나머지 전체보다 앞서서 서술할 수 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영화의 나머지 전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임의적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영화는 모든 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일을 실천할 뿐이라는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비평은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영화비평을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비평이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그 부재를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극장이 배경이 나오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이 영화들 속엔 극장에 가면 으레 마주하게 되는 것들이 ‘비치’되어 있다. 예컨대 오래 된 얼룩을 머금은 카펫, 늘 같은 옷을 입고 시간을 때우는 우울한 얼굴들, 매대에 쌓여있는 오래된 과자들 등 새로운 것은 ‘1’도 없는 이 극장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아련하고 뭉클하다. 임권택 감독의 < 하류인생 >, 주세페 토르나토르의 < 시네마 천국 >, 임순례 감독의 < 우중산책 > 이 내겐 그런 영화들이었다. 보고있어도 그리운 영화. 그리고 이 리스트에 전지희 연출의 < 국도극장 >이 추가될 것이다. <국도극장>은 을지로에 있던 그 전설의 국도극장과는 아무 상관 없는 또 다른 국도극장의 이야기다. 영화는 주인공 기태( 이동휘 )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자신의 고향, 벌교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고향이라고는 하나, 컴컴한 집에서 기태의 끼니를 챙기는 병든 노모( 신신애 )를 제외하고 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기태는 지인의 소개로 초등학교 동창, 영은( 이상희 )의 뒤를 이어 동네 국도극장에서 잡일을 시작한다. 잡일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이 극장에서 필요한 모든 일이 누군가의 업무로, 역할로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을 모토로 수 십년을 버텼던 이 극장의 직원은 간판쟁이 오씨( 이한위 ), 박기사 그리고 앞으로 ‘매표부’ 외 모든 것을 책임 질 기태가 전부다. 국도극장을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기태에겐 초라하고 구태의연하다. 매점 구석에 놓여있는 고장 난 컴퓨터부터 골방에 앉아 허구헌날 소주와 담배로 시간을 때우는 오씨, 그리고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가물에 콩나기로 오는 관객을 맞는 자신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무기력과 우울함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태에게 서서히 재활의 생기를 불어 넣는 것 역시 이 존재들이다. 어느 때든 서로가 내킬 때, 오씨와 쭈구리고 앉아 담배를 나눠 피는 시간이, 싸구려 비빔밥과 소주 콤보를 사랑하는 영은과의 외식도 기태에겐 기다려지는 일상이 된다. 오씨가 그리는 간판만큼이나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구닥다리 영화들 까지도 말이다. 서울에서 한번도 의미 있지 않았던 것들 혹은 의미 있을 수 없던 것들이 그렇게 영혼의 기력이 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로 떠나는 영은으로 인해 돌아갈 명분이 생겼을 때, 그리고 회사에 다시 다닐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기태는 국도극장에 남기로 한다. 암에 걸린 오씨가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병원으로 떠나야 했을 때도 기태는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 그렇게 국도극장은 기태의, 그리고 앞으로 돌아올 그 누군가의, 터전이 된다. 영화는 ‘아직도’ 극장을 채우고 있는 하릴 없는 ‘로우 라이프(low life)’들의 이야기인 만큼, 특이하지도, 특줄나지도 않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공간의 향수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특히, 배우 이한위의 압도적인 연기는 이 작은 영화의 거대한 스펙타클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호남 사투리는 아마도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등장한 사투리 대사 중 가장 적확한 기능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올곧은 자세와 시선으로 등장하지 않는 그가 보여주는 좁고, 구겨진 뒷모습은 덧 없는 인생의 완전체이자 삼라만상을 품은 인간의 형상이기도 하다. 영화의 또 다른 스펙타클, ‘극장’ 속 공간은 에드워드 하퍼(Edward Hopper)의 ‘밤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다이너(diner)만큼이나 휑 하지만 감독 전지희는 이 공백을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극장의 오브제들로 채운다. 가령 기태가 오씨에게 건네 받는 일반티켓과 조조티켓 뭉치, 나무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좌석 배치도 등 ‘소싯적’ 극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존재들 말이다. 결국 <국도극장>은 소멸위기에 있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존재’의 재발견을 종용한다. 그것은 기태를 통해 재발견되는 인간들, 물체들 뿐 아니라 이 영화가 수고를 들여 비추는 작고 흔한 자연의 존재들 – 예컨대 극장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던 초승달이나, 가을 직전이 되면 고개를 내 빼는 앞 마당의 작은 들꽃 – 의 재발견을 포함한다.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미물(美物)’들을 기특한 눈으로, 애정을 눌러 담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을 ‘발견’한 것은 매우 필연적이고 다행스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햇살에 반짝이는 잔잔한 강물은 무심한 듯 아무 말이 없다. 아이들은 강가 옆 풀밭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맑은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강물 사이로 한가로운 여름날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 뒤로 어린 소녀의 주검이 강물에 흘러 떠내려온다. 그 주검 옆으로 영화의 제목인 < 시 >( 이창동 , 2010)의 필체가 그려진다. 너무나 강렬한 <시>의 첫 장면이다. 소녀의 시체와 <시> 상극인 두 세계의 매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어서 나오는 병원 씬. 의사는 미자에게 “그거 기분 나쁘네요?”라며 반문한다. 일상의 단어들이 종종 생각이 안 나고, 잘 잊어버린다는 말에 감독은 의사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미자의 세계에 기분 나쁜 일 이 펼쳐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시는 아름답다. 글자에서 주는 어감과 은유적 단어들이 주는 창조적 상징들은 아름다우면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미자의 내면과 그녀가 처한 차가운 현실 세계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과연 두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가? 이분법적으로만 구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김용탁 시인은 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본다’ 에 중점을 두며 가르친다. 일상의 모든 것 들에게 마음을 주며 진심으로 대한적이 있냐고, 깊이 들여다 본적이 있냐고, 이제까지 본건 진짜로 본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김용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지나칠 뿐이다. 시를 쓰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그 봐야 하는 대상은 현실의 세계인 있는 일상의 공간뿐이다. 미자는 쓸쓸한 강물, 떨어지는 살구, 들판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지만 매일 하는 설거지 통에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시 낭송회에 갔다가 순수한 시를 읊는 자리에서 저질스런 농담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처음부터 그녀는 시와 일상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것만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손자가 성폭행의 가해자지만 아무일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행동하고, 소녀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냥 밥을 먹고, 별일 없는 것처럼 친구와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고 똑같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지만 미자는 괴로워한다. 소녀가 자살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다리에 올라가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바람결에 모자가 강물에 떠내려가는걸 보고 소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소나기. 시 노트에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어쩌면 소녀의 눈물이 고스란히 미자에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현실에서 소녀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을 쏟고, 깊숙이 들여다봤다. 다른 가해자의 부모나, 슈퍼의 동네 아줌마들이 거들떠 보지 않았던 소녀의 죽음을. 그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진짜로 보는 것, 진짜로 마음을 쏟고,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을 이미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시를 완성한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했지만 그 말을 시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시는 시로써, 일상은 일상으로써 그렇게 그들은 시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경계에 서 있음을 확증하며 그 이면의 다른 것들은 깊숙이 들여다 보지 않았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지만 시를 쓰려는 그 마음을 먹기가 어려운 것처럼. 과연 ‘시’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은유들로 가득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일까? 미자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것과 인간의 추악함이 가득한 일상의 곳곳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혜안의 열쇠일까? 평범한 우리들에게 시가 열리는 그 순간은 올 수 있을까? 미자 역을 맡은 윤정희는 60년대 3대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에 다양한 연기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15년만에 출연을 결심했다던 그녀는 영화에서는 여타 60대 중반의 할머니와는 다른 톤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단 말투와 어감, 옷 입는 차림새, 생각하는 것, 시를 쓰는 것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대 또래와는 다른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미자’라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독특하게 묘사되며 그 캐릭터에 잘 녹아든다. 이제까지 감독의 전작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다른 질감이다. 영화 속 에서의 모습과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독특함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연기를 2시간 내내 보여줬다. 그 특유의 말투에 이질감이나 이상한 부분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특이성이 잘 발현된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 부분이 미자와 잘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이야기 했다. 그녀는 그 힘듦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했지만 가식적인 교회 사람들과. 자신이 불행할거라 단정지으며 불쌍히 보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를 등진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행동으로 모든걸 끝내려 한다. <시>에서는 밀양과는 반대로 가해자 입장에서의 용서를 말한다. 그 용서와 속죄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두 영화 다 ‘용서’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다르다. 밀양은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모습 옆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은은하게 내리쬐는 그 햇볕의 의미는 뭘까? 그래도 세상은 한줄기 희망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뜻일까? 아무런 설명 없이 빛으로 끝나는 이 장면은 깊은 여운을 준다. 그나마 이 빛이 조금이라도 세상 여러 곳곳에 비춰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보인다. <시>는 흐르는 강물위로 미자가 썼던 ‘시’만 나오고.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긴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은 그녀의 자살을 의미하지만 영화 속에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밀양의 희망과 달리 시는 속죄의 의미로 죽음을 택했다.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지..감독의 선택에서 냉혹하리만치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시와 현실이 동일시 된다면 시의 완성으로 그녀는 존재해도 되지 않을까? 육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학교의 교실, 운동장, 과학실, 배드민턴을 쳤던 빌라 앞 마당, 마을버스의 정류장, 피해자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어귀, 소녀가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물 위 다리, 그리고 희진의 미소 띈 얼굴이 보인다. 급격한 파도와 풍랑을 겪은 후 다시 일상의 모습들을 카메라는 천천히 훑는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거나 담소를 나눈다, 강물은 첫 장면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흐른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 이 평온한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흘려 보낸 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미자가 손자를 스스로 경찰에 넘김으로써 영화적 소명을 다 했다. 만약 현실이라면 부모들은 사고를 친 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어떻게든 보호하려 위해 애쓸 것이다. 절대로 먼저 본인들 손으로 경찰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코. 현실에서는 부모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영화 속에서 실현 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실현시키며 관객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들을 본다고 해서 윤리적인 면죄부를 부여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영화들을 보며 과연 내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내 마음가짐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시와 현실의 세계. 나아가서 영화와 현실의 세계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고 더 많은 공감과 이해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지 모르겠다. 그건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