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지
- 감독
- 이자벨 코이셋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벤 킹슬리, 페넬로페 크루즈, 패트리샤 크락슨, 데니스 호퍼
대중가요와 영화, 쌍끌이 부흥기의 음악영화 한형모 감독의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1966)는 제목과 감독, 제작연도만으로도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세 가지가 주목할 만한 중요 키워드인 셈이다. 첫 키워드는 워커힐이다. 1963년에 개장한 호텔인 워커힐은, 주한미군을 비롯한 외국인을 위한 호텔로 만들어진 시설로 1973년에 선경(현 SK)이 인수하기 전까지 국제관광공사 소유였다. 미8군 사령관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의 이름을 딴 것이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선호텔·반도호텔 등과 달리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 광나루 언덕에 지어진 것, 1968년 카지노장까지 개장한 것 등도 워커힐이 지닌 이런 성격 때문이다. 당연히 워커힐에는 극장식당이 갖추어져 있고 주한미군 등 외국인의 취향을 고려한 쇼로 채워졌다. 워커힐의 쇼는 당시로는 세련된 고급의 쇼인 동시에 다소 높은 수위의 노출도 가능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에서 한국의 관객이라면 ‘호텔’이 아니라 ‘쇼 공연장’에서 만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작품의 제목에서 워커힐 쇼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많은 쇼 장면을 보여주는데, 비단 워커힐 쇼만이 아니라 다양한 호텔 쇼와 방송국 쇼 프로그램까지 망라한다. 노출된 여자무용수의 허리의 꿈틀거리는 동작을 클로즈업한 오프닝 화면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에 비하자면 쇼의 관능성 수준은 시원찮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이 정도가 ‘19금’ 등급이었다. 둘째 키워드는 한형모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 작품과 이듬해의 < 엘레지의 여왕 >으로 끝이 난다. 1950년대 후반 < 자유부인 >과 < 청춘쌍곡선 > 등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세련된 촬영과 편집으로 전후 상업영화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했던 한형모 감독으로서는, 두 편의 음악영화로 마지막 피치를 올린 셈이다. 그는 줄곧 음악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꾸준한 시도를 해온 사람이었고, 음악영화가 요구되는 때에 그가 불려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유부인>에서 가수 백설희의 노래와 댄스홀의 라틴댄스 쇼 장면을 화려하게 보여준 그는, <청춘쌍곡선>(1958), < 나 혼자만이 >(1958)에서는 좀 더 음악과 춤의 비중을 높이거나 뮤지컬적인 장면을 시도했다. 그러니 아무리 1960년대 후반이라 해도 노래와 춤을 영화에 버무려 넣는 기법에서 그는 확실히 많은 노하우를 지닌 독보적인 감독임에 틀림이 없었다. 셋째 키워드는 1966년이라는 시기이다. 영화사에서 1960년대가 보기 드문 전성기였음은 두루 아는 사실인데, 대중가요사에서도 역시 전성기였다. 한 해가 다르게 양적으로 팽창해가는 한국영화계는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온갖 장르를 시도하게 됐고 음악영화 역시 그중 하나였다. 대중가요사로 보자면, 1960년대 초에 한 번도 선두 장르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트로트의 기세가 꺾이고 ‘양풍’ 가요인 스탠더드팝이 가요계의 선두를 차지한 후, 196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이미자 열풍과 작곡가 이봉조 시대의 개막, 록그룹 키보이스 등장 등 다양한 경향이 함께 솟아오르는 시기가 이때였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남진, 문주란, 배호, 정훈희 등 폭발적이라 할 만큼 여러 신인 가수가 두각을 나타내는데, 1966년은 그 직전의 상승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가요를 활용한 음악영화의 출현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대중가요를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까지 만족시키며 즐기고 싶은 관객들의 요구란 늘 있다. TV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당시에, 대형 컬러 화면으로 다양한 종류의 쇼를 구경한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부터 < 청춘대학 >( 김응천 , 1966), < 엘레지의 여왕 >(1967), < 폭풍의 사나이 >( 박종호 , 1968), < 이 강산 낙화유수 >( 조길현 , 1969) 등 음악영화가 쏟아져나왔고 이 흐름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인기 가수의 노래 장면을 틈틈이 배치한 국책영화 < 팔도강산 >( 배석인 , 1967), 영화로 만든 한국대중가요사라 할 만한 < 가요반세기 >( 김광수 , 1968) 등도 이런 흐름 속에 놓여있다. 그러니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는 무엇보다도 틈틈이 화려한 대중가요 쇼를 보여주는 것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시골 사람의 어리바리 서울 구경,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의 극적인 만남 같은 극영화의 기본 얼개는 매우 상투적이며 부실하다. 심지어 한형모 감독이 무려 10년 전에 시도한 <청춘쌍곡선>의 뮤지컬적 장면조차 이 영화에는 없다. 대사를 대신하는 노래는 전무하며 모든 노래는 가수들의 쇼 장면으로만 소화되고 있다. 사건은 그저 쇼 장면을 연결해주는 느슨한 끈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 대중가요 쇼의 배치는 공들여 다채롭게 배치된 티가 역력하다. 트로트부터 스탠더드팝, 경음악까지 두루 능란하게 다루는 작곡가 박춘석이 음악을 맡았으니 음악의 질도 나쁘지 않다. 당시 최고의 사회자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여러 장면에서 쇼의 진행자로 등장하고,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자니부라더스의 <방앗간집 둘째 딸> 등 박춘석의 작품뿐 아니라, 1960년대 초중반을 휘어잡은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그 외 이금희와 위키리 등의 외국 곡도 두루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익살스러운 복장의 윤항기가 <울리불리>를 부르는 키보이스 연주 장면까지 넣어 당시 아주 젊고 새로운 록 음악까지 선사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악과 쇼를 보여주기 위해, 위해 ‘부르스’ 추는 호텔 나이트클럽과 공연의 중심인 시민회관 쇼, 회전무대를 갖춘 화려한 워커힐 쇼, KBS TV의 쇼 스튜디오, 젊은이들이 소울풀한 몸짓으로 춤추는 명동의 뮤직홀까지, 어리바리한 두 시골 사람이 돌아다니도록 만들었다. 주인공인 신인가수 남보라(남정임 분)가 부르는 주제가 격인 노래는,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의 중간쯤 되는 <파란 이별의 글씨>(전우 작사, 박춘석 작곡, 성태미 노래로 영화에서는 립싱크로 처리되었다)를 배치해 안정감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켰다. 거의 모든 쇼 장면에는 무용이 들어있어, 당시 쇼의 무대미술과 연출, 백댄스의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충분히 의미를 발한다.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내 몸에 지퍼가 있는 것 같아. 지퍼를 내리면 그 속에 전혀 다른 몸이 있는 것 같아. 이런 내가 괴물 같아?”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한 소녀의 절박한 외침. 스웨덴 영화 < 걸스 로스트 >는 성장의 문턱에서 ‘길을 잃은’ 한 소녀의 외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한, 아주 과감한 영화다. 고민과 망설임의 내면을 따라가는 대신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은, 소녀가 그렇게 갑갑해 하던 외피에 메스를 가해, 감추어져 있던 성 정체성을 해부하는 일이다. 바로 몸이 ‘트랜스’되는 마법에 기반을 둔 독특한 판타지물로의 진입이다. < 걸스 로스트 >의 소녀 킴과 벨라, 모모 셋은 소위 말해서 학교의 왕따다. 남학생들로부터 “제 젖꼭지 좀 봐! 젖통” 같은 폭언을 듣고, 폭행으로 인해 입은 체육복이 찢겨 나가도 미약한 힘의 소녀들은 차마 대항하기 힘들다. 도움의 손길 역시 요원해 보인다. 엄마는 상관없는 일에 대해 잔소리나 할 뿐이고, 가까이서 도움을 주어야 할 선생조차 “너도 이제 14살이나 되었으니, 남자아이들처럼 강해져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을 뿐이다. 레즈비언이라 놀림을 당하는 킴은 친구인 벨라와 모모가 겪는 부당함에 분개하지만 별다른 해결책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세 친구가 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집에 있는 온실이다. 학교가 끝나면 소녀들은 폭언과 폭행,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비밀스런 회합의 장으로 모여들어 씨앗을 심고, 미래를 꿈꾼다. 구원의 손길 역시 이곳에 도착한 정체 모를 ‘씨앗’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마법의 씨앗은 세포 분열을 거쳐 발아하고 꽃을 틔우게 된다. 마치 금단의 열매를 따 먹듯, 소녀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꽃에서 나온 진액을 마셔보기로 한다. 꽃들에 둘러싸인 따뜻한 온실, 그들만이 정한 규칙, 그리고 빈티지한 찻잔에 받아 나누어 먹은 우정의 결의. 여성이 남성이 되는 트랜스젠더의 의식은 그렇게 마법처럼 실행된다. 더스틴 호프만(< 투씨 >)이나 멜 깁슨(< 왓 위민 원트 >)이 여성의 인권을 소재로 한 대중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여성의 옷을 입었을 때, 몸을 죄어오는 꽉 끼는 의상과 걸음을 뒤뚱거리게 만드는 하이힐의 시도는 ‘불편’함의 다른 말이었고, 결국 그 부대낌은 큰 웃음이 되어 돌아왔었다. < 걸스 로스트 >에서 여성의 남성으로서의 치환은 정반대다. 이들이 남성성을 획득하는 것은 불편함이 아닌, 오히려 무기가 된다. 하룻밤 사이에 남자가 돼 버린 소녀들은 매끈했던 뺨에 우둘투둘 난 여드름과 팬티 속 거추장스러운 고추를 보고 당황하지만, 이내 환호한다. 소녀를 구속하던 꽉 맞는 지퍼를 내리는 순간, 그녀들의(아니 그 남자들의) 움츠렸던 어깨는 펴지고, 보폭은 당당해진다. 선생의 조언처럼 그들은 ‘남자아이들처럼’ 강한 근육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안하무인의 영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이 차별의 시선 속에서 숨죽여 살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소녀들이 이렇게 힘을 획득하는 걸 지켜보는 과정 속에는, 앞서 남성이 여성으로 젠더를 바꿀 때 일어나는 웃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바로 < 걸스 로스트 >에서 성장통을 겪는 소녀들을 지배하는 것은 다른 성을 향한 ‘호기심’보다, 힘을 가지지 못한 데 대한 공포와 절박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혼란의 시간을, 킴의 파괴적인 선택을 통해서 보여준다. 한번 남성의 힘을 체험한 킴은 다시는 나약한 여성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에게 마법의 진액은 이제 다른 삶을 위한 절대적인 것으로, 곧 중독의 것이 된다. 더군다나 남자가 된 킴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일인자를 자처하며 거칠기로 소문 난 비행소년 토니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도둑질을 일삼는 토니를 도와주고, 그의 연애를 질투하고, 그의 구타를 감내하기까지 한다. 토니를 향한 킴의 집착을 눈치챈 친구는 그에게 묻는다. “개랑 사랑에 빠진 거야, 아니면 개처럼 되고 싶은 거야?” 과연 킴은 그 질문의 답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토니를 향한 킴의 사랑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마법의 진액을 마시기 위한 킴의 집착을 나무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갑갑하다고 외치던 그 지퍼를 올리고 소녀로 다시 돌아갔을까? 알렉산드라-테레세 카이닝 감독은 스웨덴의 영 어덜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성장 판타지 < 걸스 로스트 >를 통해 성차별의 구조 속에서 소녀들의 딜레마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킴의 욕망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문제를 꼬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특히 그간의 작품을 통해 꾸준하게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개해 온 감독이기도 하다. <걸스 로스트>가 성장기에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억압의 구조를 표현해 낸 것이라면, 전작 < 키스 미 >(2011)를 통해서는 사랑에 빠진 30대 레즈비언 여성이 주변 인물들과 겪는 갈등을 보여 주었다. 또 텅 빈 아파트로 날아 들어온 비둘기와 그 비둘기를 좇으려 하지만 힘을 못 쓰는 여성이 겪는 난처한 상황을 그리는 단편 <엘레지아>(2011)를 통해서 힘의 무게에서 오는 성차별적인 이 사회의 문제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가면을 쓴 소녀들의 비밀의식 장면, 몽환적인 음악이 주는 미스터리한 분위기 등 < 걸스 로스트 >가 구축한 판타지의 영역은 소박하지만 눈길을 끄는 지점이 많다. 남녀 더블캐스팅으로 자고 나면 소년이 된 소녀들의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각각의 남녀 배우들이 상당히 닮아 있다. 영화의 시작 ‘다르다는 걸 외면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영화는 결국 이 문구가 명령조라기보다는 절박한 외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단단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필명으로 남해림 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서울에서 출생했다. 배재고보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중동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중동학교 2학년 학생이던 1929년에 잡지 「동광」의 현상 시 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33년부터 일본 와세대대학 제2고등학원을 거쳐 문학부 영문과에서 공부하면서, 이해랑, 김동원 등과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고 함께 활동했다. 이 시기 조선일보사 신춘문예에 희곡 <광풍>, 동아일보사 신춘문예에 희곡 <동맥>이 각각 당선되었으며,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라디오드라마연구그루프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동양극장 문예부, 조선일보사 학예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1939년 조선일보사 신춘문예에 소설 <소복>이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소설 <방랑기>, <생리>, <코>, 희곡 <단층> 등을 발표했다. 이렇게 그는 첫 시작부터 소설, 연극, 방송극 등 다양한 분야의 문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고, 이런 성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가 영화와 관계를 맺은 것은 1940년 고려영화주식회사 선전부장을 맡으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 복지만리 >(1941, 전창근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년설이 불러 해방 후에까지 오래 인기를 모은 주제가 <복지만리>(이재호 작곡)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 몇 편의 대중가요 작사를 했는데 이 중 <대지의 항구>는 <복지만리>와 함께 인기를 모은 작품이다. 해방 후 고려문화사 편집국장, 「어린이 신문」 주간 등으로 활동하고 소설도 부지런히 발표했지만, 타계할 때까지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많은 작품을 남긴 영역은 방송극이었다고 보인다. 1946년 당시 경성방송국(이후 KBS)에서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기 시작하여 줄곧 방송작가로 살아왔다. 물론 희곡작가로서 활동도 쉬지 않아 <혈맥>(1947) 같은 한국현대희곡사에 남는 작품을 발표하고 국책 가무단인 예그린의 첫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1968)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 활동이 간헐적인 것에 비해 방송극에서의 활동은 지속적이고 양도 매우 많다. 어찌 보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이러한 방송극 작업의 연장 혹은 변주의 측면이 크다. 그것은 그가 간여된 영화 작품 중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원작만을 제공한 작품이 크다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영화 < 여사장 >(1959, 한형모 감독), < 혈맥 >(1963, 김수용 감독) 등 희곡을 영화화한 몇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해방 후 그가 간여된 첫 영화 < 똘똘이의 모험 >(1946, 이규환 감독, 안석주 극본)부터 말기작인 < 거북이 >(1970, 이성구 감독, 이희우 극본)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작품은 모두 라디오드라마와 텔레비전드라마를 바탕으로 영화화 한 작품들이다. 특히 영화 < 굴비 >(1963, 김수용 감독)가 발표된 1963년 즈음까지는 < 성벽을 뚫고 >(1949, 한형모 감독), < 출격명령 >(1954, 홍성기 감독), < 장미의 곡 >(1960, 권영순 감독) 등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 있지만, 이후에는 모두 원작만 제공하고 다른 작가가 영화 각색을 맡은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전쟁 소재의 < 출격명령 >, 1950년대의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 < 여사장 >, 전형적인 연애물 < 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 >(1961, 이성구 감독), 신파적 멜로드라마 < 친정어머니 >(1966, 김기덕 감독) 등 매우 다채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의 핵심이 유머를 머금은 서민들의 이야기,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방송극을 영화화한 < 박서방 >(1960, 강대진 감독)은 뒤이은 < 마부 >(1961, 강대진 감독)와 함께 희극적이면서도 비애스러운 서민 아버지의 김승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특히 그는 서민 남성 인물형을 탁월하게 그려내는데, 해방 직후 빈민들의 삶의 풍경을 탁월하게 포착한 < 혈맥 >, 식민지시대 수표교 다리 밑의 의리 있고 순박한 각설이패 두목을 형상화 < 거북이 > 등의 인물 형상화는 탁월하다. 또한 정의감과 뚝심이 있는 젊은 엘리트를 그려낸 < 신입사원 미스터리 >(1962, 김기덕 ) 역시 < 마부 >와 < 쌀 >(1963, 신상옥 감독)로 이어지는 문제해결 능력을 지닌 듬직한 장남 신영균의 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영화 전성기이자 라디오드라마의 전성기인 1960년대에 이미 50대의 중견 작가였던 그는, 젊은 작가들이 빛을 발하던 여성 중심의 현대적 애정물과는 다소 거리를 둔 가족과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작가적인 역량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은 <친정어머니>나 < 엘레지의 여왕 >(1967, 한형모 감독) 등 다소 퇴영적인 신파적 질감의 작품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1971년을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