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들
- 감독
- 고영남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김영애, 윤일봉, 정한용, 원미경, 김인문, 이경실, 박원숙, 한명환, 조용수, 박예숙, 문혜영, 김지영, 유명순, 문미봉
고영남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알려졌다. (KMDb 기준 110편) 한국영화 다작감독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영화에 있을 법한 대부분의 장르를 만든 감독이다. 그럼에도 대표작으로 손 꼽을 만한 작품은 열 손가락을 채우기가 힘든 감독이기도 하다. 고영남 감독은 깊은 예술적 성취나 높은 완성도의 견고함을 고민하는 대신 액션, 멜로, 공포, 에로, 아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는 하루 노동에 지친 수많은 대중을 위무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1964년 < 잃어버린 태양 >으로 데뷔한 고영남 감독에게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최고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 설국 >, < 소나기 >, < 깊은 밤 갑자기 >(참고: 한국영화걸작선 리뷰), < 빙점 81 > 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1980년에 개봉된 < 외인들 > 역시 이 시기의 작품으로 단연 돋보이는 영화 중의 한편이지만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진 않다. < 외인들 >은 한강 변의 아파트촌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한국의 사회병폐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보이는 오염된 한강은 바로 서울이라는 공간, 나아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비인간화 되어가는 사회에 대한 근심이다. 그 비정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서민들의 고통이야말로 고영남 감독이 주목하고 있는 바로 핵심이다. 만두가게 사장( 김인문 )의 대사로 표현되듯 “이 세상은 천원 가진 놈이 백 원 가진 놈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십 원 가진 놈을 죽이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병폐 중 하나로 지목 받았던 사글세 문제를 통해 표현된다. 넓게는 집주인과 부동산의 결탁에 의한 부당한 집세 인상이라는 횡포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면서, 좁게는 미장원을 운영하는 돈 많은 여자의 탐욕을 통해 가진 자의 비인간적 횡포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주요 인물들이 풍기는 사람 사는 냄새를 적절하게 담아낸 덕분이다. 야간학교 교사인 곽승엽( 정한용 ), 창녀 금자( 원미경 ), 룸펜 화가 장선생( 윤일봉 ), 화가의 아내( 김영애 ), 일본인 현지처 은주( 이경실 ), 만두가게 부부( 김인문 , 박원숙 )는 삭막해져만 가는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즉 ‘외인들’이다. 그들은 가진 자의 횡포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서로 위할 줄 아는 넉넉한 인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로 그 풍경들, 만두가게 사장 아내가 탐욕스런 미용실 주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채 싸우는 장면은 얼마나 통쾌한가? 비록 질 줄 뻔히 아는 싸움이라도 해도 말이다. 비둘기를 메신저로 서로 그리워하게 되는 곽승엽과 일본인 현지처 은주의 사랑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비록 그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이 돈으로만 모든 것이 재단되는, 비인간화되어 가는 차가운 사회 속에서 인간의 온기를 품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패배하더라도 말이다. < 외인들 >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사회비판을 도모한 영화다. 하지만 주인공이라 할 화가 부부만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현실적인 느낌이 약해 영화 속에 매끄럽게 섞여들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화가와 금자의 육체관계, 화가의 자살, 금자의 임신, 이어지는 아내의 자살은 고통 받는 서민의 또 다른 이면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고영남 감독은 영화 후반부를 관통하게 될 비통함이라는 감정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영화 전체의 색깔마저 흔들어버린 것 같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 한국판 네오리얼리즘이라 할 만큼 현실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평범한 멜로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많이 아쉽다. 아파트로 이사 온 사람들은 다시 아파트를 떠난다. 그들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이 유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회비판이다. 만두가게 사장 아내는 혼잣말을 한다. 좋은 사람은 왜 다 떠나느냐고... 하지만 떠난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도 있을 거라며 이내 위안한다. 좋은 사람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는 ‘외인들’, 그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닐 것이다. 김영애 윤일봉 정한용 원미경 감독 고영남 각본 윤삼육 촬영 정필시 1980년 100분 칼라 판매원 벧엘프로그램(주)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165
박구 감독님은 나의 아버지이자 나에게 영화 예술의 혼을 불러 넣어주신 스승이시다. 또한 아버님의 생애는 처절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 만큼 인생의 시련속에 예술가로서 긍지를 버리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기도 하다 음악가로, 이 나라 가극의 선구자로, 사진작가로 그리고 영화 연출가로 변신하는 아버님의 모습은 감히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한 예술가의 멋진 모습이였다 생각하며 이 글을 통해 思父曲의 마음으로 나의 아버지 박구 감독님을 회고한다. 박구 감독님은 1911년 함경남도 함흥시 산수동에서 청염한 유학자이신 박치근 의 5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이 시작된 이 땅의 선대들이 그랬듯이 가난과 고통 속에 얼룩진 가슴속에 억눌린 한은 소년 창석(박구감독의 본명)의 감성을 발전시키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16세의 나이로 고향 함흥을 떠나 홀 혈 단신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이유는 보다 넓은 세계에서 예술가가 되어 보겠다는 집념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난생처음 일본 동경에 온 소년 창석은 이국 생활의 우여곡절 속에 동경음악전문학교에 다니며 크라리넷을 전공한다 당시 일본 음악계의 크라리넷 명 연주자였던 와다나베의 수제자가 된 아버님은 열심히 연주법을 터득하여 마침내 어엿한 크라리넷 세션맨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후 일본빅타레코드사의 전속 연주자로 활약하며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재즈에 심취하여 당시 동경의 재즈구룹무대에 참여해 연주자로 경험을 쌓은 후 27세의 나이로 경성으로 돌아온다 귀국후 역시 빅타레코드사의 지점 책임자가 된 후 조선에서 처음으로 창단된 재즈 오케스트라 '히비끼'를 창단 1935년대 재즈를 이 땅에 접목시키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셨다. 그 후 빅타 가극단을 인수 반도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당시로는 드물게 민족시대극을 전문으로 하는 가극을 상연하게 된다 당시 반도 가극단의 레퍼토리는 '견우직녀''''심청전''장화홍련전''콩쥐팟쥐''에밀래종'등 우리 민족의 화려한 야사만을 골라 가극으로 제작했다 그 이유는 일본어로 강제되는 문화속에 유일하게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가기 위해선 조선어 사용이 시대극에 한하여만 가능했던 맹점을 활용 하셨기 때문 이였다 아버님의 민족 색채는 반도가극단의 단장으로 시대극 고집에서 자명하게 들어 나있다 특히 반도가극단은 우리나라 연기자의 산실로 백성희 , 허장강 , 김희갑 , 김승호 ,장치희,서혜영 등 유명인을 많이 키워냈으며 반도가극단 출신이 아니면 행세를 못할 정도로 많은 배우가 양산되었다. 영화의 본격적인 출현으로 사양길에 접어든 가극은 풍전의 등화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 후 아버님은 평소 좋아했던 사진촬영의 실력으로 쉽게 영화에 입문하게된다 우리나라 사진작가협회 창단 발기인으로 영상에 남다른 이론과 실기가 능숙하셨던 이유로 영화계 진출이 가능하셨다 ' 자유부인 (속) '을 필두로 반도영화사의 작품이 선을 보이고 국내에선 처음으로 해외로케이션 작품인 ' 낙엽 '으로 필리핀 올로케이션을 감행 한 것으로 세중에 관심을 모았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후 인생극장 , 백설공주 , 식모 등 고인이 되시기 전 까지 20여 작품을 제작감독 하셨다. 1970년 초 한국영화법의 개정으로 인해 영화제작의 자유가 구속받으며 아버님은 제작에서 손을 놓으셨다 자의든 타의든 열악한 영화제작여건에서 작가가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없는 시대환경을 항상 염려하시던 아버님의 한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5년 마지막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한일합작인'이향에 지다'라는 작품은 한 고려 도공의 비극을 쫏는 르뽀르타쥬형식의 영화로 외인들에게 끌려간 도공을 통해 우리민족의 한을 묘사한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아버님의 유작인 샘이다 그러나 지금 그 필림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다름이다. 스승으로서의 아버지...... 내가 16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님은 항상 사진을 찍으시고 나에게 암실 일을 맡기셨다 난 곧잘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 작업을 했는데 하루는 내가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아버님은 심사숙고 끝에 카메라를 한 대 주셨는데 난 불만 이였다 다름아니라 아버지가 주신 카메라는 연동이없는 구식 주름상자 35미리 카메라인 독일제 '레티나1'이였다 촬영경험이 없는 나에게 그 카메라는 너무 어려운 것 이였다 특히 이 카메라는 초점과 노출을 목측으로 설정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나는 아버지가 주신 카메라의 뜻을 알게 되었다 기본원리를 중시하는 아버님의 가르침은 묵시적이었고 내 스스로의 연구만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자력을 키워 주신 것이다 난 그 후 베트남전선의 종군카메라맨으로 활약하며 아버님의 주름상자 카메라의 철학으로 살아 귀국했다 난 특히 아버님을 좋아했고 아버님 역시 나를 사랑하셨다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꼬박 예술에 대한 강의로 날을 밝히던 그 옛날이 오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이론가였다 그리고 노력가였다 7순이 넘어서 까지 영어 콘사이스를 뒷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며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이셨던 그 분의 열정은 지금 생각해도 존경이 갈 다름이다. 아버님은 우리영화계에서 명장감독은 아니셨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멋을 아는 명감독이셨다는 것은 아버님의 후배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로는 진고개 신사로 후배들의 어려움을 위해 자신을 던저 도와주시던 자상한 모습은 영화계에 유명하다 .영화 감독으로서 감독협회를 창설 회장을 맡으셔 감독협회의 기초를 이뤘으며 또 영화인으로서 영화인협회장 서리를 맡으시는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0년 영화공로자가 되시기도 하셨다 나는 항상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이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현장에서 내뿜는 레디고의 함성에 도취해 공부도 다 버리고 촬영장으로 뛰어가곤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버님이 고인이 돼신지 18년이 되어 온다. 1984년 내가 미국에 유학을 하고 있던때 부고를 받고 허탈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예술가로서 아버지, 인간으로서 나의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 하시고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니 난 갑자기 그리움이 사모 친다 아버지를 뒤이어 같은 길을 가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할 작품 하나 내지 못한 것에 난 늘 마음이 죄스럽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당신이 가르쳐준 영화예술의 진수를 아버지의 무덤 앞에 꼭,꼭 내놓으리라 다짐하며 오늘 이 뜻깊은 나의 아버님 작품 회고전에 다시 한번 내 아버지의 멋있는 잔상을 새겨 보려 한다. 박경삼 (명지대 교수,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교장)/ 2002년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고교시절 배구선수였었다는 그는 운동은 한낮 여기에 불과했을 뿐, 당시 그가 내심 희구했었던 것은 아마도 연극 연출가나 영화감독도 아닌 연극 배우나 영화 배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한때 충무로 일원에서 몇몇 영화감독들이나 스탭들을 지목해 운운할 때 '응! 아무개 그 사람 본래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어.' 라고 심심찮게 객담의 화두에 올려 이러쿵저러쿵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고영남 감독이 아닌 진석모(고영남 감독의 본명) 고교졸업생은 뜻한 바 있어 고향 충청북도 충주군 수안보에서 무성영화 변사의 구성진 나레이션처럼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부푼 마음으로 상경했던 것이었다. 당시 신상옥 , 유현목 , 김기영 등으로 이어지는 기라성 같은 대 선배 감독 군, 다음세대들이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각기 전문학과를 수학했던 것처럼 고영남 감독 역시 상기 학교 연극 영화과에 등록했단다. 그는 이 학교에서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기를 마련해준 연극계의 원로 이광래 교수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필자도 종종 뵌 적이 있는 그분을 바싹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음에도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예술가연한 학자였음이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풍부한 젊음의 감성과 번뜩이는 예지로 이광래 교수로부터 희곡론, 연출론 등을 깨우친 고영남 감독은 당시 요즈음 대학로와 같은 연극의 메카 명동에 입성하게 되고, 그곳에서 선배들의 후원으로 입단하기 어려웠던 권위 있는 연극단체 '신협'에 비교적 쉽게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그가 연극에 깊이 천착하기도 전에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명동과 인접했었던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서 제작부로 일하던 선배가 불쑥 찾아와 다음작품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던 그에게 함께 영화작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종용해 온 것이다. 그는 호기심에 기꺼이 응했다. 그때 제작되고 있던 영화는 외국의 저명한 소설을 번안한 멜로드라마 ' 육체의 길 ' 이었다. 당시 충무로에서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조긍하 감독의 야심적이었는데 장안은 물론 전국의 최루파 관객을 울음바다로 몰아 넣었던 이 작품의 라스트 시퀀스 촬영분은 눈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이었던 명우, 김승호 가 방황과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걸인이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그런데 촬영팀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함박눈은 끝내 내려주지 않았다. 촬영팀은 하는 수없이 눈을 만들어 뿌리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전 스탭들이 모두 동원돼 이 작업에 동참했다. 일정한 포지션이 없었던 고영남 도 친구와 함께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어두워지자, 스탭들은 모두 식당과 술집으로 흩어졌고, 고영남만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외모와는 달리 충청도 시골출신답게 성실한 모습으로 홀로 작업하고 있던 그의 모습은 곧 조긍하감독의 눈에 띄게 되고, 즉시 즉시 연출부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는다. 그렇게 제작 완료된 ' 육체의 길 '은 대히트를 하게 되고, 비록 연출부 신출내기로 입문했지만 고영남 의 어깨는 으쓱해졌다. 그 후 그는 권영순 감독에게서 이광수 선생의 '흙'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의 '표류도' 등 문예작품의 조감독으로 수련을 거듭한다. 그리고 당시, 편집작업을 돕고 있던 김기덕 감독을 만나게 되고, 그의 데뷔작 ' 오인의 해병 ' 출세작 ' 맨발의 청춘 '등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감독수업의 야심을 쌓아 간다. 그 즈음 영화계 배급구조와 흥행판권은 각 지방 업자에 의해 장악되었고 영화제작은 이들의 제작자본에 의존해 제작되던 시기였다. 이 무렵, 고영남 감독은 현 서울극장 대표이며 전국 극장연합회 회장인 곽정환 씨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당시 ' 주유천하 '라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곽사장은 현재의 위치와 성공을 예고라도 하듯 놀라운 추진력으로 충무로를 종횡무진했다. 고영남 감독은 곧 그의 눈에 뜨였고, 곽사장은 그에게 파격적인 너무나도 파격적인 임무를 맡긴다. 그에게 대뜸 영화 ' 잃어버린 태양 '을 연출 의뢰한 것이다. 고영남 감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온 정열을 쏟아 자신의 데뷔작을 연출했다. ' 잃어버린 태양 '은 결국 크게 히트했고, 이에 고무된 곽사장과 고영남 감독은 즉시 요즈음 조폭 영화처럼 유행했던 액션 멜로 ' 명동 44번지 '를 제작 연출했고 이 영화는 그해 흥행 1위를 쉽게 탈환해버린다. 이를 계기로 곽사장과 고영남감독은 당시 한국일보 현상공모 장편소설 당선작 ' 잃은 자와 찾은자 ' 강제구 소령의 전기영화 ' 소령, 강제구 ' 등 잇달아 히트작을 양산해낸다. 이때부터 충무로에서 그의 인기와 주가는 초고속 수직 상승했고 이러한 돌발현상은 그에게 미래의 부푼 희망과 감당할 수 없는 질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충무로 전역 모든 제작자들은 고영남 감독을 연호 했고, 그에게 다투어 메가폰과 거액의 개런티를 맡기었으며, 그는 마치 급류에 휩쓸리듯 겉잡을 수없이 거품인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 되어갔던 것이다. 그가 연출한 108편이라는 엄청난 편수는 대부분 이 시기에 작업한 것이다. 그의 술회에 의하면 그것은 연출이 아니라 작업개념이었다는 것이었다. 영화제작자이기 전에 장사꾼이었던 그들의 무절제한 욕심과 고영남 감독의 자신에 대한 통제능력부재가 그를 그렇게 몰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소용돌이에 밀려 지칠 대로 지친 채 1970년대 중반이라는 하구, 어느 둔치에 난파선처럼 표류한다. 그리고 쓰여진 그곳에서 멀리 구비쳐 오는 탁류의 범람을 응시하며 전신을 질타해오는 자괴감에 눈을 지긋이 감는다. 그로부터 2년 동안 고영남 감독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의와 방황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통음한다. 마치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처럼,,,,,, 그는 다시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긴 오수에 빠져든다. 그때 그의 지친 어깨를 두들기는 손이 있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영혼이었다. 그의 대표작 ' 설국 ' 고영남 감독,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황폐한 그의 가슴에 ''이즈''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그는 짧은 영탄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고향산야를 돌아보았다. 거기, 멀리 산자락에서 마치 하얀 베일과 같은 소나기가 겹겹이 몰려오고 있었다. 황순원 의 ' 소나기 ' 한국 단편 문학의 백미인 이 작품과 필자와의 만남은 그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전기였다. 고영남 감독과 필자는 나란히 유년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엔 개울물과 징검다리와 쪽빛하늘, 갈밭, 들판을 나르는 학과 뚝길이 있었고, 멀리서 소나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년이,,,,,, 이 두 작품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고영남 감독은 긴 슬럼프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활기찬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도약한다. 이후 그는 ' 꽃신 ', ' 빙점 ', ' 외인들 ', ' 영원한 관계 ', ' 코리아 커넥션 '등 종전과는 다른 장르를 섭렵한다. 그러나 그에게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와 보람을 준 작품은 역시 '소나기'였다. 당시 흥행에선 실패했지만,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출품에 시도되었고, TV에서도 해마다 방영이 되어, 오히려 안방극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에도 EBS방영 이후 네티즌 사이에 '소나기를 사랑하는 모임'이 생겨날 정도였다. 또한 한국 문학 해외 소개차원으로 아리랑TV로 해외에 방영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지금 노년의 뜰에 서서 아직도 주체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의욕과 향수에 가슴 설레고 있다. 마치 개울가에서 조약돌을 주무르며 소녀를 기다리는 작품 속의 소년처럼,,,,,, 아마도 그것은 그의 자연 친화적인 영상에 대한 영원한 노스탤지어 일 것이다.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35년 2월 22일 충북 수안보 출생 1964년 < 잃어버린 태양 >으로 데뷔 <주요 경력> 1980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1988 영화진흥위원회 자문위원 1993 아트시네마 대표 이사 1995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2001 아시아디지털대학 연극영화과 교수 <작품 연보> 1964 잃어버린 태양 / 명동44번지 1965 마지막 정열 / 이세상 끝까지 1966 잃은자와 찾은자 / 소령 강재구 1967 탈선 / 바람 1968 안개낀 초원 / 빙우 1969 결사대작전 / 태양은 늙지 않는다 1970 위험한 관계 / 훼리호를 타라 1971 탈출 / 서북청년단 1972 꽃신 / 비목 1973 독수리전선 / 공수특공대작전 1974 청춘의 문 / 사랑의 나그네 1975 죽어서 말하는 여인 1977 설국 / 십대의 영광 1978 소나기 1979 수제자 1980 빙점81 1981 외인들 / 여자의 방 1982 광염소나타 1983 위험한 향기 1984 영원한 관계 1985 생머리 19살 1986 내가 마지막 본 흥남 1987 밤이 무너질 때 1988 미리마리 우리 두리 1989 제2의 성 1990 매춘2 1991 코리언 커넥션 1992 나의 아내를 슬프게 하는 것들 1993 그림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