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 은밀한 이야기
- 감독
- 송정규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민우, 안소희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
서지환의 < 저 ㄴ(X)을 어떻게 죽이지 >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궁금한 것은 ‘저 제목을 어떻게 읽느냐’다. 그냥 ‘저 엑스’라고 읽어야 할까. 아니면 X가 검열한 단어를 찾아서 읽어야 할까. 후자를 따른다면 아마도 X가 검열한 단어는 ‘년’일 것 같다. ‘놈’은 아무래도 덜 검열되는 단어이고 다른 비속어 욕들은 두 글자 이상이니까. 영화의 무대는 시골 전원주택. 중년 부부가 애 없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노동으로 돈을 버는 거 같지 않다. 영화 속에서 이들과 함께 사람들은 젊은 고용인 세 명. 여자 둘과 남자 한 명이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에서 격리된 공간에서 옛날 서양 유한계급 사람들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이들이 ‘지나간 시대의 먼 나라’의 특정 계급 사람들이 다른 계급 사람들에게 가졌던 권력을 갈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이 이 역할극 안에서 선을 넘었고 다른 선도 넘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 집에 있는 총기다. 대부분은 서바이벌 게임에서 사용되는 페인트건이다. 하지만 아닌 것도 있다. 그리고 지겨워진 남편은 고용인들에 사냥 게임을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영화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2021년작이다. 그라고 봉준호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왔다. 이 영화가 <기생충>의 자장 밑에서 나왔다고 짐작하는 건 타당하다. 하지만 그만큼 게으른 생각이기도 하다. <기생충>을 염두에 둔 영화라도 장 르누아르의 < 게임의 규칙 >의 영향을 더 받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엔 계급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이 세계 속 갈등은 익숙해보인다. 여자 고용인 1번인 하윤은 새로 들어온 여자고용인 2번인 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윤은 저택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영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렇다면 제목의 ’저 X’는 저 년’이 맞나? 그런데 요새 세상에 이런 제목 트릭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일단 이 영화는 프라이드 영화제 상영작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역학 관계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반영한 것 같은 그림을 그리다가 중반 이후에 뒤집는다. 그 뒤집음은 비교적 상식적인 생각에 기반을 둔다. 젊은 고용인에 대한 중년남자 상사의 치근거림은 불쾌한 성희롱이다. 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옆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바라 보는 사람이 성희롱 당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불쾌함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걸 지켜보는 사람, 그러니까 하윤이 성희롱을 당하는 사람, 그러니까 지영을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친다. 이렇게 하면 진부해보였던 하윤의 행동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다. 여기에는 다른 기능이 있는데, 지금까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남편의 위치를 사정없이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성애자 남자의 권력은 하윤이 지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겠다고 생각한 뒤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보니 남자의 권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앞에서 나는 이 남자가 어떤 노동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남자의 사회적 기능이나 가치가 시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에서 격리된 이 세계에서 남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여기에 대해 깊이 고민할 사람이 별로, 또는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발랄한 코미디지만 누군가에겐 정말로 무섭게 보일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단편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출연한 신인이나 무명배우들이 발표 이후 주목받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윤역의 하윤경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봄날의 햇살이고 곧 부산에서 공개될 < 딸에 대하여 >(편집자 주: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공개되었다) 영화판의 레인이다. 지영역의 방효린은 < 지옥만세 >의 선우이고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에 캐스팅되었다. 두 배우의 경력이 이후에도 여성간의 관계 또는 퀴어의 주제를 품고 있다는 건 흥미롭다. 심지어 방효린은 <지옥만세> 개봉 이전인 ‘썸머 프라이드 시네마 2022‘에 이미 방효린 특별전이 가능할 정도로 꾸준히 퀴어 주제 단편들을 찍어왔다는 정보를 덧붙이고 싶다.
유튜브는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의 일상 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KBS와 MBC가 이미 있었던 것처럼, 1991년 개국한 SBS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유튜브도 이미 그런 느낌이다. 레거시 미디어의 전형성을 타파하는 어쩌구 그런 분석들도, 초등학생 장래희망의 상위권에 ‘유튜버’가 자리하는 것도 이제는 다 원래 그랬던 것 같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카페에서도 사람들은 유튜브를 본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취향이 달라 열성적으로 유튜브를 시청하는 사람이라도 ‘유명 유튜버’라는 사람을 전혀 모를 수 있고, 해외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 구독차 천만명이 넘어도 국내에서는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다. 누구든, 어떤 취향을 가졌든 재미를 느낄만한 크리에이터가 무조건 하나는 있는 플랫폼. 현재로선 그게 유튜브가 가지는 소비재로써의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한 유튜버의 이야기기다. 유망한 아역 배우로 시작해 < 올드보이 >의 어린 오대수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전직 배우 오태경. 재기를 꿈꾸며 시작한 유튜브는 리틀 오대수 TV! (줄여서 리오) ‘구독자의 노예’를 자칭하며 일종의 해결사 혹은 대신맨 컨텐츠를 진행한다. 우리 학교 일진 혼내주세요, 폐가에 가주세요, 치과 치료 받고 아픈지 얘기해주세요 같은 것들로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을 때 ‘광화문에 1인 시위 중인 피켓남의 사연을 알아봐주세요’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다소 시시하다는 생각으로 패스하려던 찰나 구독자는 10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걸게 되고 태경은 피켓남을 만나러가게 된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피켓남.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끝에, 우연히 여동생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시위의 이유를 듣게 되는데, 성추행 무고로 억울하게 유죄를 받은 피해자라는 것.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리틀 오대수TV는 떡상하게 되고 피켓남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는 과정은 모두 유튜브를 통해 중계 되면서 정의의 사도가 된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점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사이버 렉카’라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면 누구보다 빠르게 가지고 와서 자극적인 컨텐츠로 가공해 업로드하고 조회수를 확보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멸칭이다. 왜 멸칭이냐. 이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사건들의 진위여부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남들보다 빨리 영상 만들고 조회수를 먹어야 유튜브의 무한경쟁시스템에서 관심을 얻을 수 있다. 이 세계에서 관심은 곧 돈이다. 사건을 파악하고, 다른 뉴스나 정황을 통해 진실을 검토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사이버 렉카들에게 이건 알바가 아니다. 그 시간에 하나 더 만들어 올리는게 남는 장사다. 이 시장에 진출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님 말고’. 만약 자신이 다룬 사건이 거짓이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라면 본인이 그 뉴스를 접한 창구를 핑계 대며 슬쩍 빠져나가거나, 만약 생각보다 일이 커진다면 검은 화면에 하얀 글씨로 ‘죄송합니다.’ 라고 쓴 썸네일이 달린 사과 영상을 올리고 몇 달 푹 쉬다가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렇게 편한 돈벌이가 있나? 이 정도만 되어도 최악까지는 아니다. 더한 경우는 의도적으로 사건을 왜곡하고 좌표를 찍으며 구독자들을 선동한다. 이 분야의 이 바닥의 레전드들은 최악의 ‘혐오의 엔터테이너’로써 굵직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확실한 증거와 공들인 취재로 지금 바닥까지 신뢰도가 떨어진 기존 언론을 대체하려는, 책임감 있는 렉카들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유튜브의 ‘인기 동영상’ 같은데서 뉴스를 접한다면, 아마 그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거짓일 것이라고 확신에 가깝게 말할 수 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내용에 대해 길게 말은 하지 못했지만, < 좋.댓.구 >는 대 유튜브 시대에 반드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할 부분을 생각보다 따끔하게 꼬집고 있다. 스크린라이프(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에서 구현되는 화면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는 영화들이 제법 선보였다. 생각나는 것만 나열하면 < 서치 >, <언프렌디드>, < 라방 > 등이 있겠다. 그때마다 호불호는 늘 갈렸다. 내러티브와 착 붙어 아주 잘 활용 된 경우도 있었고 괜히 정신만 없어져서 이야기를 파악하기 되려 더 어렵게 만들기만 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었다. <좋.댓.구>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없음이나 답답함이 없다. 그냥 유튜브를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편안할 것인데 감독은 그 점을 고려해 UI부터 구독자의 닉네임, 댓글 내용까지 실제같이 보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구성하느라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이런 부분이 일반적인 극영화에서는 어색할 수 있는 전환을 부드럽게 만들고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재미들을 투입시키기에 적절했다. 아마도 영화의 시점에 해당하는 사람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중간 중간 다양한 광고가 등장하는데, 엥 여기에 저 사람이 왜 나와? 싶은 사람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등장해 툭 툭 지나가며 재미를 준다. 문소리, 박현빈, 신동엽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무엇보다 박찬욱 감독의 등장이 감동을 준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태경 배우가 특별출연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었다고 하는데 오래전 함께 일했으나 이제는 위치가 달라진 상황에서, 말하는 사람은 어려워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고 받아주는 사람은 반갑기도 하고 약간은 안쓰럽지도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잘된 쪽이 오죽 잘됐어야지...) 괜히 코를 한 번 훔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올드보이>의 복도 장도리 씬을 패러디 한 중학교에서의 복도 뿅망치 씬을 보며 많이 웃었는데 오태경이 오태경을 연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자 재미였다. 평생을 <올드보이>의 그늘 안에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장면은 정작 자신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렇게나마 원을 풀지 않았을까? <좋.댓.구>는 < 곤지암 >에 공동각본으로 참여했던 박상민 감독의 데뷔작이다. 2023년 7월 12일 개봉작이니 (글 작성일 8월 8일 기준) 공개된지 한 달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KOBIS를 뒤져보니 개봉 당일 전국 146개 스크린에서 186회를 상영했는데, 딱 열흘째되는 21일에는 전국 10개의 스크린에서 10회 상영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많은 관객이 봤을 리가 없는데, 총 관객수는 13,195명으로 마무리 된 듯 하다. (게시일 기준 전국 누적관객수는 13,376명)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크린라이프 형식으로 만들어진 본 작품은 특히 유튜브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유튜브 컨텐츠들에 대한 풍자 혹은 경고 그것도 아니면 넝~담~을 펼쳐 내는데, 이게 썩 그럴싸하고 재미가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네이버 별점이나 영화를 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평들이 상당히 준수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역주행도 노려봄직 한데, 극장에서 볼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 크다. 네이버, 웨이브, 티빙 등에서 볼 수 있지만 아직 추가 요금을 결제해야 한다. 영화가 괜찮은만큼, 조만간 더 편하게 OTT로 보게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