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RiderU][2011서울모터쇼] 쉐보레 올란도 (Orlando)
- 제작년도
- 2011
십 대 후반부터가 아닐까 싶은데,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 행사가 바로 ‘올해의 베스트 10’을 뽑는 것이었다. 시네필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런 소소한 개인 이벤트를 해봤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 평론가, 영화 기자 등 전문가가 선정한 ‘공식 베스트’와 나의 베스트를 비교해본다. ‘전문가 st.’ 같은 나의 짝퉁 리스트를 보며 흡족해하거나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 영화가 전문가의 리스트 상위에 랭크 된 것을 보고 화를 내기도 했다. 어쩌면 나의 이 경험은 영화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인정투쟁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도 영화 많이 알아요. T.T’ 여전히 나는 ‘올해의 베스트 10’을 뽑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내 맘 베스트 10’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전문가의 공식 베스트는 그저 ‘참조사항’이 되었다. 그래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도착한 한국영상자료원의 ‘사사로운 리스트’는 나에게 연애편지로 다가왔다. 이 리스트 중 종합 9위에 랭크 된 제임스 그레이의 < 이민자 >(2013)를 발견했을 때 (리스트에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순위가 낮아) 아쉽기도 했다. < 리틀 오데사 > < 더 야드 > < 위 오운 더 나잇 > 제임스 그레이는 아메리칸 뉴시네마 혈통의 계승자답게 데뷔작 < 리틀 오데사 >(1994) 이후 줄 곳 부패한 세상 밑바닥에서 불우한 가족사를 끌어안은 남자의 삶을 그려왔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 이민자 출신이며,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도, 새로운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도 전부 실패한다. 그레이는 출구가 없는 엔딩으로 미국 이민자의 곤궁을 그대로 노출했다. < 이민자 >에서도 그는 여전히 비극에 이끌리고 있고 뉴욕의 뒷골목을 배회한다. 반면 전작들과 두 가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장르적으로 멜로드라마이고,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레이는 < 투 러버스 >(2008)로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탁월하게 재해석 하면서 자신의 인장과도 같았던 갱스터를 버리고 멜로드라마로 장르적 궤적을 수정하였다. 그런 다음 이번 <이민자>로 멜로드라마 연출의 정점에 이른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뽐냈다. 그레이는 다소 구식으로 보이는 이 멜로드라마 서사 안에서 어긋난 사랑의 슬픔을 우아하고 섬세하게 풀어냈다. 어떤 면에서 < 이민자 >는 그레이 자신의 ‘가장 사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레이의 조부모는 1923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계 유대교 이민자이다. 에바의 목걸이 속 사진을 실제 그레이의 가족사진으로 채워 넣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단순한 ‘이스터 에그’가 아니다. 이렇듯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이민자>는 전작들보다도 더욱 절박하게 구원과 생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레이는 아메리칸 드림을 한가득 마음에 품고 뉴욕으로 흘러든 인물들의 비극을 무겁고 아프게 담아낸다. 자유의 여신상 < 이민자 >에는 두 가지 버전의 자유의 여신상이 등장한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의 여신상은 오프닝 장면에서 등장한다. 카메라는 자유의 여신상의 클로즈업에서 시작해 점점 줌 아웃하며 한 남자의 뒷모습에서 멈춘다. 영화 속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늘 포주 브루노(와킨 피닉스)이다. 그렇다면 이 오프닝 장면을 자유의 여신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민의 상징으로 인식한 것은 결국 브루노를 포함한 이민자 자신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21년은 미국에서 본격적인 ‘이민법’(1924)이 발효되기 이전 ‘이민제한법’이 시행되던 시기이다. 이민이 완벽히 제한되기 바로 직전, 바로 그 문턱에서 에바는 고된 시련을 겪는다. 당연하게도 ‘이민자’라는 신분은 에바를 항상 약자의 입장에 처하게 만들고, 그녀는 살아야 하는 절박함에 결국 브루노의 댄스홀에서 스트립걸로 일하게 된다. 각국을 대표하는 미녀들의 나체쇼에서 에바가 부여받은 캐릭터는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이것이 두 번째 버전의 자유의 여신상이다. 그레이는 에둘러 말을 돌리지 않고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두 가지 버전의 자유의 여신상은 결국 아메리칸 드림의 양면성, 또는 그 이면인 것이다. 멜로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삼각관계인데, 이 영화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마술사 올란도(제레미 레너). 그는 브루노와 모든 면에서 대립되는 인물이다. 늘 우울하고 불안한 브루노와 달리 밝고 매력이 넘치는 올란도는 엘리스 섬의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말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판타스틱한 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하지만 마술은 실제가 아니라 판타지이며, 에바에게 올란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 의미에서 멈춘다. 브루노가 아메리칸드림의 차가운 이면, 즉 마주해야 할 진흙탕 같은 현실이라면, 올란도는 상상 속의 미국, 늘 꿈꿔왔던 달콤한 사랑에 대한 약속이다. 에바에게 이 달콤한 구원의 약속은 이뤄질 수 있을까?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기획전’에서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