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문
- 감독
- 신상옥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최은희, 신영균, 한은진, 김동원, 김희갑, 남양일, 송상균, 윤신옥, 김소연, 박순이, 정득순, 안초명, 임예심, 박종화, 이기홍, 최성호, 이성일, 서월영, 임해림, 임동훈, 송일근, 석운아, 최걸, 김맹환, 안준, 이정애
에로 팬들에게 1990년대 초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1988년 유진선 감독의 < 매춘 >을 정점으로 한국의 에로티시즘 영화는 확실히 하향곡선을 그렸고, 이후 < 애마부인 > < 산딸기 > < 변강쇠 > < 빨간 앵두 > < 뽕 > 등 굵직한 프랜차이즈들이 속편을 쏟아냈지만 태작이 대부분이었다. < 사방지 >(송경식. 1988)나 < 애란 >(이황림. 1989) 등 주목할 작품도 있었지만 대세를 막을 순 없었다. 다행히 하향세의 반대편에 에로 비디오가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 젖소부인 바람났네 >(김인수. 1995) 같은 압도적 작품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 틈새에 등장한 이상한 에로 사극 한 편이 있었다. 1993년 여름에 개봉된 양병간 감독의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이하 <무쓰물>)다. 여기서 ‘양병간’이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하다고 느끼셨다면… 맞다. 8년 전 < 무서운 집 >(2015)이라는 저예산 호러를 내놓은 바로 그 감독이다. <무서운 집>의 거친 페티시즘과 느닷없이 몰아치는 분위기의 정서적 근원이 궁금했던 관객이라면 <무쓰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현장의 양병간 감독과 배우 김문희. 양 감독은 1950년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계에 들어와 연출부 생활을 했고 1985년에 < 피조개 뭍에 오르다 >로 데뷔했지만 검열로 인해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진 못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8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작품으로 파격적인 에로 사극이고, 다음 해 미스터리 멜로인 < 태양 속의 남자 >(1994)를 연출했다. 이후 20년 가까운 공백을 딛고 내놓은 저예산 호러 <무서운 집>(2015)은 컬트로 평가 받고 있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지만, <무쓰물>은 조선 시대 설화집 『고금소총』에 수록된 ‘귀봉변괴’(鬼棒變怪)가 원작이다. ‘귀신 들린 방망이의 이상야릇한 일’이라는 뜻으로, 도깨비가 던져 준 양물(陽物), 요즘으로 치면 ‘딜도’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何用物耶)라는 주문을 접하면 건장한 남자로 변해 눈 앞에 있는 여성과 성교를 한다는 판타지 스토리다. 감독은 이 매력적인 소재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두 편의 에로 정전을 끌어왔다. 바로 <변강쇠>(엄종선. 1986)와 <뽕>(이두용. 1986)이다. <무쓰물>은 전자의 ‘과장된 성적 표현’과 후자의 ‘마을을 휩쓰는 섹스 스캔들’이라는, 한국 사극 에로의 가장 중요한 장르 관습을 결합한다. 클리셰를 이용한 안전 장치인 셈인데,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클리셰를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척하면서 위반하고 뒤집는 태도다. 김문희와 이미지의 캐스팅은 이 영화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다. 1960년대 동갑이던 두 배우는 이 영화에서 노련하면서도 섹슈얼한 연기를 해낸다. 이미지는 아쉽게도 2017년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은 한 과부(김문희)와 오 과부(이미지)다. 독수공방을 벗어날 수 있게 정인을 점지해 달라고 매일처럼 폭포수 밑에서 정화수 떠놓고 빌던 한 과부는 어느 날 우연히 집 마당에서 양물을 줍는다. 무심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혼잣말을 하자, 갑자기 상의를 탈의하고 한쪽 다리는 걷은 건장한 사내(이상일)가 나타나 한 과부에게 달려들고, 마을에 지진이 날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의 방사가 치러진다. 나무 막대기에서 11단 변신을 통해 정인으로 변하는 남자 덕에 한 과부의 얼굴엔 화색이 돌고,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오 과부는 그 비밀을 알게 되고, 양물을 훔친 오 과부도 놀라운 경험을 한다. 이후 양물은 마을을 돌아다니게 되고, 결국 여인들과 함께 그 요술 방망이는 관아에 끌려가게 된다. 사또(홍성민)는 양물을 뜨거운 물에 끓이기도 하고 불 속에 넣기도 하지만, 끄떡없다. 결국 단두대를 통해 절단하려는 찰나, 변신이 이뤄지며 등장한 사내는 한 과부를 번쩍 들어 안고 늠름하게 걸어간다. 한 과부가 치성 드리는 장면.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지만, 바위와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교묘한 미장센은 분출하는 성욕에 대한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무쓰물>은 한국의 극장용 에로 사극 끝물에 등장한 전복적 텍스트다. ‘판타지 에로 사극’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환상성을 토대로, 에로 사극에서 여성에 대한 양대 억압 기제였던 ‘은장도’와 ‘열녀문’ 이데올로기를 뒤집는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로 자결하겠다며 욕망을 억압하고, 가부장제에 순응한 대가인 열녀문을 하사 받기 위해 역시 욕망을 억압해야 했던 조선 시대 사극. 이 장르가 항상 그 욕망의 경계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긴장감을 만들어냈다면 <무쓰물>은 그 제약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억압 같은 게 있었어?”라고 반문하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의 아낙네들은 열녀문을 하사 받은 양반댁 마님이든, 여염집의 과부댁이든, 어엿한 남편을 둔 유부녀든, 갑자기 마을에 찾아 든 양물(과 그것이 변한 사내)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집단적 욕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 초반부 어느 양반집 마님이 외간남자를 취한 후 관계가 끝나자 하인들을 시켜 먼 곳에 내다 버리는 설정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하류층의 수절 과부가 노총각이나 홀아비를 납치하는 일(이른바 ‘보쌈’)이 있었다곤 하지만, <무쓰물>은 상류층 여성의 원 나잇 스탠드를 과감하게 영화 첫 장면에 배치하며, 이 영화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상당 부분 이탈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물이 변신한 사나이도 흥미롭다. 일반적인 에로 사극의 돌쇠가 산발 스타일의 순수남이라면, <무쓰물>의 사나이는 상투를 틀었고 항상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서 한쪽 바지는 허벅지까지 걷었다. 헝크(hunk, 덩치가 크고 섹시한 남자) 스타일에 결혼한 남자의 징표인 상투가 있는, 변형된 남창(gigolo) 이미지다. 원 나잇 스탠드와 지골로. <무쓰물>은 이러한 요소를 통해 1980년대 에로 사극과 결별한다. 양물은 11단 변신을 거치며 사나이로 변한다. 돌쇠가 아닌, 헝크이자 지골로 이미지를 지녔다. 이 영화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건 비역질에 대한 묘사다. 양물은 성적 대상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주문에 반응하고, 사나이는 눈 앞에 보이는 존재를 무조건 범하는 터미네이터 같은 존재인데 스님이나 사또도 피해가지 못한다. 특히 관아에서 사또와 이방이 비역질을 당하는 대목은 “찢어졌구만!”이라는 고통 섞인 대사와 함께 한국 사극에선 접하기 힘든 설정이다. 종교와 정치에 대한 반역적 메타포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성적 표현의 수위 만으로도 <무쓰물>은 선을 넘는다. 여기서 <무쓰물>은 애너크로니즘(anachronism)을 통해 확실하게 탈주한다. 번역하면 ‘시대 착오’ 정도가 될 애너크로니즘은 조선 시대 배경 영화에 고려 시대 의상이 등장하는 정도의 고증 오류 수준이 아닌, 좀 더 파격적인 방식으로 <무쓰물>에 확실한 인장을 남긴다. 마을 전체가 양물의 광풍에 휩싸이자, 음란함을 다스리는 음무제(淫撫祭)가 치러진다. 이 장면에서 일반적 사극이라면 무당의 굿판이 벌어지겠지만, <무쓰물>은 놀랍게도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캉캉 춤 추는 장면을 보여준다. 음무제의 캉캉 춤과 해피 엔딩. 이 영화는 사극 장르를 경쾌하게 해체한다. 감히 말하건대 한국영화에서 이런 파격은 없었고, 이외에도 강인구의 전자 음악(그는 <무서운 집>에서도 음악을 맡았음)이나 길로틴의 등장 등은 <무쓰물>의 장르 해체적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나이가 한 과부를 안고 어디론가 가는 대목은 한국 사극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해피 엔딩이자 감동의 피날레다. 부디 두 사람, 행복하시길.
한국영화사에서 사극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하지만 ‘전성기’라는 표현은 이중적이다. 1980년대는 1970년대부터 하락하기 시작한 한국영화 산업이 장기 침체로 접어든 시기. 사극은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주도한 이후 충무로를 대표하는 ‘대작’ 장르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오면, 사극은 과거의 위용에서 멀어지며 양적 팽창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에로티시즘 사극’이었다. 모두 ‘에로’를 지향한 건 아니었다. 전통의 올곧은 계승은 있었다. 사극의 서브 장르 중 하나인 ‘여인 잔혹사’는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이두용 , 1984) < 자녀목 >( 정진우 , 1985) < 씨받이 >( 임권택 , 1987) 등의 수작들을 보유했다. ‘궁중 사극’의 흐름도 건재했다. 이두용 감독은 신상옥의 < 내시 >(1968)를 나름의 스타일로 뛰어나게 리메이크 했다. 신상옥 의 영향력은 여전했는데 그의 < 연산군 >(1961)과 < 폭군 연산 >(1962)을 잇는 < 연산군 >( 이혁수 , 1987)과 < 연산일기 >( 임권택 , 1988)가 등장했다. 계유정란을 다룬 < 사약 >( 김효천 , 1984), 당시 사대부와 왕실을 농락했던 여인의 이야기 < 어우동 >( 이장호 , 1985) 등도 만들어졌다. 임권택의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5)도 빼놓을 수 없는 ‘사대부 사극’이다. 배창호 는 < 황진이 >(1986)에서 미학적 실험을 했고, < 박철수의 헬로 임꺽정 >( 박철수 , 1987)도 당대 사극의 독특한 지점이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 <물레야 물레야> <자녀목> <어우동> <연산일기>. 1980년대 ‘A급 사극’의 계보. 여기까지는 1980년대 나름의 ‘A급 사극’ 리스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사극’, 즉 ‘B급 사극’, 좀 더 구체적으로 ‘에로 사극’ 이야기를 하려 한다. 1980년대 에로 지형도에서 사극이 처음부터 야한 기운을 얻은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초엔 홍콩과의 합작이나 위장합작을 통해 만들어진 무협 사극이 쏟아졌고, < 팔불출 >( 고응호 , 1980)처럼 코미디나, 호러 장르 혹은 종교 영화 등과 결합되었다. 변화의 조짐은 1980년대 중반에 보였다. <어우동>과 < 변강쇠 >( 엄종선 , 1986)는 에로의 원투 펀치와도 같은 결정타였다. 특히 <변강쇠>는 모든 것을 규정했다. 이 영화의 변강쇠( 이대근 ) 이후 절륜한 정력을 지닌 거구들이 스크린에 횡행했으며, 옹녀( 원미경 ) 이후 독거미처럼 남성을 옭아매는 치명적 성욕의 소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와 민속의 장이었던 사극은 바야흐로 적나라한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변강쇠>의 시작은 의외로 근엄하다. 18세기 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변강쇠>는 이 영화의 의의를 설명하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성 윤리의 해학적 의미의 참뜻을 에로티시즘으로만 간과하려는 상업성을 탈피하면서, 그 시대의 유랑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서사적 영상미로 승화시켜 무분별한 성은 곧 자기 파멸이라는 교훈을 던짐으로써, 우리 고전의 진정한 의미를 오늘에 재조명하고자 한다.” <변강쇠>는 1980년대 에로 사극의 모든 것이었다. 이 영화는 변강쇠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옹녀의 유랑으로 끝을 맺는다. 다소 중언부언하는 서론이지만, 판소리 <가루지기전>을 원작으로 하는 <변강쇠>는 에로티시즘을 해학과 교훈의 방식으로 다루겠다고 선언한다. 해학이라 한다면 정사로 산이 뒤흔들리며 옹녀 때문에 줄초상이 나 한 마을 남자의 씨가 마르는 식의 과잉된 성적 표현일 것이다. 한편 교훈이라면 술에 취해 장승을 뽑은 변강쇠가 신령에 시달리다 죽게 되는, 정력의 과시가 불러온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에로 사극은 교훈보다는 해학에 방점을 찍으며 < 고금소총 > 시리즈( 지영호 , 1988~95) < 호걸 춘풍 >(이혁수, 1987) < 이조 춘화도 >( 박호태 , 1988) < 껄떡쇠 >( 김진국 , 1989) < 후리꾼 >(최거영, 1991) 등 ‘호색한’이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사를 벌이는 영화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에로 사극의 위대한(!) 점은 단지 남자의 욕망만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변강쇠>에서 더욱 흥미로운 캐릭터는 옹녀다. 변강쇠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의 딜레마는 언제나 욕정의 결핍 상태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녀와 관계를 가진 남자는 모두 죽는다. 남성의 죽음을 담보한 섹스의 히로인 옹녀. 그녀는 언제나 겁탈이나 보쌈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는 수절 과부의 반대편에 있는 공격적 섹슈얼리티의 여성이다. <변강쇠>의 첫 장면, 옹녀는 첫날 밤에 스스로 옷고름을 풀고 남성의 옷을 벗기고 불을 끈다. 첫날 밤 장면은 과거의 사극에서 숱하게 반복되었지만, <변강쇠>의 옹녀는 그 관습을 과격하게 파괴하는 적극성을 보여주며, 이어지는 정사 신에서도 그녀가 섹스를 리드한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과 궁합이 맞는 남자를 직접 찾아 나선다. 이대근은 1980년대 에로 사극의 간판 스타였다. (왼쪽부터) <호걸 춘풍> <고금소총> <가루지기>의 이대근. 변강쇠뿐만 아니라 옹녀 캐릭터도 이후 후손들을 거느리며 이른바 ‘궁합 장르’, 즉 강한 양기와 음기를 지닌 남녀가 드디어 만나 완벽한 궁합을 이룬다는 내용의 영화들이 등장한다. < 속 변강쇠 >(엄종선, 1987) < 변강쇠 3 >(엄종선, 1988)를 비롯 < 가루지기 >( 고우영 , 1988) < 합궁 >( 남기남 , 1988) < 고금소총 2 >(지영호, 1990) < 색녀도 >(박호태, 1990) 등이다. 옹녀가 영감을 준, 에로 사극의 또 다른 흐름은 ‘유랑녀 서사’다. 이것은 <어우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마치 ‘호스티스 멜로’를 연상시킨다. 가난, 집안의 몰락,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공동체의 추방…. 여러 이유로 떠도는 여성은 결국 몸을 팔게 된다. 여성의 운명성을 에로티시즘과 결합한 컨셉트로, < 됴화 >( 유지형 , 1987)는 아예 저주를 타고난 여성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후 < 호호전 >(박호태, 1988) < 들병이 >( 유진선 , 1989) 등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에로티시즘’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긴 했지만, 에로 사극 역시 사극 장르의 한 갈래였고,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테두리를 벗어나진 못했다. 즉, ‘계급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이 장르의 많은 것을 규정했고, 여기서 만들어진 긴장 관계가 오히려 에로티시즘 강화하기도 했다. 이른바 ‘씨받이 장르’는 대표적이다. 반드시 남자를 통해 대를 이어야 했던 조선 시대, 양반들은 대를 잇기 위해 소실을 두거나 오로지 아들 생산을 위한 도구인 ‘씨받이’를 두곤 했다. 이 설정에서 수많은 변주가 이뤄졌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대표적. <변강쇠> 시리즈의 엄종선 감독이 만든 < 사노 >(1987)은 숨겨진 수작인데, 나이 든 양반이 하녀 오월(원미경)를 건드리자, 그녀와 결혼을 약조한 머슴 들판(이대근)은 오월을 데리고 도주한다. 이외에도 < 잦은 방아야 >( 김병기 , 1989) < 살꼬지 >( 김인수 , 1989) < 요화경 >(박호태, 1988) < 소녀경 >(박호태, 1992) 등이 있으며 < 빨간 앵두 > 시리즈는 3편(박호태)에서 갑자기 사극으로 선회해 씨받이 이야기에 <변강쇠> 콘셉트를 결합한다. <변강쇠>로 신드롬을 일으킨 엄종선 감독, 이대근, 원미경이 다시 만난 <사노>는 숨겨진 수작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서늘하면서도 통렬하다. 씨받이만 있었을까? 아니다. 대를 잇지 못하는 집안에서 그 문제가 남자 쪽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마님과 은밀하게 통정할 ‘씨내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주로 튼실한 머슴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이 분야 최고의 걸작. 하지만 이후 에로틱해지면서 약간은 <변강쇠> 톤으로 변했고, <소녀경>에선 씨받이와 씨내리가 관계를 맺는 단계에 이른다. 이외에도 < 홍두깨 >( 김준식 , 1990) < 씨내리 >(남기남, 1993) 등이 있다. <씨받이>처럼 여성의 육체(자궁)을 어떤 도구로 이용했던 과거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도 있었지만. 씨받이와 씨내리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그 자극적 캐릭터로 인해 대부분 선정주의와 소재주의로 치달았다. 그러면서 개척된 분야가 이른바 ‘회춘녀’ 장르다. < 어울렁 더울렁 >( 차성호 , 1986)은 그 시작. 이른바 ‘목밀녀’, 쉽게 말하면 ‘대추녀’ 순이( 김문희 )가 주인공이다. 대추녀는 양반들이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둔 스무 살 정도의 하녀로, 아침에 여성의 그곳에 대여섯 개의 대추를 넣었다가 저녁에 꺼내먹으면 젊은 여성의 기를 받아 정력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씨받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육체를 도구화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종종 몸을 묶는 SM 관계의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소 변태적인 설정이지만, “올해 같은 흉년에 살아남기가 쉬운 줄 아느냐!“라는 양반의 호통 앞에선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유랑녀’처럼 ‘대추녀’도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 목밀녀 >(차성호, 1988) < 회춘녀 >( 방순덕 , 1989) < 춘화춘풍 >( 최기풍 , 1990) <소녀경> 등 적잖은 영화들이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조 춘화도>나 <고금소총> 같은 영화들인데, 이 영화에서 긴 세월 동안 병을 앓던 여성들은 섹스를 통해 그 병을 치유한다. ‘회춘녀’의 반대편엔, 여성의 묵은 성욕을 해소시켜 주던 ‘육봉남’들이 있었던 셈이다. (왼쪽) <홍두깨>는 씨내리 장르의 영화다. (오른쪽) ‘대추녀’ 장르의 시작인 <어울렁 더울렁>. 이 장르는 종종 SM 컨셉트로 흐르곤 했다. 가부장적 계급 사회가 만든 또 하나의 캐릭터는 수절하는 젊은 과부다. 언제나 은장도를 꺼내 들고(하지만 자결하진 못한다), 열녀문 기둥을 어루만지는(결국 그것은 무너지게 된다) 그녀들은 1980년대 에로 사극의 가장 모순적 인물들이었는데, 그들은 시대의 규율에 의해 한없이 욕망을 억눌러야 했지만 결국 본능을 선택한다. < 마님 >(김인수, 1987)는 이 분야의 전형적인 작품. 마님(김문희)은 몇 년 째 수절 중이며 열녀문을 하사 받은 정숙한 여자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절을 찾아 불심에 호소하지만 욕망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하인( 백일섭 )은 마님을 사랑하지만 이때마다 마님은 “이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게냐!” “그래도 이놈이!”라며 물리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얼싸안게 된다. 김인수 감독의 <마님>. 마님과 머슴은 결국 맺어진다. 그러나 과도한 억압은 반드시 저항과 전복을 낳게 된다. 욕망은 절대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인데, < 사방지 >( 송경식 , 1988)은 레즈비어니즘을 통해 이러한 테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흉악범과 광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방지( 이혜영 )는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남성을 지닌 양성구유다. 절에서 성장하는데 예불 드리러 오는 청상 과부 이소사( 방희 )는 사방지를 거두어 몸종으로 데려가지만, 그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섹스 파트너로 삼는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사방지>는 수절하는 마님, 계급 사회의 모순, 여성의 운명성 같은 사극의 관습을 계승하면서도 파격을 추구하며 ‘여인 잔혹사’의 서사에 균열을 낸다. 이외에도 < 이조 여인숙명사 청상계 >( 윤석봉 , 1991)나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양병간 , 1993)처럼 과부의 욕망을 해방시킨 ‘안티 열녀문’ 콘셉트의 사극도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계급 사회 속에서도 욕망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들이 만만치 않게 존재했다는 점이다. 양반집 마님이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며 긴긴 밤을 외롭게 보낼 때, 옹녀나 도화 같은 ‘타고난 성적 파워’를 지닌 여성이나 무당이나 주모 혹은 하녀들은 거침 없이 방으로 남성을 끌어들였다. 1980년대 가장 파격적인 사극 <사방지> 마지막으로 언급할 이 시기 에로 사극의 특징은 느닷없는 판타지다. < 변강쇠 2 >(엄종선, 1987)에서 변강쇠(김진태)가, <가루지기>에서 옹녀(김문희)가, 소변으로 폭포를 만든 후 수많은 영화들이 이 엄청난 과장법을 예사롭지 않게 모방했다. 시간 파괴의 경향도 흥미로운 지점인데, <호걸 춘풍>에서 춘풍(이대근)은 기생들과 디스코를 추며 “백 년 후에 유행할 춤”이라고 말하고, < 장미 속의 살모사 >(강구연, 1989)의 머슴 살모사( 조형기 )는 ‘라 밤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를 추기도 한다. 강구연 감독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993)에서도 이런 파격을 시도하는데, 조선 시대 여인들이 캉캉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 고금소총 3 >(지영호, 1995)과 < 애마와 변강쇠 >( 김문옥 , 1995)는 타임머신 콘셉트를 이용해, 배지기나 변강쇠 같은 캐릭터가 현대의 필리핀과 서울에 나타나 자신의 파워를 과시한다. 1980년대 사극의 파격적인 상상력들. (상단) <빨간 앵두 3>과 <애마와 변강쇠>. 현대로 온 배지기와 변강쇠. (하단 왼쪽) <장미 속의 살모사>에서 기생은 현대식 속옷을 입고 있다. (하단 오른쪽)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의 캉캉 춤. 당대 에로 사극의 시그니처 숏인 ‘방뇨 신’. (상단 왼쪽) 그 시작은 <변강쇠 2>였다. (상단 오른쪽) <고금소총>에서 달비의 강력한 방뇨. (하단 왼쪽) <합궁>에서 남자의 힘찬 방뇨와 그것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 (하단 오른쪽) <미지왕>(1996. 김용태)은 1980년대 에로 사극의 방뇨 신을 패러디한다. 어쩌면 1980년대 충무로 지형도에서 에로티시즘 사극은 가장 과격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가장 욕망에 충실했으며,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작품을 양산했던 장르였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가 등장하면서 사극은 10년 가까이 종적을 감추었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 이재용 , 2003)나 < 왕의 남자 >( 이준익 , 2004) 등을 통해 ‘웰메이드’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과거 ‘B급 사극’의 저렴하면서도 진솔한 상상력이 되돌아오진 않았고, < 가루지기 >( 신한솔 , 2008) 정도의 시도가 있을 뿐이었다. + 이로써 작년 말부터 시작된 1980년대 장르 영화에 대한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그리고 가끔씩 피드백을 주셨던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지면을 열어주신 한국영상자료원에게도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콘셉트로 옛날 영화들을 정리할 날을 기약하며, 10회에 걸친 연재를 닫는다.
.... 요란한 총성과 함께 출동하는 사이도 카와 기마헌병대들이 심야의 장안 거리를 뒤흔든다. 1920년대, 사이도 총독의 폭살미수사건으로 투옥된 강우규 의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성우 선생 지도하에 조직된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폭파한 독립밀사에서 취재한 민족수난사의 한 페이지. 조국에 발붙일 길 없이 만주로 망명하는 학생 일단들의 처절한 레지스탕스가 액션 푸레이로 전개된다. 핍박받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러브 로맨스를 겻들여 엮은 활극이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민족애와 저항의지들이 쓰라린 회상을 되살린다. 이야기는 서울을 탈출한 학생단들이 산줄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기까지, 이들을 쫓는 이리떼와도 같은 일본 헌병대들과 그들의 주구(走狗)들과의 산악혈전이 이 영화를 피로 물들인다. 리얼한 박력감을 주는 총격전과 설상(雪上)에서 전개되는 스키전이 색다른 취향. 중간에서 템포가 처지고 설명조의 컷트 구성은 미숙하지만 신인 임권택 감독은 소지를 보인다. 이러한 액션 드라마에는 특히 시간 계산과 숨 쉬는 요령이 필요. 오락도 겸하여 청소년들의 역사교재로 해롭지 않다. 동아일보, 1962년 2월 5일자. (이 글에서 현재의 표기법과 다른 것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나는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가 막 개봉했을 때 한국을 느껴보고 싶다. 박정희가 일으킨 5월 16일 쿠데타가 막 성공한 이듬해. 그해 1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그 해 3월에는 윤보선씨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증권 파동이 일어나고 그해 6월 화폐단위가 ‘환’에서 (지금의) ‘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다음 박정희 씨가 대통령 출마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런 다음 이듬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직에 당선하였다) 임권택은 여러 차례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때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그해 1월 20일에 처음으로 영화법이 발효되었다. 한국영화사에 차례로 걸작이 도착하였다. 1960년에 김기영 의 < 하녀 >가, 그리고 그 이듬해 유현목 의 < 오발탄 >이 만들어졌다. 두 편의 거의 결정적인 영화. 두 편 사이에 놓여있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불안정한 긴장. 한국영화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 형식의 기호들. 같은 해 이만희 가 < 주마등 >으로 데뷔하였다. 그때 한국영화의 중심에는 제국이라고 불러야 할 신필름이 있었고 신상옥 은 한국영화의 황제였다. 그는 이미 예술적으로 절정에 올랐으며 (< 꿈 >(1955년), <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8년), < 지옥화 >(1958년),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년)) 대중적으로도 성공하였다. (< 로맨스 빠빠 >(1960년), < 상록수 >(1961년)). 그리고 그해 < 연산군 >을 찍었다. 이 영화는 한국 사극영화의 거대한 모델이 되었다. 나는 조금만 더 1962년의 한국영화들을 호명하고 싶다. 그해 한국영화의 풍경. 신상옥 의 < 열녀문 >은 그가 끝내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미조구치 겐지와 같은 예술적 비전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여인들의 숨결과도 같은 카메라의 선. 사건과 동선의 넘쳐나는 힘으로 가득 찬 건축 안의 구조들. 그때 집은 풍경과 뒤섞여버린다. 그 안에서 무엇보다도 비극. 그리고 다시 비극. 박상호 는 < 산색시 >를 만들었다. 한국영화사가 종종 잊어버린 이름들. 조긍하 의 < 아까시아 꽃잎 필 때 >. 최훈 의 < 양귀비 >. 누군가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무언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유현목 의 < 아낌없이 주련다 >. 그런 다음 이만희 의 < 다이알 112를 돌려라 >. 지금 막 시작한 임권택으로부터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이름. 충무로에서 마주쳤을 때마다 아마도 느꼈을 감정들, 그리고 인상.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들었다. 임권택 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는 같은 영화사인 한흥영화사에서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찍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 같은 영화사. 우연의 일치.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만희가 힛치콕에게 끌리는 동안 임권택은 그 이름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특히 < 싸이코 >. 그 대신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의 수준에 이르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이만희가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 배우는 동안 임권택은 펠리니에게 이끌렸다. 아직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놓여있었다. 부산에 피난 가서 보았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경험을 가진 세대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 도착한 다음 한국전쟁을 거쳐 나머지 절반을 문화적으로 점령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와 만나서 비로소 보게 된 1950년대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영화들로부터의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누벨바그 영화들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 네 멋대로 해라 >가 개봉하고 그 영화는 그 어떤 한국영화 감독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보지 못했다. 브레송의 <저항>은 개봉했지만 베르히만을 보지 못했다. 안토니오니의 <정사>는 개봉했지만 펠리니의 < 달콤한 인생 >은 보지 못했다. 그해 임권택 자신이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른 정창화 는 사극 < 칠공주 >를 연출하였다. 임권택은 그의 아래서 1956년 < 장화홍련전 > 제작부 일을 한 다음 이듬해 < 풍운의 궁전 >에서 소품부를 거쳐 58년 < 비련의 섬 >으로 연출부가 되었다. 그런 다음 1960년 < 햇빛 쏟아지는 벌판 >에서 조감독이 되었다. 그 후 네 편의 영화를 더 조감독을 한 다음 < 장희빈 >을 끝으로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는 정창화 이외의 다른 감독 아래서 연출부를 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의 시작. 가장 첫 번째 영화. 말하자면 임권택이라는 좌표의 원점.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한흥영화사의 여덟 번째 영화이다. 한흥영화사는 액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 영화사에서 정창화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조감독 임권택을 눈 여겨 본 다음 그에게 데뷔작을 맡겼다. 말하자면 주어진 선택. 임권택은 “아마도 연출부 생활을 꽤 똘똘하게 하고 자신이 만든 예고편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이 시기의 한국영화는 대부분 흑백촬영의 시네마스코프였으며, <두만강아 잘 있거라>도 역시 그러하다. 시나리오와 촬영, 그리고 배우 모두 영화사가 결정하였다. “내가 데뷔 감독이니까 경험 많은 촬영이랑 스타 배우들을 붙여준 거지요. 주연인 김석훈 씨는 정창화 감독 연출부할 때부터 잘 알던 배우였구요” 종종 임권택은 자신이 영화를 연출하는 모든 방법을 정창화에게서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가 연출부를 하는 동안 정창화는 전쟁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영화를 아무리 여러 번 만들어도 자기가 만들어보지 않은 장르의 현장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임권택의 첫 영화이자 동시에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전쟁영화이다. 물론 이 말은 다소 조심스럽게 꺼내들어야 한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액션활극이며, 그 중에서도 말과 총격전이 이어지는 웨스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니고 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독립군 액션활극. 이 범주에 속한 영화들이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과 만나면서 ‘만주 웨스턴’으로 잡종 장르가 되었지만 1962년은 셀지오 레오네가 이 장르의 첫 번째 영화인 < 황야의 무법자 >를 만들기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 이 영화들을 서부극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가 서부극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 황야의 독수리 >를 설명할 때 임권택은 그 영화를 ‘사실상 서부극’이라고 불렀다) 혹은 독립군들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은 아직 서부극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장르의 공간으로서의 만주. 불가능한 장르의 장소로서의 만주.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반드시 그 곳에 가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에서 그냥 끝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들은 아직 역사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직도 살아있는 신체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안의 멜랑꼴리. 해방이라는 단절.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 전체의 경험. 그러나 1962년은 1945년으로부터 고작 17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시간이다. 이때 나는 독립군이라는 역사 속의 ‘실재하는’ 인물들이 한국전쟁 이후 근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1962년의 남한 대중들에게 어떤 ‘상상적’ 이미지로 남았을까, 를 상상해본다. 두 개의 상상 사이의 거리.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뉴멘트 벨리의 카우보이가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잃어버린 조국. 대의명분이라는 비전. 그들은 누구보다도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때 1962년의 관객들은 만주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북한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불구가 되어버린 국토. 헤어진 사람들. 헤어진 시간, 저 너머. 고향이라는 호명. 그러나 지금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 17분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는 1시간 38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39분. 물론 이 슬픔은 이 영화만의 비극은 아니다. 시나리오가 남아있긴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보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이 시나리오 대부분을 고쳐가면서 찍었어요. 그때는 모두들 그렇게 만들었어요. 급하게 시나리오가 나왔고, 그런 다음 감독과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작가는 이미 다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거예요. 던져 놓으면 알아서 찍어야 하는 거지요. 그때부터 나는 시나리오를 고쳐가면서 찍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나는 슬픈 마음을 안고 단지 이 영화를 느껴본 다음 남은 프린트만으로 이 영화의 기분을 막연하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영우와 경애 민사장과 경애 첫 영화를 보았을 때 나의 첫 인상. 내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처음 보았을 때 난처해진 것은 단지 ‘사라진 39분’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일부는 아마도 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장황하고도 끝없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으면서 연속적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기구 절창한 이야기를 금방 요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들을 잘 기억하실 것. 그런 다음 이야기의 선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 줄을 놓칠 때 이 영화의 질서들과 규칙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중으로 나눈 다음 다시 거기서 몇 개의 가닥으로 나뉘어 나간 사건들의 연쇄 망. 이야기는 두 개의 선을 따라간다. 하나는 영우의 선이다. 그는 독립군이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홀어머니를 둔 학생이다. 그에게는 경애라는 애인이 있다. 경애는 일본군에게 독립군을 밀고하는 민사장이라는 삼촌과 살고 있다. 경애는 영우의 아이를 임신한 지 2개월이다. 그는 지금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한 다음 독립군에게 합류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창환과 연화 연화와 현구 영우와 창환 다른 하나는 창환의 선이다. 창환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멀리 떠나있지만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돌아온다. 창환에게는 연화라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 연화에게는 현구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도 역시 독립군 활동을 하고 있다. 연화는 요정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일본군 대장인 와까노가 한눈에 보고 반해서 치근덕거리기 시작한다. 영우와 창환이 같은 독립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금방 이 두 개의 선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단 하나로 모은 다음 이들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두만강에서 합류하기 위해서 다시 둘로 나뉘어서 두 개의 선으로 황해도 구월산을 지나 두만강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이야기는 거기서 둘로 뻗어나가는 대신 다시 경애와 연화의 선으로 분리되어 나온다. 영우의 선으로부터 빠져나온 다음 바깥으로 이어진 선. 경애가 영우에게 빌려온 책 속에 있었던 사진을 훔쳐서 밀고한 민사장 때문에 동료와 어머니가 체포되자 영우는 경애가 배신했다고 오해하고 이별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받은 경애는 민사장의 돈을 훔쳐서 영우를 찾아 나선다. 다음, 창환의 선으로부터 이어진 선. 연화는 일본군 헌병대장 와까노로부터 정보를 얻으려하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자 동생 현구와 남편 창환을 찾아서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 네 개의 선. 그러나 이들 선 사이의 관계를 다시 복잡하게 뒤섞는 것은 와까노의 앞잡이 노릇을 민사장이 하고 있고, 민사장은 경애를 뒤쫓으면 독립군들의 활동 본거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나설 때이다. 마치 수직으로 이어진 선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지는 선. 그러나 이 선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예민하게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미줄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 하나가 그 줄을 건드리면 중심에 있는 거미에게 전달되어 신속하고 재빠르게 쇼트의 시스템 전체가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이들 선 사이는 종종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의 선이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선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거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많은 인물들을 어떻게 일제히 작동시킬 수 있을까. 이 사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공명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임권택 은 이야기 안에서 방법을 찾는 대신 인물들이 속한 상황을 잘게 부순 다음 그들 사이를 교차 평행편집으로 연결해나가기 시작했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영화 전체가 마치 유일하게 거대한 교차 평행 편집이 활동하는 기계처럼 보일 정도이다. 종종 이것이 반복적으로 연결되고 둘 사이의 평행이 시간적으로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지만 이 모든 선들이 하나의 장소, 두만강으로 수렴되기 시작할 때 이 씬들 사이에 놓여있는 칸막이는 점점 좁혀져오기 시작한다. 물론 시네마스코프는 쇼트를 교차하기에 유리한 프레임이 아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쇼트 대신 씬이 교차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교차는 서로 직접적인 대신 서로 다른 단위의 집합들이 오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우는 경애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창환은 연화와 씬 안에서 만날 때에만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멀리 있는 동안 그들 자신을 전달할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평행편집은 항상 이 모든 씬이 이야기 전체의 부분 집합이며, 나머지를 상실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교차는 교집합이 아니다. 이때 잃어버린 상실을 찾아서 ‘그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한’ 이야기가 항상 이미 선택되어진 인물들 사이로 옮겨 다닌다. 씬 사이에 이루어진 칸막이. 교차 평행편집은 언제나 이야기 안에서 분배의 계산법에 따른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임권택의 연출은 이 계산법에 있다. 그는 어떻게 계산을 하는가. 그 계산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그 안에서 분배는 올바로 되어있는가. 이때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 이때 이들이 그러는 동안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충하고, 다른 하나가 또 다른 하나로 뻗어나간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는 마치 그 사이에 그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종종 이 계산은 지나치게 단순할 때도 있고, 때로는 셈을 망설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우가 산에서 길을 잃은 다음 산골지기 노인과 그 딸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딸이 영우에게 이끌리기 시작할 때. 말하자면 거기서 뻗어나간 또 다른 선. 이때 원래의 이야기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서 이 씬 안으로 경애가 뛰어 들어오는 것은 이 얼마나 기계적인가. 도식적인 설명. 두만강에 가기 위해서 다시 교차 평행편집을 작동시켜야만 한다. 여기서 멈추면 반대편 창환의 씬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에서 자기 영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임권택의 영화가 오로지 구성의 리듬 안에 자리한 교환 장치만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이 영화의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어쩌면 모든 영화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립시키는 순간영화는 아름다워진다. 힛치콕의 < 새 >에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시선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둥지의 성>에서 안개 속을 걸어오는 숲.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던 1962년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두만강을 앞에 둔 눈 내린 계곡에서의 총격전 스펙터클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용인 스키장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아직 녹음실에 있을 때 기사에 따르면 “5백여 스키여를 동원했고, 5만 여발의 뇌관을 소비하는 등,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도 1백만 환이 넘었다는 화제의 영화가 15일 촬영을 끝내고 목하 녹음중인 바”(조선일보 1962년 1월 18일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 5백 명에 이르는 스키 부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기사에서는 치료비가 2백만 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런 문제를 따져 물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차라리 더욱 더) 현재의 프린트로는 불가능하다. 이 시퀀스 전체에 이르는 대부분의 프린트가 손상되었으며, 일부 디지털 복원된 장면들은 현재 스틸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장면들이 있으며, 우리들이 지금 볼 수 있는 장면은 전체의 구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아름답다. 내가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그냥 그게 첫 인상이었다. 갑자기 영화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부터 빠져나온 것처럼 완전히 다른 환경의 장소 속으로 들어간다. 영우와 창환, 경애, 연화, 심지어 민 사장조차 종종 그들은 숲에서 길을 잃기도 하였다. 미로에 가까운 이야기의 선.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들로 갇힌 것만 같은 가로막길. 끈질기게 일본군 헌병대의 추적이 이어지고 그들은 하나씩 죽어갔다. 연화의 동생이 총상 당할 때 문득 떠오르는 질문. 결국 이렇게 모두들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선이 끊어져버린 것만 같은 중단. 무엇보다도 어둠과 그림자, 실내 공간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던 거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교차 평행편집. 그런데 마치 이야기의 침점처럼 두만강으로 모이자 이제 교환 장치의 작동은 멈추었다. 그런 다음 산은 눈부실 정도로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흑백화면이 주는 전체를 차지하는 하얀 색과 부분적인 검은 색. 우리는 이 장면이 시작하기 전 눈 오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산과 강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아니, 차라리 여기를 눈이라는 대지로 이루어진 땅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마치 이 씬을 보는 순간 어떤 공간 이동이 벌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물론 이 장면이 말이 안 된다고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조차 이 장면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장면을 눈 위에서 벌어지는 스키 부대의 액션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설원에서의 전투장면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 영화에 등장했던 그 모든 인물들이 모두 죽기 위해서 마치 이 장면으로 모여든 것만 같은 인상을 줄 정도이다. 악인도, 선인도, 우리 편도, 저들도, 아니, 이들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전멸의 테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이 전멸의 테마를 반복해서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의 이 장면은 두 번의 전투로 나누어져 있다. 독립군들은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전투를 하지만 이들이 위기에 빠진 순간 산 저편에서 어디선가 갑자기 스키부대가 나타나 이들을 물리친다. 산 전경을 보여주는 롱 쇼트.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스키 부대.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일본군 헌병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스키 부대. 두 개의 힘의 충돌. 이 힘의 운동 방향은 이미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 짓는다. 이들은 승리의 만세를 부른다. 그들이 얻은 승리. 하지만 잠깐 동안의 기쁨에 찬 만세. 뒤 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더 많은 일본군 헌병대가 이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두 번의 반복적인 어디선가. 그러나 반대의 방향, 더 많은 숫자의 군인들. 거의 화면 아래를 모두 채우다시피 한 숫자. 승리의 화면은 갑자기 여기서 균형을 잃고 이 승리를 불길하게 만든다. 영화의 약속. 여기에는 어떤 중재의 가능성도 없으며, 반전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때 이 전투는 가망 없는 전멸로 이끌린다. 이제 남은 건 필사적인 총격전뿐이다. 일단 먼저 준 다음 다시 뺏어가는 승리. 이들은 여기서 서로 죽이고 죽어간다. 우리들을 이끌었던 하나의 선 영우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때 하나의 선은 거기서 끝날 것이다. 그 대신 거기서 이어지는 경애의 선이 희미하게 남는다. 가까스로 여기에 도착한 연화도 총에 맞아 죽는다, 이제 창환의 선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때 여기까지 가까스로 온 연화(와 창환)의 어린 아들의 선이 그들 사이를 겨우 이어간다. 물론 그들을 여기까지 쫓아온 일본 헌병대 대장 와까노도 죽는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조차 우리는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넓은 설원의 계곡을 가득 메우는 것은 시체들뿐이다. 너무 많이 죽어서 이제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때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이들의 전멸에 어울리는 이미지이다. 이 절망적인 액션의 스펙터클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들의 피 흘리는 전투에 대해서 그저 무심한 자연의 하얀 눈이다. 그리고 흑백화면 위로 펼쳐진 더 하얀 색으로 화창한 하늘.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립군의 승리도 없고, 일본 헌병대의 야만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이야기의 선이 일제히 중단되어버렸다는 망연자실한 순간의 장면을 마주할 뿐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자기가 이제까지 이끌고 온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다시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단.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네 명 뿐이다. 창환과 경애, 그리고 창환의 어린 아들. 그런 다음 독립군 중의 그 누군가. 나는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만으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영화중의 그 어떤 선을 타고서 여기에 온 인물이 아니다. 시체들이 펼쳐진 스펙터클의 풍경. 이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표면만을 건드리고 싶다. 임권택은 거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 속에서 그런데 왜 눈 쌓인 이 계곡의 오후는 이렇게 아름답지, 라고 내게 묻는 것만 같다. 그 풍경의 오류는 오로지 역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뿐이다.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 수 없는 검은 점. 나는 이 스펙터클의 풍경을 볼 때마다 자꾸만 기하학적인 도면을 보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임권택 이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말레비치의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이다. 그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이 돌아서서 이 장면을 본 다음 물어보는 것만 같다. 혹시 그 검은 점들은 당신이 멀리서 바라보는 역사 안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하기도 싫은) 실재 속에 남겨진 블랙홀들은 아닌가요. 그 검은 점들은 계속해서 돌아오고 또 돌아올 것이다. 임권택은 지금 막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그 해 1962년. (계속) 1962년 99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한흥영화사 각본 유한철 각색 정진우 촬영 최호진 음악 박춘석 미술 원제래 편집 김희수 김석훈 영우 황해 창환 문정숙 연화 엄앵란 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