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
- 감독
- 클레어 맥카시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데이지 리들리, 조지 맥케이, 나오미 왓츠, 클라이브 오웬, 톰 펠튼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에 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 결핍이 필요하다 - 쇼펜하우어 SF의 변곡점 SF(Science Fiction) 영화가 ‘공상 과학 영화’로 번역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에스에프’라고 불리는 것 같다. 공상(空想)과 과학은 다른가? ‘공상 과학’의 어감은 과학이 첨예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임을 은폐하는 듯하다. 마치 ‘괴짜의 상상력’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자의 위치를 이동시킬 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공상 과학’은 사회적 위치성(포지션)을 공상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한다. 수많은 SF 영화가 있지만 나는 우주(외계인)와 지구를 대립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불편하다(솔직히 말해, ‘분개한다’). 대개의 SF에서 주인공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은 외계인과 친하든, 그들을 연구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대표한다. 실제로 미국은 지구를 ‘지킨다(지배한다)’. 그들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칭하면서 대외적 군사 개입을 “경찰 활동(police action)”이라며, ‘국내 치안’으로 생각한다. 한국전쟁 참전도 공식적으로 “경찰 활동”(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전 세계가 미국의 땅이라는 발상이다. 자기만 ‘지구의 1등 시민’, ‘제1의 성’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9․11 이전까지 국방부가 없었다.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는 우리나라처럼 자국 방위를 위한 부처가 아니라 전 지구를 대상으로 업무를 보는 곳이다. 9․11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기 땅이 침략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진짜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토방위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신설했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 외계인과 싸우는 지구의 대표가 ‘파키스탄인’이거나 ‘에콰도르인’인 영화가 있었던가. 닐 블롬캠프 감독의 <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년) 가 걸작인 이유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섹스나 감염 문제를 다룰 때 실험 대상은 백인 남성이 아니라 유색 인종이거나 여성임을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나오지 않는, 실종된 미국 우주인을 그린 < 그래비티(Gravity) >는 <디스트릭트 9>과 함께 SF의 역사의 한 챕터에 등장할 만하다. 더불어, <그래비티>는 우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이스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비록 중국이지만’)아시아 국가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우울증과 중력 내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첫 영화는 < 이 투 마마(Y Tu Mama Tambien, And Your Mother Too) >(2001)였다. 황홀했다. 나는 한동안 디에고 루나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나 친구들과 신나게 영화 감상을 나누지는 못했다(‘미남’ 배우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었다). 이후 두 배우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는 말할 것도 없다. 제작자로 참여한 < 비우티풀(Biutiful) >이나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 모두 굉장한 세계였고 <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 <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 >에 대한 내 의견은 사족이리라.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다. 나는 아직 <로마>(2018년)를 보지 못했고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지만, <그래비티>(2013년)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내 인생의 영화’다. 하지만 두 번 볼 용기는 없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직면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를 ‘호러’로 분류하면, 미친 짓인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비티>는 물리학과 실존주의를 융합하고 그 두 세계를 모두 넘어서, 제3의 지식을 만들었다. 우울증에 관한 설명이 그것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우울증은 묘사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보니,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다 보니, 이제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물론 우울증은 고대부터 있었다). 대개의 질병은 ‘원인’은 다양하고, 증상은 비슷하다. 그래서 증상을 통해 병명을 진단할 수 있다. 우울증은 반대다. 원인은 ‘하나’인데, 증상은 다양하거나 극단적으로 반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의사도, 환자도 진단이 어렵다. 불면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내 자는 사람도 있다. 폭식증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병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의 ‘body’는 본래 시체라는 뜻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인 듯하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어 욕창으로 사망하는 이도 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극한의 자신과의 투쟁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도 있으며, 심지어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마지막의 경우 오래가지는 못한다. 대개 육십 세를 전후하여 자살한다. 더는 그럴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모든 곳에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萬有引力, 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 중력(重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따르는 원심력이 더해져, 우리는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중력의 법칙에서 배제된 이들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다. 우울증의 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다니며, 먹고 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은 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지표면에서 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우울증은 살기 싫은 병이기 때문에, 몸과 땅이 붙지 않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기겠는가. 중력이 버린 몸. 자살은 이 증상으로 인한 질병사일 뿐이다. 마흔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삶을 지속하고 있는 내 친구는 말한다. “난 그때 죽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야? 그때 죽었는데, 내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알아? 매일 내 장례식에 다녀온 기분 알아?” 우울증 환자가 24시간 아픈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감정 상태에 ‘몰빵’되어 다른 인생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울증에 걸린 그 순간 이후의 삶은 잉여,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시간, 비참하고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약으로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인생이라는 배가 돌아다니기(움직임) 위해서는, 일단 정박(碇泊)할 곳이 있어야 한다. 정박할 곳이 없으면 이동하지도 못한다. 정박하지 않은 배는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받는다. 배는 서서히 부서지고 부식된다. 살려는 의지와 죽음의 욕망(‘충동’이 아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것이다) 사이에서의 투병 생활은 매 순간 ‘선택’의 압력에 시달리는 상태다. 이때, 선택은 자유 의지로 하는 선택이 아니다. 기분이 날뛰며(업앤 다운이 반복) 기진맥진해지는 기분 장애(mood disorder)의 상황이다. 내가 아는 우울증 환자는 이 병으로 인해 그녀가 평생 노력해서 얻은 ‘좋은 직장’을 잃었다. ‘성취’가 끝나자마자 질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행복한 기억이 없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지, 한국을 떠날지, 지구를 떠날지. 지구를 떠난다면 갈 곳은, 단 한 곳 우주이다. 그녀는 매번 ‘선택’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조언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한없이 응대할 사람은 없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중력이 없어서 생존 가능한 공간, 우주 우주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지구와 달리 우울증 환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가 배경인 <그래비티>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구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중력이지만, 첨단 장비가 끊어진 중력과 자신을 연결해주니 발버둥 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지구에서 이 연결은 사람과 사랑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끈이다. 우주의 무중력은 지구의 중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은 같지 않다.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하는데, 나누지 않아서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슬프고 기쁘고 우울하고 들떠 있다. 다양한 기분 상대를 산다. 그리고 누구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약간 우울한 사회, 고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反사회적 인간의 조증(躁症)이 판치는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대로, 안정된 삶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우울, 걱정, 슬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이다. 이런 우울한 상태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정신 질환(mental disease)과 신체적 질병(physical disease)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사회는 유독 ‘정신병자’와 ‘암’ 환자를 다르게 생각한다. 둘 다, 고통받는 몸(body in pain)인데도 말이다. 정신 질환은 가볍게 취급되거나(“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반대로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정신병자가 탈출했다!”)이라는 식의 극단적 인식을 오간다. <그래비티>에서 산드라 블록은 아이를 잃은 전문직 여성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누가 우울하지 않겠는가. 비통하지 않겠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애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이다. 반면,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의학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진전될 수 있다. (일견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이 영화에서 그녀가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구에서는 땅을 디딜 수 없었던 그녀가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우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여행(journey)하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우리가 우울할 때 혹은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두 경우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집에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동과 운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견해가 다른데,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주, 가장 먼 이동이다. ‘우울과 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한 통찰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시리아나(Syriana) 이 영화에서 어떻게 조지 클루니를 빼놓을 수 있을까. < 시리아나(Syriana) >, < 마이클 클레이튼(Michael Clayton) >,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를 보길 권한다. 특히 <시리아나>를 강력히 추천한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반미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이며, 인생의 바닥을 수십 번 치고도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매력적인 루저이며, 패배를 반복하고도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을 연기한다.
< 크로노스 >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길예르모 델 토로는 1994년 미국 마이애미 필름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어느 스페인 감독이 언젠가 같이 작품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온다. 그는 이제 막 국제적 거장으로 떠오르고 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델 토로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지는데, 이내 <미믹> 으로 꿈의 무대 할리우드 입성에 성공하지만 촬영 내내 받았던 메이저 스튜디오의 압박과 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고국 멕시코로 돌아오고 만다. 차기작을 준비하며 알모도바르와의 약속을 떠올린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스페인 만화 ‘파라쿠에요스’에 영감을 받아 오랜 기간 준비해온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시키는데, 이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델 토로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그 작품, < 악마의 등뼈 >. 스페인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36년, 부모의 죽음으로 후견인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진 카를로스가 이곳에 출몰하는 유령 산티와 마주치며 그 속에 숨겨진 어둡고 추악한 사건의 진실과 마주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약속대로 제작을 맡아 전폭적인 지원 아래 스페인에서 촬영된다. 잔잔하고 슬픈 호러면서도 공포의 외피를 뒤집어쓴 일종의 소년 성장 드라마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후 델 토로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역시 스페인 내전이 담긴 후속작 아닌 후속작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를 만들어 대구를 이루며 기묘한 균형을 맞췄다. <악마의 등뼈>가 파시즘에 맞선 세력에 대한 강렬하고 적극적인 직유라면, <판의 미로>는 이미 파시즘 치하에 갇힌 이들의 도피와 해방의 염원을 환상적이고도 잔혹한 동화 풍의 은유로 풀어내, 서로 같은 시대상의 아픔과 굴곡을 소년과 소녀의 캐릭터에 대칭 시켜 변주하고 있다. 그런 세계관을 두 작품에 걸쳐 공유하고 완성하는데 무엇보다 큰 힘을 발휘한 건 길예르모 네바로의 눈부신 촬영과 필라르 레부에타의 아름답고 숨 막히는 미술이었지만,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서정적이고도 슬픈 음악 또한 잊어선 섭섭하다. 그전까지 국내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전혀 무명에 가까웠던 하비에르 나바레테는 1956년 스페인 태생에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인물로, 처음에는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이나 가브리엘 브른칙 스타일의 전자음악에 빠져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현대음악에 몰두했으나, 점차 현실과의 격차와 학구적인 분위기에 지쳐 콘서트 작업과 연극무대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가 영화음악을 담당하게 된 건 1987년 아구스티 빌라롱가 감독과 만나면서부터였는데, 이후 호러와 판타지, 스릴러와 SF 등의 자신이 좋아하는 서브컬쳐에 주력하며 착실히 내공을 다져나간다. 그에게서 변화가 감지된 건 데뷔작을 함께 했던 빌라롱가 감독의 2000년 작 <엘 마르>. 전쟁과 고아원,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종교를 오가는 이 심리 드라마에서 나바레테는 그간 자신의 본령과도 같았던 일렉트릭 사운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며 섬세하고 풍부한 화성과 아름답고 애수 어린 선율, 스케일과 다양성을 갖추며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찾아가기 시작한다. 델 토로는 원래 내정돼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음악적 동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스케줄 문제로 하차하자 <악마의 등뼈>와 몇몇 유사한 분위기를 가졌던 <엘 마르>의 음악을 담당한 나바레테를 주저 없이 대타로 뽑아든다. 그리고 그 전략은 아주 주효했다. 사실 <악마의 등뼈>는 이후 델 토로와 작업해 아카데미 음악상에 노미네이트됐던 <판의 미로>나 또 다른 판타지 < 잉크하트 >, 블록버스터 < 타이탄의 분노 > 등과 달리 뚜렷한 주제부를 갖추고 있지도, 또 스케일의 위용을 드러내거나 드라마틱한 서사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의 영화음악과 달리 호러영화 특유의 기능적이고 과시적인 사운드에 집착하지도,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도전 정신과 예술적 자의식에 취하지도 않는다. 마치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처럼 무색무취 투명한 애수를 띈 서정성이 유령처럼 부유하다 사라진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듯 멜로디의 부재가 갖는 나바레테의 서정은 실체 없는 파시즘의 악재처럼 영화 내내 긴장을 선사하고, 죽음을 드리우며, 슬픔을 지배한다. 그 중심을 차지하는 건 묵직한 저음의 현악편성이다. 때론 미니멀하면서도 무조성에 가까운 불협화음과 짧은 오스티나토로 심리적인 압박과 긴장을 담아내는 선율은 고아원 내부에 얽힌 인물들 간의 관계와 비밀을 암시하며 모호하고도 (어찌 보면) 비극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간헐적으로 오보에와 바순 같은 중저음의 목관악기가 쓰이며 위협 앞에 놓인 소년들의 가녀린 처지를 대변하는데, 꺼질 듯 말 듯 서늘하고 침울한 음색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들린다. 피아노와 하프의 차가운 울림은 지하 웅덩이 속에 갇힌 유령 산티의 존재감처럼 희미하게 현악편성에 녹아들지만, 때때로 불쑥 수면 위로 나타나며 명징한 잔상을 남겨 여운에 잠기게 만든다. 영화 후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며 뒤늦게 약동하는 퍼커션과 함께 터져 나오는 풀 관현악의 위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폭탄만큼이나 강력하고 충격적인 사운드 효과로 하비에르 나타레테의 진가를 들려준다. 그 외 영화상에서 쓰인 1930년대 스페인권 노래들이 같이 담겨있는데,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영웅 카를로스 가르델의 노래 2곡과 스페인의 대중적인 악극인 토나디야 가수 라퀠 멜러, 그리고 카멜리아 앰버트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더 잘 알려진 임페리어 아르헨티나가 마눌로 러셀과 부른 듀엣곡 등 5곡이 그것이다. <악마의 등뼈>는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중간 기착지 같은 사운드트랙이다. 이 속에는 그가 오랜 기간 스페인에서 작업했던 초기 일렉트릭 사운드의 모습과 현재 할리우드와 다른 유로권 국가들에서 작업한 큰 프로젝트성 풀 오케스트라의 단초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나바레테는 이 변곡점을 통해 달라졌고, 또 놀라워졌다. 작고 개인적인 영화였지만 길예르모 델토로가 이를 통해 현재 위치에 올랐듯, 국제적으로 무명이었던 스페인의 한 영화음악가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재발견되었다. 그게 바로 이 사운드트랙을 놓쳐선 안 되는 이유다. Track List 1. Que es un fantasma? 2. Un evento terrible 3. Condenado a repetirse 4. Una y otra vez 5. Un instante de dolor 6. Quiza 7. Algo muerto 8. Por momentos vivo aon 9. Un sentimiento 10. Suspendido en el tiempo 11. Una fotografta borrosa 12. Un insecto atrapado en ambar 13. Un fantasma 14. Eso soy yo 15. Besos frtos / Performed by Raquel Meller 16. Una lagrima / Performed by Carlos Gardel 17. Recordar / Performed by Imperio Argentina & Manolo Russell 18. Presumidos / Performed by Carmelita Ambert 19. Yo no se que me han hecho tus ojos / Performed by Carlos Gard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