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이 설레인다(제12부)
- 감독
- 정건조, 김현철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강덕, 김원숙, 김철, 김성수, 김일현, 림호남, 김선옥, 안현철, 리용덕, 리금숙, 박태수, 리웅관, 리래성, 김상윤, 리지영
< 독수리 >는 올해(2022년) 네마프(Nemaf: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관람했다. 아무 기대 없이 홈페이지 이미지만 보고 선택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그날 본 다른 영화들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관람한 멤버의 한 마디가 우리의 마냥 좋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6mm필름으로 21세기 캐나다 깡시골의 풍경을 담은 영화잖아.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새롭지? 필름 가지고 한 이런 작업들 많잖아. 우리가 너무 매끈한 디지털 작품만 보다 오랜만에 필름작업을 봐서일까.” 영화가 너무 좋은 건 당연한데 어느새 우리는 그 좋음마저 혹시 동시대 기술매체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향한 우리의 반응이 지난 세기에 발명된 매체를 향한 향수에 그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독수리는 색다른 영상미와 주제의식으로 무장해 우리의 영화적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그저 그런 영화로만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우리 곁을 맴돌았고, 어느새 우리는 멤버가 던진 질문을 시작으로 이 영화를 해부해 보았다. <독수리>의 전체 구조는 약 2분 가량의 영상 조각들이 몇 초 간의 공백을 두고 여러 장의 사진처럼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풍경사진 몇 장을 넘겨 보는 듯한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그래서 각 장면의 자연 배경과 동물들의 몸짓에 깊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내용도 별 다를 게 없다.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소, 말, 돼지, 염소, 닭과 같은 가축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울타리 밖 인간들도 함께 농사를 짓고 풀을 뽑고 가축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들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목초지 위에서 동물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자유롭게 뛰고 먹고 마시고 쉬길 반복한다. 그러다 커다란 말이 인간에 의해 강제로 울타리 밖으로 끌려 나가는데,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말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울타리로 돌아온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변의 검은 소들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탈출한 말이 뛰자 자기들도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선 긴장감이, 종이 다른 동물들 간엔 유대감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미 동물들은 독수리가 그렇듯 서로 싸우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동물들을 가두고 통제하려 하는 인간만이 철저한 외부인처럼 울타리 밖에 갇힌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 있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진다. 동물들은 별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가만히 눈을 껌뻑이는가 하면 편안하게 누워 햇볕을 쬐고 뛰어다닌다. 아마도 촬영은 목장의 울타리 안과 밖, 창문, 경작지 등 정해진 장소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기다리는 가운데 이뤄졌을 거다. 영화의 처음 몇 장면은 필름 촬영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만 존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 위에 굵고 강한 훼손의 흔적이 드러난다. 작가는 영상의 중반쯤에서 풀을 뽑고 그걸 끓이는 짧은 장면을 제시해 필름의 훼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는지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영상 끝부분에 필름에 쓰인 재료가 공개되는데, 여러 종류의 꽃과 열매 같은 식물들이 주재료다. (참고로 우리는 식물들을 우려낸 액체에 며칠이건 담근 감독의 필름을 발효 필름이라 부르고 있다.) 실험영화와 사진 매체에서 곰팡이와 먼지 등을 이용해 필름의 물질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들이 있다. 필름의 물성을 변화시켜 매체의 시간성과 이미지의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름이 만들어진 과정의 일부를 보는 동안 어쩐지 인간이 채집하고 끓여서 만든 재료를 필름으로 하여금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약하자면 이 영화에서 필름은 단순히 훼손되고 실험되지 않는다. 필름이 먹은 풀은 목장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먹는 자연의 풀과 꽃, 열매 등이다. 돼지가 소의 젖을 빨고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있다. 돼지가 젖을 빠는 동안 소는 풀을 뜯어 먹고, 그 뒤에서 작은 새들이 들판 위에 떨어진 뭔가를 쪼아먹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맞은 편에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풀과 꽃과 소금 등에 의해 발효된 16mm 필름이 뱃속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꽤 오래된 카메라일 것이다. 자연의 재료를 한 차례 소화시킨 카메라 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다. 자연의 풍경과 생명체의 행위, 햇볕과 바람까지 완벽하게 차려진 만찬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는 인간이 만든 다소 거칠고 소박한 취향의 플레이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오직 카메라를 든 인간만이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장에 인간이 나타나면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목장의 주인인 인간은 먹이와 따뜻한 물을 주지만,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동물들을 통제하고, 때때로 고삐를 틀어쥔 채 강제로 끌고 나가기도 한다. 그랬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면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아마도 감독이 오랫동안 울타리 안에서 촬영하는 동안 동물들은 카메라를 든 인간만큼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함께 풀 뜯어 먹고 조용히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카메라를 든 인간은 경작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과 다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인간 또한 그들과 함께 머무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섭취하고 자연으로부터 채집한 물질을 먹임으로써 그들과 밥상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실험영화나 목가적인 영화로만 볼 수 없었다. 식물을 섭취한 필름이 드러내는 건 시간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회화작품인 Homer Watson의 The Floodgate는 경작하는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의 오랜 관계망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독수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이는 동물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자는 독수리의 위치를 통해 먹이감을 찾고, 독수리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단순히 아이가 들려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목장의 동물들 또한 독수리와 사자, 혹은 독수리 무리처럼 먹고 마시며 공생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여타의 환경/자연 영화와 다른 지점은 막연하게 생명체의 공존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실제의 공존과 균형은 갈등과 긴장감의 조절을 통해 유지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먹는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경작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는 동안 영화는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 같은 사운드 효과로 자꾸 이곳이 누군가가 농사 짓고 가축 키우며 먹고 사는 곳이란 걸 잊지 않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균형이 실은 식량과 먹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정적인데 그 안의 동물들은 생기있고, 인간들은 쉴 틈 없이 일한다. 정원이 딸린 집과 잘 정돈된 경작지, 나무 울타리와 농기계,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운전 중인 트랙터 소리로 뒤덮여 있다. 발효된 필름의 노이즈와 백색소음처럼 깔린 이 농기계 소리로 인해 캐나다의 어느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환상이 지워진다. 사람이 먹기 위해 내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동물들이 먹고 있는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하루종일 땅을 일궈야 하고, 동물은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한 너른 목초지에서 비로소 배를 채울 수 있다. 독수리의 먹이 또한 여기 이 땅 위에 있다. 트랙터 소리는 오늘날 이 땅의 생태계가 어떤 순환을 통해 완성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 영화의 모든 실험/시도가 가리키는 곳에 막연한 관념이나 개념은 없다. 오히려 감독은 자신의 신체와 카메라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그가 먹어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는 각자 어떤 물질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깊이 숙고하고 관찰하며 실험/시도하며 작업하고 있는가. 영화에서 어린 아이가 독수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이 답한다. “I didn’t know that” 농부이자, 목장주이며, 혹은 카메라를 든 감독일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어른의 목소리다. 기회가 돼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었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 거기에 있었다. AI가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영상도 찍는 시대다. 인간과 기계, 예술에 대한 단정적인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인간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좌절하고, 끝났다며 판정패 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누군가가 이전에 모든 걸 다 시도해봤고, 만들었다며 지금에 와서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의적인 말들을 너무 많이 듣고 있다. 이런 말들의 효과는 한없는 무력감과 지나친 강박 외에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그 단정적인 말들 속에서 남자의 대답은 확실히 다르다. 그의 대답은 동물들 사이에 삼각대를 세우고, 필름에게 먹일 식물을 구하기 위해 목초지를 이리저리 뒤질 수 있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이 이뤄진 상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I didn’t know that”에서부터 시작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프리카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과 로맨스의 대작 오락물’에서 존 포드의 이름을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 모감보 >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포드 영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당대의 톱스타 클락 게이블, 애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 외엔 포드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 신부를 맡은 단역 데니스 오데아(Denis O’Dea)를 제외하면 포드 사단에 속한 배우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가 공간적 배경인 영화도 <모감보>가 유일하다. 각본을 쓴 존 리 마인(John Lee Mahin)은 이 영화가 포드와의 첫 작업이며 6년 뒤의 < 기병대 The Horse Soldiers >(1959)가 포드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는 < 솔로몬왕의 보고 King Solomon’s Mines > < 벤허 > 등의 대작을 찍었으며 역시 < 모감보 >가 포드와의 유일한 공동작업이다.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 혹은 미국도 아니며 가족의 실제 고향 아일랜드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선 배우들, 낯선 스태프들과 만든 이례적인 영화가 <모감보>다. <솔로몬왕의 보고>(1950), <아프리카의 여왕>(1951), <킬리만자로의 눈>(1952) 개봉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 솔로몬왕의 보고 >(캠튼 베넷, 앤드류 마튼 감독/데보라 커,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 1950), <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 >(존 휴스턴 감독/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주연, 1951), <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헨리 킹 감독/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애바 가드너 주연, 1952)과 같은, 빅 스타를 내세우고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과 로맨스를 배합해 관객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영화들이 유행했다. 당대의 관객이나 평자들에게 < 모감보 >는 ‘Great White Hunter’ 멜로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런 영화들의 아류로 비쳤던 것 같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90년에 내놓은 < 추악한 사냥꾼 White Hunter Black Heart >은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 당시 존 휴스턴 감독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자, 이 장르의 패러디이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존 포드 열광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린지 앤더슨은 < 모감보 >가 “오락과 도피를 위한 외도이며, 콘셉트도 야심적이지 않고 결과도 신통치 않은 영화”라고 잘라 말한 뒤 어떤 논평도 덧붙이지 않는다(『About John Ford』). 앤드루 새리스 역시 “작가의 영화라기보다는 장인의 영화”이며 “포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고 그의 개인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 온 마을의 수다 The Whole Town’s Talking >(1935)와 함께 포드의 가장 즐길만한 영화”라고 적고 있다. 다만 새리스는 “이 도피주의적인 빅 스타 오락물이 (대중영화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데도, 대중영화 지향적인 비평가들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John Ford Movie Mystery』) 생전의 포드를 만난 진지한 인터뷰어들도 이 영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포드가 이 이례적인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어떤 구상으로 촬영했고 결과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가졌는지에 대한 발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언론의 연예란에는 이 영화가 뜨거운 이슈였는데,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세 주연 배우가 톱스타이자 당대의 바람둥이였고, 촬영현장에서 얽히고설킨 염문을 끝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 모감보 >는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만들어진 포드의 개인적 영화들(<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이 겪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묘한 소외를 겪은 셈이다. 전후의 존 포드가 개인적 프로젝트(위의 네 편과 < 말없는 사나이 > 등)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스튜디오 납품용으로 당대의 상업적 장르인 서부극을 찍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오락물처럼 보이는 < 모감보 > 역시 같은 의도로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모감보>가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는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포드가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또 다른 서부극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이 서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부극뿐만 아니라 서부극적인 비서부극이 보여주는 바는, 포드의 서부극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신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애바 가드너, 클락 게이블, 그레이스 켈리 줄거리는 이렇다. 케냐의 밀림 지역에 터를 잡은 빅터(클락 게이블)는 두 백인 및 원주민 조력자들과 함께 맹수를 포획해 유럽의 동물원과 서커스단에 파는 백인 사냥꾼(white hunter)이다. 어느 날 밤무대 무희처럼 보이는 켈리(애바 가드너)가 도착해 빅터와 짧은 인연을 맺지만 빅터는 그녀를 부담스러워한다. 곧이어 젊은 영국 인류학자 도날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린다(그레이스 켈리)가 사파리 여행을 위해 이곳에 온다. 빅터와 린다는 곧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숨기고, 네 남녀는 고릴라 거주 지역을 향한 위험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0 거의 지적되지 않는 점이지만 < 모감보 >는 < 역마차 >(1939)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이주민들의 불안정하고 작은 마을, 온갖 위험이 도사린 야생 지역(초원과 밀림/황야)을 차례로 통과하는 여정, 적대적 토착민들(아프리카 원주민과 맹수/인디언)의 위협, 주인공 남녀의 결합이라는 주요 모티프들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고릴라 지역 원정대는 마치 서부의 평원을 지나는 마차 행렬처럼 찍혀 있다.(#0) 운송수단은 마차에서 지프와 카누로 달라졌지만, 빅터 일행의 지프와 카누가 역마차처럼 두세 곳의 토착민 마을을 경유해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구성은 같으며, 승객 캐릭터들도 유사하다. 야생의 삶에 익숙한 유능하고 과묵한 단독자인 주인공(빅터/링고 키드)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프/마차에는 지금 문명화된 지역에서 온 숙녀(린다/루시)와 창녀 혹은 유사 창녀(켈리/댈러스)가 타고 있으며 숙녀는 창녀를 경계한다. 물론 < 모감보 >의 지프와 카누에는 주정뱅이 철학자도 없고(주정뱅이는 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이상심리의 도박사도 위선적인 절도범도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 구성은 훨씬 단조롭다. 또한 링고 키드의 여정은 복수를 향한 것인 반면 빅터의 여정은 로맨스(다른 남자의 아내를 얻기 위한)를 향한다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 주인공과 창녀의 결합(빅터-켈리/링고 키드-댈러스)이 이뤄진다는 결말은 완전히 같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 / <모감보>의 빅터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 역마차 >에는 공동체가 있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다. <역마차>의 마을은 문명화의 도정에 있다. 이 불안정한 공동체에는 문명의 완성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외부의 위협(인디언 제로니모)과 내부의 위협(악당 플러머 형제)이 있으며 동시에 문명의 악덕(은행가의 탐욕과 범죄, 창녀와 주정뱅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위선의 율법)도 이미 만연해 있다. 링고 키드는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악당들을 제거해 사실상 공동체의 문명화에 기여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된 그를 위한 공동체 내부의 자리는 감옥이나 교수대 외에 없다. 그는 떠나야 한다. 문명화의 도정에 있는 서부 공동체의 딜레마는 오늘은 폭력적 영웅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그를 추방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의 폭력 행사와 (자기)추방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역마차>라는 서부극 서사에서 공동체의 도덕은 영웅의 윤리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중심 모티프이다. < 모감보 >에는 빅터가 거주하는 마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윤리와 긴장하는 공동체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이 마을은 사실상 빅터가 사장인 비즈니스 조직에 가깝다. 그의 표면적 목적은 더 많은 동물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의 근본적 동기가 돈벌이인지 도피인지는 모호하긴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빅터의 소왕국과도 같은 곳이다. <모감보>의 서사가 < 역마차 >에 비해 얇아 보이는 건 캐릭터 구성의 단조로움 때문이라기보다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잔혹한 도덕이라는 모티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이 하나는, 당연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으므로 공동체의 바깥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사의 외부 혹은 서사의 초월적 층위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댈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를 향해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공동체의 바깥, 주정뱅이 철학자 닥 분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의 축복을 벗어난’ 미지의 땅이다. < 황야의 결투 >의 와이어트 업,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도 그곳을 향해 떠났다. < 웨건 마스터 >의 인물들은 평생 그곳을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그 바깥이 서사를 영원한 미결의 여정으로 만든다. 영웅의 떠남이 사실상의 추방 심지어 죽음의 은유라고 해도 그에겐 적어도 떠남의 결정권이 주어졌고 무한한 광야로 시각화된 그 바깥은 감상적 위안마저 안겨주는 낭만적 외부였다. 포드의 서부극에 한정한다면 이 외부가 닫히는 건 1960년대의 두 서부극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와 < 샤이엔의 가을 >에서였다. 두 영화는 이 바깥의 최종적 폐쇄의 확인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 모감보 >의 장소인 아프리카는 물리적으로는 미국 서부보다 훨씬 광대하고 더 아득한 미지의 땅이다. 하지만 이곳이 < 역마차 >의 서부보다 좁아 보이는 이유는 외부가 없는 달리 말해 초월적 층위의 장소가 상상될 수 없는 동질적 공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정한 위험이 일상인 장소이고 그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깊은 정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빅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문명을 떠나 이 외지고 위험한 곳에 정착했고(그의 개인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로 나간 적도 거의 없다. 그는 문명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달리 말하면 빅터는 < 역마차 >의 결말에서 링고 키드가 향해 떠난 곳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계속 밀림 탐색에 나서겠지만 더 이상 미지의 땅을 향해 떠도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왕국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다. 말하자면 < 모감보 >의 정글은, 다른 층위의 장소를 향해 열린 곳이 아니라, 영웅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유폐시킨 폐쇄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모감보>는 <역마차>의 변주이면서 동시에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모감보>를 포스트 서부극이라 말할 수도 있다. < 모감보 >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가 아니라 포드 서부극의 친족처럼 보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존 포드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요구한 아프리카 사파리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이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채용한 정글 모험의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예컨대 존 휴스턴의 < 아프리카의 여왕 >에서 작은 증기선에 올라탄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의 주된 곤경은 끝없는 갈대숲과 진창, 엄청난 수의 모기떼, 강의 가파른 급류, 미친 폭우와 강풍과 같은 아프리카의 가혹한 자연환경이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감보>는, 맹수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라는 장소를 특별한 공포와 매혹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무관심하다. 서부극의 주요 장르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설명은 널리 통용되지만, 포드 서부극에서 적대적 자연환경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재난 장르인 < 허리케인 >을 제외하면, 성서번안극에 가까운 유사서부극 < 3인의 대부 3 Godfathers >(1948)의 소금사막이 드문 예외다. 포드 서부극에서 자연 풍경은 오히려 깊이 침묵하는 초서사(超敍事) 혹은 비지(非知)의 심연이다. 적대적 자연으로 흔히 오인되는 것은 적대적 인디언이다. 백인의 이주민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북미 인디언의 토착민공동체인 것이다. 백인 문명이 자연 지배적이고 인디언 문명이 자연 순응적이라고 해도, 이 대립은 분명히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의 대립이며 투쟁이다. 인디언 공동체가 백인 공동체보다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으로 묘사되는 < 아파치 요새 >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가 달빛이 흐르는 강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젊은 날의 링컨 > < 모감보 > < 라이징 오브 더 문 >),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는 자연을 공포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상투적 방식에 이끌린 적이 거의 없다. < 모감보 >에서 포드는 모험이 아니라 여정을 택한다. 사파리 장르의 강점인 맹폭한 자연 대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활용하는 대신, < 역마차 >의 궤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여정의 서사 안에서 <역마차>에서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적어도 <모감보>의 세계 안에서라면 아프리카의 자연은 빅터라는 유능한 영웅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빅터는 공동체와 절연한 단독자이며 그를 망칠 수 있는 건 이제 그 자신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모감보>를 <역마차>의 후일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맹수이며 자기 내부에 모든 위협을 지닌 영웅이라는 점에서 빅터는 모던한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다. 공동체의 율법도 외부의 위협도 사실상 부재한 곳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 먹이 사냥을 제외하면 짝짓기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모감보 >는 맹수의 짝짓기 영화다. < 모감보 >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위협적인 맹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들이 최상위 맹수인 빅터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맹수들은 빅터의 분신으로서 그의 정체를 암시하고 그의 위협을 상연하며 그의 불길한 미래를 예기한다는 것이다. #1 #2 #3 #4 이 영화에선 흑표범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함정에 빠져 포획된 흑표범은 백인 조수의 실수로 그물을 뚫고 도망간다.(#1) 몇 장면 뒤에 린다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흑표범이 그녀를 향해 으르릉거리며 다가온다.(#2, #3) 뒤늦게 쫓아온 빅터는 흑표범을 쏜다.(#4) 여기 세 맹수가 있다. 첫째, 그물을 뚫고 탈출한 맹수. 둘째, 함정에 빠진 미녀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맹수. 셋째, 여인의 육신을 노리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맹수. 첫째는 공동체를 탈주한 빅터의 전사에 해당될 것이며,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린다에게 접근하고 있는 빅터의 현재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는 결말부에 전개될 빅터의 미래에 해당될 것이다. #5 더 흥미로운 장면은 후반부에 있다. 고릴라 거주지역 부근 텐트에서 혼자 앉아있는 켈리 곁을 치타가 무심하게 지나간다.(#5) 켈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라지만 치타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맹수와 여인이 한 프레임에 담긴 유일한 장면이며,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재연한 장면이지만, 켈리에 대한 빅터의 미지근한 태도뿐만 아니라, 빅터와 켈리가 같은 종의 맹수임이 절묘하게 암시된다. 둘은 모두 문명이 아니라 정글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린다와의 결합에 실패한 뒤, 빅터는 떠나려는 켈리를 붙잡으며 “함께 있어주면 좋겠소. 당신은 내게 어울리니까.”라고 말한다. 달콤한 구애의 언어를 기대했던 켈리는 “어울린다고?”라며 화를 내고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배에서 내려 빅터에게 달려온다. 빅터의 말대로 둘은 사랑한다기보다 어울리는 게 맞다. 빅터와 켈리의 결합에는 < 역마차 >의 링고 키드와 댈러스의 결합에서처럼 로맨틱한 감정교환 대신 동류의 존재로서의 확인만 존재한다. 비유컨대 < 모감보 >는 먼저 떠난 링고 키드에게 댈러스가 뒤늦게 찾아온 이야기다. 둘은 맹수로서 앞으로도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글에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하다. 여기엔 모종의 단념이 있기 때문이다. 린다가 일깨운 문명으로의 복귀 가능성, 로맨스, 열정의 회복이 모두 단념된다. 포드는 단념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념의 결정만 제시한다. 마치 단념이 빅터와 켈리의 운명이라는 듯. 이것이 자신을 정글에 유폐한 서부사나이의 삶이다. 그런데 < 모감보 >에는 이 모든 설명을 부질없게 만드는 시퀀스가 있다. 산책 도중 위험에 빠진 린다를 빅터가 구한 뒤에 둘이 돌아온다. 린다는 날렵한 초식 동물처럼 프레임을 재빨리 빠져나가다(#6) 나무 등걸에 기대 그를 바라보며(#7), 빅터라는 맹수를 피하듯 유혹한다.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빅터가 린다를 안아 올리자 린다는 갑자기 빅터의 몸을 빨아들일 듯 안겨든다.(#8) 그런 다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이어진다. 남편이 잠든 린다의 방 앞에서, 빅터는 린다의 스카프를 벗기고 그녀의 목을 감싼 다음 거칠게 당긴다.(#9) 흔들리는 눈빛의 린다는 다가올 듯하다 돌아서 들어간다.(#10) #6 #7 #8 #9 #10 입맞춤조차 없지만 이 일련의 장면들에는 숨막힐듯한 유혹, 외설적 욕망과 섬뜩한 불안이 숨 가쁘게 교차한다. 이 영화의 드문 지지자인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다시 옮기자면 여기엔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포드를 무엇보다 위대한 디테일의 작가, 감정 표현의 마술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적인 감상으로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 모감보 >를 포드의 걸작 반열에 올리고 싶어진다.(계속)
존 포드가 1939년에 만든 또 한 편의 영화 < 역마차 >에 오를 차례다. 이 영화를 말하려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서부극의 새로운 시작이자 영원한 고향, 모뉴먼트 밸리와 존 웨인을 서부극의 시원적 아이콘으로 등재시킨 기념비, 꿈결과도 같은 아름다움과 바로크적인 잔혹미와 냉정한 리얼리즘의 기묘한 동거 혹은 감상적 낭만주의와 신화적 숭고미의 우아한 공존, 서사의 논리로 정제되지 않는 모호하고 풍요로운 쇼트들. 반복컨대, 한 해에 한 감독이 < 젊은 날의 링컨 >과 <역마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번 회에는 < 역마차 >를 직접 말하기에 앞서 서부극에 대한 통념의 문제를 짚고 가려 한다. 그 통념은 존 포드의 영화는 물론 서부극 일반을 감상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십상이지만, 의외로 광범하게 퍼져 있다. 좀 딱딱하고 다소 상식적인 내용이라도 그 통념이 지닌 문제점을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정리 과정에서 이 연재의 3회, 그리고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서문에서 밝힌 견해를 중복을 무릅쓰고 재론할 생각이다. 나는 이전의 글에서 존 포드의 비서부극도 서부극처럼 보인다고 썼다. 이 말은 거꾸로 써도 성립한다. 존 포드는 서부극도 비서부극처럼 찍었다. 서부극과 <역마차>에 관한 논의를 통해, 나는 이 수사적 표현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역마차>의 마지막 먼저 개인적 경험담 하나를 말하고 싶다. 내가 역자로 참여했으며 최근에 재출간된 토마스 샤츠의 저명한 장르 연구서 「할리우드 장르」(컬처룩)를 번역할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샤츠는 여기서 존 포드를 서부극의 완성과 진화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으로 간주하고, < 역마차 >를 고전적 서부극의 한 전범으로 제시한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고전적 서부극은 선형적인 플롯, 안정된 심리의 주인공, 투명한 형식, 낙관적이고 친 사회적 주제의 영화다. 샤츠는 무법자 링고 키드(존 웨인)와 매춘부 댈러스가 국경 너머로 떠나는 <역마차>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면서, “냉소 뒤에 낙관적 전망이 숨어 있다... 약속의 땅인 미국의 서부 즉 신세계로 함께 떠났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 역마차 >에서 친 사회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어코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탈옥수인 무법자와 위선적인 공동체에서 추방된 매춘부가 국경 너머로 도피하는 결말을 어떻게 친 사회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떠나보내며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저들은 이제 문명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됐군”이라고 중얼거린다. 이 대사의 신기한 점은 ‘문명의 축복’을 ‘문명의 저주’로 바꿔도 아무런 의미의 손상 없이 성립한다는 것이다(나는 이 대사를 오랫동안 후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역마차가 마침내 도착한 마을 로즈버그는 불안과 살의와 혼돈의 어둠으로 가득하다. 포드는 이 마을이 무대인 마지막 20분 동안을 밤 장면으로만 채웠다. <역마차>는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굳이 따진다면 차라리 반사회적이고 비관적인 쪽에 가깝다. 샤츠도 이 결말의 모호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대목에서 그는 “포드 영화의 대체적으로 모호한 종결은 웨스턴의 전성기 시절의 다른 영화보다 그의 영화가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썼다. ‘낙관적 전망’을 ‘모호한 종결’로 슬쩍 바꾼 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건 그 자체로 이상한 말이다. 모호함은 그의 논의를 따른다면 장르 진화의 후기에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런데 고전적 서부극의 전범인 영화가 이미 모호함으로 가득하고, 그것으로 인해 결정적 영향을 발휘했다면 서부극의 진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 것일까. 내가 받은 인상은 샤츠가 존 포드의 영화 앞에서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종 서부극 자체와 동일시되는 존 포드의 장르영화가 한 연구가의 장르론을 예시하지 못한다면 그 장르론이라는 건 도대체 무용할 것이다. 그런데 존 포드의 서부극을 통해 자신의 장르론을 펼치려는 순간, 무언가 자꾸 어긋나기 시작한다. 샤츠는 이 어긋남을 파고들지는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숨기지 못하고 그 어긋남은 은연중에 드러낸다. 뒤집어 생각하면, 최고의 정전 서부극들을 예외적 서부극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존 포드의 위대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전형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실은 예외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전형성과 예외성을 구분하려던 이론은 난처해지고, 샤츠는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나는 오히려 이 점이 그의 저서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어긋남이 그의 장르론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기서 서부극 장르연구 전반을 개괄할 생각은 없다. 서부극은 할리우드 장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집중된 분야이며, 그 모두를 개괄할 능력이 내겐 없다. 존 포드의 서부극을 여행하려는 우리에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부극에 관한 치밀한 실증적 일반론을 개진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건 전문적인 장르연구가들조차 지금까지 하지 못한 일인데, 토키 시절에만 3,500여 편, 무성영화 시절까지 합치면 수만 편의 서부극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서부극을 토대로 서부극에 관한 통념이 지닌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 정도다. 토마스 샤츠의 논의에도 반영되어 있는 그 통념은 대략 두 가지 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장르 진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신화론 혹은 건국 신화론이다. 이것이 영화학자들만의 관심사라면 굳이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이론은 어느 정도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영화를 보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통념에 스며들어 오인을 재생산한다. 서부극 진화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례의 영화들 토마스 샤츠의 장르 진화론은 크리스티앙 메츠와 헨리 포실론의 가설에 기대고 있다. 그 가설은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의 형식은 관습들이 떨어져나와 확립되는 실험적 단계, 관습들이 균형에 도달해 예술가와 관객에 의해 상호 이해되는 고전적 단계, 형식과 스타일의 특정 요소가 형식을 장식해가는 세련화 단계, 마지막으로 형식과 형식의 장식 그 자체가 실체이며 내용이 될 정도로 중요해지는 바로크(매너리스트, 혹은 자기반영적) 단계를 거쳐 간다.” 요컨대 장르 진화는 주제의 복합성과 모호성, 아이러니, 형식에 대한 자의식의 확장 과정으로 설명된다. 샤츠는 이 진화론에 근거해 존 포드의 < 역마차 >(1939), < 황야의 결투 >(1946), < 수색자 >(1956),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를 서부극 진화의 가장 중요한 사례로 제시한다. 서부극 진화론의 가장 단순하고 통념화된 버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전적 서부극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착한 백인과 나쁜 인디언이 싸워 착한 백인이 승리하는 영화이고,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불리는 후기 서부극은 인디언의 고난과 백인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 통념은 의외로 광범하게 퍼져있다. 예컨대 < 아바타 >를 관한 일부 글들은 이 영화를 수정주의 서부극의 변주라고 소개하고,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 작은 거인 >(1970), < 늑대와 춤을 >(1990)을 들면서, 이전의 서부극들을 백인의 인종주의적 편견의 산물로 뭉뚱그리는 것이다. 이런 어법은 2000년 전후, 젊은 감독들의 분단 소재 영화를 소개하면서 종종 등장한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힌 전 시대의 냉전적 영화를 뛰어넘어’라는 저널리즘의 표현을 상기시킨다. 이런 표현은 임권택 과 > 이만희 의 분단 소재 영화를 한 편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말이다. 임권택의 < 짝코 >(1980), 이만희의 < 1950년 4시 >(1972)을 뛰어넘는 이후 세대의 분단 소재영화는 아직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마> <닷지 시티> <평원의 사나이> 위에서 말한 서부극의 통념 역시 존 포드의 영화뿐만 아니라, 1940, 50년대의 하워드 혹스, 윌리엄 웰만, 안소니 만의 서부극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포드의 무성영화 < 철마 >(1924) 혹은 < 역마차 >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마이클 커티스의 <닷지 시티 Dodge City>, 혹은 그보다 3년 전에 만들어진 세실 드밀의 < 평원의 사나이 The Plainsman >(1936)만 봐도 그런 통념은 간단히 무너진다. 물론 이 영화들에서 인디언이 미국 개척민들의 위협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진정한 악인은 인디언에게 무기를 파는 백악관의 고위 관료(<평원의 사나이>), 혹은 토지 투기꾼 및 그와 결탁해 인디언을 배후 조종하는 백인 기업가(<철마>) 혹은 악랄하고 탐욕적인 카우보이들(<닷지 시티>)이다. 존 포드의 또 다른 1939년 작 < 모호크족의 북소리 >에서는 희귀하게도 영국군이 인디언과 결탁한다. 적어도 거장들의 서부극은 초기부터 인디언의 잔인성이 아니라 타락한 문명과 자본주의적 탐욕을 주제로 삼았다. ‘진화’라는 표현은 영화를 말할 때, 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연재의 3회에서 말한, 시대 구분론로서의 고전영화-모던영화 이분법에도 진화론적 발상이 개입되어 있다. 진화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은밀한 가치판단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화에서 진화를 말하는 순간,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념에 은연중에 영향받아, 진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발생하고, 더 진화된 것이 덜 진화된 것보다 복합적이고 우월하다는 전제가 이면에서 작동한다. 이 전제들은 3회에서 말했듯이 영화사의 진실과 거리가 멀다. 역사학에서 빌려온 ‘수정주의’라는 표현도, 소위 정치적 올바름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개별 영화가 지닌 생명력에 둔감하게 만든다. 나중에 다시 말하게 되겠지만,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되는 < 늑대와 춤을 >은 서부극의 위대한 전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다. 토마스 샤츠의 논의로 다시 돌아와 보자. 그의 저술에서 내가 느꼈던 의문에 답해준 것은 태그 갤러거가 1995년에 쓴 별도의 논문 ‘Shoot-Out at Genre Corral : Problems in the “Evolution” of Western’(「Film Genre Reader」, ed. Barry Keith Grant)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큰 배움을 얻었고 서부극과 존 포드에 관한 생각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갤러거는 이 글에서 토마스 샤츠를 비롯한 8명의 장르 연구가들(Robert Warshow, John G. Cawelty, Philip French, Jack Nachbar, Will Wright, Frank D. McConnell, Leo Braudy)이 공유한 진화론의 관점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기존 학자들이 거의 무시해온 1910년대의 무성 서부극들을 검토한 뒤 갤러거는 이렇게 주장한다. 진화론자들이 후기 서부극의 특징적 기법이라고 주장해온 특징들, 즉 회화적 풍경, 변증법적 스토리 구축, 롱숏, 클로즈업, 평행 편집, 크로스커팅 등은 이미 초기 웨스턴에 구현되고 있다. 또한 클리셰의 자기반영적 패러디, 액자구조화 등은 이미 1910년대의 서부극에서 넘쳐났다. 영웅의 양면성, 해결되지 않는 갈등, 비극적 엔딩 역시 이미 토마스 인스와 프랜시스 포드(존 포드의 형)가 주도한 초기 웨스턴에 유행했다. 요컨대 표준적 진화론이 순전히 전후 서부극의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복합성 및 아이러니와의 노골적 비교를 위해, 거대하나 보이지 않는 일단의 전전 영화들을 순진하게 원시적인 것으로서 수사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다. 진화라는 가설을 세운 다음, 그것에 부합하는 소수의 정전들만 끌어들여 입증한 뒤, 압도적 다수의 ‘예외’들에 눈감는 것이다. 서부극은 일직선의 진화를 단계적으로 밟아온 게 아니라, 당대의 산업적 요구, 시대적 상황, 창작자의 성향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주기적 변화를 거쳐왔다. 갤러거의 결론은 이렇다. 서부극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진화가 아니라 ‘순환’(cycling)이다. 여기서 서부극의 진화론에 대해 더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90년대 이후부터 태그 갤러거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스티브 닐, 피터 스탠필드 등)의 주도로 무성 서부극과 1930년대의 시리즈 서부극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을 도외시했던 기존의 표준적 진화론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로서는 미지의 서부극들이 아닌 존 포드의 정전만으로도 표준적 진화론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점을 함께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다. 이 연재의 3장에서 나는 “존 포드는 ‘고전적’ 감독이 아니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 가설은 이렇게도 바꿔 쓸 수 있다. 존 포드는 고전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약간 까다로운 의제는 서부극의 신화론적 해석이다. 서부극 연구에서 진화론은 최근의 실증적 연구에 의해 도전받아왔지만 신화론은 여전히 의미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서부극에 관한 가장 일반적이고 오래된 통념 가운데 하나는 건국신화론의 관점이다.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에서 직접 도출된 프론티어 경험의 신화적 변용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연구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짐 키츠의 논의(「Horizons West」)다. 키츠 자신은 신화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지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신화론을 일부 차용해 서부극을 일련의 대립항들의 다발로 해석한다. 황야/문명, 자연/문화, 개인/공동체, 자유/구속, 명예/제도, 고결함/타협, 전통/변화, 과거/미래 등이 여러 층위에서 대립하며, 이들은 적대와 상호의존의 이율배반적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샤츠 역시 이 분석 틀을 차용한다. 주창자들이 노골적으로 주장하진 않지만, 이 분석틀은 전자의 계열과 후자의 계열이 각각 한편이 되어 두 진영이 대립하는 장르가 서부극이라는 통념을 낳는다. 나는 이런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느슨한 이 분석틀은, 누구나 쉽게 지적할 수 있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이 분석의 대상은 서사다. 하지만 우리의 탐구 대상은 영화다. 아무리 하찮은 영화라도 그것을 정리한 서사를 넘어선다. 보통의 극영화조차 정태(靜態)의 구조가 아니며 이미지들이 시간적으로 배열되는 동태(動態)의 역학이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이 결함은 심각해진다. 위대한 영화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그것고 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써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서부극을 ‘읽는’ 표준적 신화론이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은 랜드스케이프다. 모든 서부극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랜드스케이프는 서사 외부에 있다. 신화론은 랜드스케이프를 황야 혹은 자연이라는 기호로 환원해 문명 혹은 문화의 대립항이라는 서사적 요소로 둔갑시킨다. 이 해석적 조작의 결과는 기이하다. 이 환원으로 서부극의 서사조차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화론자들이 예시하는 서부극을 포함해 내가 본 어떤 서부극도 가혹한 자연환경과의 투쟁을 부차적 모티브가 아닌 중심 주제로 삼은 영화는 거의 없었다. 서부사나이가 맞섰던 건 주로 탐욕스런 기업가, 사악한 카우보이, 잔인한 인디언이다.(표준적 신화론자들이 황야/문명의 도식에 그나마 들어맞는 쇠스트룀의 < 바람 >(1928)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신화론자들이 황야, 자연으로 환원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야만적’ 인디언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서부극들은 혼돈한 적이 없는 타민족의 영토 정벌과 자연 개척을 오히려 그것의 해석자들이 혼돈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서부극의 통념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비평이 수정주의 서부극의 가치를 과장하는 경향도 고전기 서부극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 이 오인된 해석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오인에 가깝다. 나는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신화론도 서부극 세상을 여행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숙고해야 할 서부극의 진정한 의제가 있다면 그것은 랜드스케이프다. 혹은 존 포드의 모뉴먼트 벨리이다. < 역마차 >의 이야기는 그것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