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트
- 감독
-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한느 아그슨, 버짓 페더스피엘, 에밀 하스 크리스텐센, 카이 크리스텐센, 프레벤 레어도르프 라이, 헨릭 말베르그, 게르다 닐슨, 안 엘리자베스 루드, 오베 루드, 수잔 루드, 키르스텐 안드레아센, 실비아 에크하우센, 이즈너 페더스필, 헨리 스캐, 엘렌 트랜 노비
2012년 4월 부산 중앙동에 개소한 모퉁이극장은 올해 6년 차를 맞이한다. 그동안 관객잡지를 두 권 펴냈고, 국내 최초로 관객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관객들이 주축이 되어 활약하는 다양한 영화프로그램을 만들어오고 있다. 이 활동들을 한정된 지면에 담아내기 어려워 고민하던 중 모퉁이극장이 말하는 관객이 어떤 것인지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간접적으로나마 이 글이 모퉁이극장의 관객운동에 주목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관객잡지를 만든 이야기라든지 모퉁이극장에서 운영하는 관객문화교실, 애프터시네마클럽, 관객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고 싶다. ‘영화의 관객들에게 ★ 모퉁이극장’ 이것은 모퉁이극장이 시작된 2012년부터 서명처럼 사용해온 문구이다. 이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모퉁이극장에서는 관객을 ‘영화의 관객들’이라고 부르는데, 관객운동을 준비하던 즈음인 2011년, 영화제를 다니며 접한 영화와 강연을 통해 그 단서를 얻었다. 관객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방향 모색을 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관객’이라는 어휘였다. 모퉁이극장에서 말하는 관객이 매스컴에서 소개되는 천만 관객과 같이 통계적 수치로 수렴되는 익명적 존재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관객을 말하는지 제대로 전할 수 있어야 했다.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부산영화포럼(BCF) 발제자로 왔던 영화학자 더들리 앤드류(Dudley Andrew)는 < 400번의 구타 >의 바다와 < 우게츠 이야기 >의 바다를 보여주며 “이 바다와 이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말로 누벨바그에 대한 설명을 대신했다. 그 방식이 매우 영화적이어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누벨바그가 당시 프랑스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본영화의 새로운 미학적 시도들 속에도 있었다고 했다. 영화학자 더들리 앤드류가 누벨바그를 설명하면서 보여준 < 400번의 구타 >와 < 우게츠 이야기 >의 바다 이미지 그해 겨울에는 영화의 전당에서 개관 기념 영화제가 열렸다. 그때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프랑수아 트뤼포에 관한 강연을 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의 시민권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화가 동등하다고 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견해를 전해주었다. 지금 세세한 내용까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 오데트 >와 진 켈리, 스탠리 도넌 감독의 < 사랑은 비를 타고 >가 같은 해인 1954년에 나왔다. 하지만 이 두 영화 중 어느 영화가 더 뛰어난 작품인지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로 이루어진 세상이 있다면 모든 영화들은 세상에 나오면서 고유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저마다 평등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영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의 영화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의 설명을 통해 영화의 시민권이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모든 영화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는 내용이 담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평론집 개관 기념 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장 뤽 고다르의 < 영화사 >에서는 “이탈리아 영화가 위대한 것은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 단테와 레오파르디의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내레이션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국내 출시된 DVD에서는 '언어가 형상으로 승화되었다'고 번역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더들리 앤드류가 ‘이 바다와 이 바다가 이어져 있다’고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Histoire Du Cinema(1997)에 인용된 이탈리아 영화들 그렇다면 < 400번의 구타 >의 바다가 < 우게츠 이야기 >의 바다로 이어지는 이 운동성이 곧 누벨바그의 본질이 아닐까.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으리라는 점에서 누벨바그는 어느 한 시대의 영화사조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영화의 정신, 태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장 뤽 고다르의 생각처럼 이탈리아 영화들이 위대한 것이 그 영화들에 선조들의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면, 관객들에게도 그 정신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정성일 평론가가 전해준 트뤼포의 ‘영화의 시민’, 앤드류 더들리가 보여준 ‘이어져 있는 바다’의 이미지, 그리고 장 뤽 고다르가 들려준 ‘영화에는 정신이 흐른다’는 메시지가 ‘영화의 관객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2011년 당시에는 그 메시지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정리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록을 보면 내가 본 영화들의 영향으로 그때부터 관객을 ‘영화의 관객들’이라고 표기하며 모퉁이극장을 준비하는 멤버들과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용한 ‘영화의 관객들’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얻은 메시지인 ‘정신이 흐른다’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말이다. 영화와 관객을 이어주는 ‘의’는 영화의 정신과 관객의 정신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표지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퉁이극장에서 말하는 관객은 ‘관객’도 ‘영화 관객’도 아닌 ‘영화의 관객들’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한글로는 ‘영화의 관객’이라는 말 속에 관객의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관객’이라는 의미를 영문으로 쓰려니 관객의 의미로 통상적으로 쓰이는 audience나 spectator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한 것 같아 한동안 고민을 많이 했었다. 2012년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앙리 랑글루아의 다큐멘터리 <시티즌 랑글루아>(1995)를 관람했다.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리 랑글루아의 삶에서 관객운동이 나아가야 할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영화를 통해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를 처음 방문한 감독들의 감격, 장 비고가 죽은 후 그가 살던 집으로 이사한 랑글루아의 면모 등 영화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내가 기대한 관객운동의 방향을 잡는데 구체적인 영감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모든 파편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앙리 랑글루아의 영화를 봤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앙리 랑글루아에 관한 영화의 제목이 <시티즌 랑글루아>였다. 이 시티즌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프랑수아 트뤼포가 말한 ‘한 편의 영화가 지닌 영화 세계의 시민권’을 말할 때의 의미와 같은 뜻이리란 기대에 앙리 랑글루아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에 관한 책 한 권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Henri Langlois, First Citizen of Cinema>였다. 이 타이틀을 보자마자 내가 그동안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관객의 의미가 ‘시티즌 오브 시네마’라는 어휘 속에 오롯이 담겨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앙리 랑글루아의 평전 <Henri Langlois: First Citizen of Cinema> ‘시티즌 오브 시네마’는 ‘영화의 시민권’을 관객의 입장에서 번역해서 ‘가상의 영화 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관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장 뤽 고다르의 사색처럼 어떤 영화의 정신이 내게도 흐르고 있다고 믿는 관객들이다. 이러한 영화와 관객의 관계성을 담고 있는 ‘영화의 관객’의 영어 표현으로 Citizen of Cinema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2012년 6월 8일, 시티즌 오브 시네마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년 모퉁이극장 페이지의 메인화면으로 사용되었던 영화의 관객들 이미지 모퉁이극장이 말하는 관객은 이렇게 영화문화로부터 온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 영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관객들의 상상력과 연대의 토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앙리 랑글루아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하는 ‘First Citizen of Cinema’를 통해 관객을 ‘시티즌 오브 시네마’라 부를 수 있었고, 이탈리아 영화를 유심히 관찰한 장 뤽 고다르를 통해 영화에는 정신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에 우열이 없고 각 영화마다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한 프랑수아 트뤼포, 그 이야기를 발췌해서 강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준 정성일 평론가에게까지 영화의 정신은 이어져 흘러왔고 이제는 그 흐름이 모퉁이극장의 관객운동에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렇게 2012년 우리는 관객을 ‘영화의 관객들, 시티즌 오브 시네마’로 부르기 시작했고 최초로 펴낼 관객잡지의 이름이 ‘영화의 관객들’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몇몇의 관객들 앞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관객잡지의 창간취지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영화의 관객들> 창간 취지문 영화의 관객들은 스크린의 빛 아래 낮은 자리에서 영화로 투사되는 관객의 시선에 담긴 마음을 담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관객의 권위라는 새로운 위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향유하는 모든 이들이 관객으로서 평등하게 자신의 시민권을 갖는 새로운 영화의 주체를 탄생시키고자 합니다." 2015년 국내 최초로 만든 관객영화제의 영문명 시티즌 오브 시네마 페스티벌(citizen of cinema festival)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