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커 퀸즈
- 감독
- 모하메드 하미디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카드 므라드, 알반 이바노프, 셀렌느 살레테, 사브리나 오자니, 로르 칼라미, 귀욤 고익스, 마이라 틸리안, 마니카 옥시르
지난 12일 SK와이번스가 8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며 길었던 프로야구 시즌이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소재는 야구이다. < YMCA 야구단 >(김현석, 2002)에서도 그려졌던 것처럼 20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한 세기 넘게 한국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스포츠 중 하나가 야구이다. 한국전쟁 중에도 피난지인 부산에서 전국 리그전이 개최될 정도 1) 로 야구는 역사 현장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뉴스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야구는 스포츠 소식 중에서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긴 역사를 갖는 만큼 시대를 반영하는 다양한 야구 뉴스들을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야구 소식’이 한국전쟁부터 1970년대까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시기별로 정리해 야구 역사의 발자취를 부분적으로나마 조명해보려 한다. 1950년대 영상은 아무래도 미국이 제작‧배급한 뉴스 위주로 보존되어 있다 보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미국 메이저리그 관련 소식이다. 특히 한국전쟁 관련 뉴스에서는 유명 메이저리거들의 한국전 참전 소식이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면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설적인 4할 타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테드 윌리엄스(1918~2002)가 전쟁에서 귀환하는 푸티지(< 군 복무 마치고 귀국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 Ted Williams Back From Korea >(1953))라든가 필라델피아 필리스 출신으로 역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커트 시몬스(Curt Simmons, 1929~ )가 한국전 참전 소식을 직접 알리는 캠페인 영상(< AMERICA IN TRANSITION >(1950))을 들 수 있다. 커트 시몬스 영상의 경우 장래 유망한 젊은 투수가 시즌 중에 징병 되는 상황을 야구선수로서의 모습과 군인으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본인의 내레이션을 삽입해 한국전 참전의 당위성을 높이는 프로파간다로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유명 선수들의 참전 소식과 함께 월드시리즈의 경기 결과를 알리는 뉴스들이 ‘해외소식’의 한 꼭지로 전해지기도 했다. <AMERICA IN TRANSITION>의 커트 시몬스 장면: 투구를 하는 커트 시몬스의 모습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전환되고 한국전쟁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전하며 자연스럽게 미군 참전의 당위성으로 연결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보다 다양한 야구 소식들이 전해졌는데 그중에서도 비중이 크고 눈여겨볼 것은 해외 야구팀의 내한과 친선시합 뉴스이다. 미국 대학팀이나 청소년 야구팀, 일본의 다양한 야구팀들의 방한은 한국야구의 ‘이벤트’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친선시합들은 한시적인 국제 이벤트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장비 원조와 기술 전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야구가 성장하는 데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 야구팀의 경우 대학 야구팀부터 실업 야구팀 그리고 내한을 위해 결성된 재일교포 야구팀까지 다양한 리그의 야구단들이 방한해 전국의 야구팀들과 시합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광복절 행사’ 같은 국가행사 기념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기획’된 재일교포 야구팀의 방한과 친선시합들은 1960년대 실업 야구리그가 자리를 잡고, 고교야구리그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포츠 자체로서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과는 별개로 이처럼 국가가 기획해 한편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한 뒷이야기는 당시의 뉴스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2014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 그라운드의 이방인 >(김명준, 2014)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좌) 1957년 내한한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모습 (우) 시합이 열린 경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관중 (<국방뉴스 제73호>) 1957년 경무대를 방문한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대한뉴스 제126호>) 1962년 일본 도에이팀 소속으로 내한 시합을 가진 장훈과 경기가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관중 모습 (<대한뉴스 제391호>) 1970년대는 명실공히 고교야구의 시대였다. 특히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부산고등학교를 상대로 9회 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한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불리며 고교야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군산상고 야구팀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이 경기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대한뉴스에서 다루는 것을 넘어 별도의 문화영화(<승리의 기록>(1976))로 제작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TV 매체가 급속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스포츠 중계 여건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TV보다는 여전히 라디오 중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고, 따라서 시차는 있지만, 뉴스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경우도 잦은 편이었다. 따라서 당시 고교야구경기 영상을 보면 현재 프로야구의 인기에 버금갈 정도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교야구의 열기는 뉴스와 문화영화의 인기 소재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하이틴영화의 인기와 맞물려 < 영광의 9회말 >( 김기덕 , 1977), <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 >( 정인엽 , 1977) 같은 야구영화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다. <영광의 9회말>과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는 실제 군산상고 야구부원들의 출연을 두고 경쟁을 벌인 끝에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가 군산상고를 소재로 제작을 했다. 이에 따라 <영광의 9회말>은 경북고 야구부를 영화에 출연시켰다.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는 김기덕 감독의 구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한 군산상고 야구팀과 경기가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관중 모습 (<승리의 기록>) <영광의 9회말>과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 시작이야>의 한 장면 1) 『동아일보』, 1951년 10월 6일자 2면. 출처 < Ted Williams Back From Korea >(1953), < AMERICA IN TRANSITION >, < 국방뉴스 제73호 >(1957) -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 승리의 기록 >(1976), < 대한뉴스 제126호 >(1957), < 대한뉴스 제391호 >(1962) - KTV e영상역사관 공영민, 「김기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 2 - 김기덕‧김수동‧김종래 』, 한국영상자료원, 2016.
지난 회에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을 쓰고 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아메리칸 스나이퍼 >를 보았다. 한동안 두 영화가 뒤섞이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두 편 모두 걸작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영화는 외적인 공통점이 많다.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군인이 주인공이며, 승리한 전투를 그리면서도 서사는 모종의 패배를 다룬 희귀한 주류 전쟁영화라는 점, 보수파 감독이 만든 애국적 영화로 받아들어 졌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더 깊은 수준의 친연성도 있다. 7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공히 영화의 체험이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주류영화 중에서 언어화된 서사와 체험된 서사가 이렇게 다른 사례도 드물 것이다. 한 편의 영화는 고유한 감각경험의 집합체다. 그 집합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더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두 영화는 그렇게 하도록 고무한다.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일 것이다. 그 고무에 힘입어 두 영화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1. 영화는 설득하면서 유혹한다. 설득의 도구는 주로 서사다. 캐릭터, 구성, 이야기의 힘이 서사라는 도구를 구성한다. 유혹의 도구는 한정되지 않는다. 배우의 얼굴, 그의 음성과 몸짓, 풍경, 신체의 손상과 물체의 파괴, 특정 피사체, 소리와 음악, 테크놀로지, 혹은 스크린이나 영사의 물리적 과정 자체... 스크린에 등장하거나 그것을 둘러싼 시청각적 요소들이 유혹의 도구가 된다. 때로는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도 종종 유혹의 도구가 된다. 한 편의 영화는 유혹의 복합체, 갖가지 페티시의 집합체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초계정과 어뢰다. 두 사내는 2차대전에 참전한 초계어뢰정 함장이며 그들에게 전쟁의 대의는 1차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무공훈장에도 동료들의 수훈에도 무관심하다. 소형 초계정에 탑재된 어뢰라는 작은 물체로 적의 대형 구축함을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쾌락이다. 그들은 애국적 전사이기 이전에 어뢰의 물신숭배자다. 어뢰라는 주물(呪物)의 물신적 쾌락은 관객에게 전이된다. 전이의 기술은 간단하다. 극중 인물은 어뢰의 운동을 볼 수 없지만 카메라는 본다. 카메라의 특별한 능력 덕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구축함을 향해 맹렬하게 유영하는 어뢰의 관능적인 움직임을 객석에 앉은 우리는 고스란히 볼 수 있다.(#1) 어뢰가 발사되는 순간 그 운동을 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잊혀진다. 오직 그 주물이 목표물에 정확히 도달해 대상을 산산조각내는 것이 이 운동의 유일하고 정당한 목적이 된다. #1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총과 총알이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 전쟁에 자원 참전한 전설의 저격병이며, 그에게 총과 총알은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초계정과 어뢰에 상응하는 주물이다. 총알은 어뢰와 달리 그 운동을 사실주의적 카메라조차 볼 수 없다. 쾌락의 완성은 총알의 운동을 21세기의 디지털 기술로 조작한 마지막 저격 장면에서 이뤄진다. 스크린에는 총알의 운동이 초저속 화면으로 전시되며(#2), 그 주물은 2km를 날아가 전설의 이라크 저격수 무스타파를 쓰러뜨린다. #2 모든 영화에는 잠재적 주물들이 전시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물의 유혹은 은폐된다. 하지만 두 영화는 페티시즘 자체를 소재화한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페티시즘은 하워드 혹스적 전문가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여기엔 의무와 분노에 사로잡힌 포드의 전형적 영웅이 없다.(이 영화와 <에어 메일>(1932) < 윙스 오브 이글 >(1957) 등은 혹스의 전문가주의를 공유한다.) 이들 전문가에게는 자신의 도구와 그 도구의 능력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제일 슬픈 장면은 두 주인공이 상부의 명령으로 자신들의 마지막 초계정을 육군에게 넘겨줄 때이다. 그들은 자기 육체의 일부와도 같은 초계정이 육상 운송수단에 의해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3) 가공할 능력의 어뢰를 뱉어내며 바다 위를 뱀처럼 유영하던 더없이 민첩한 육체가 이제 트럭에 실린 고철 덩어리의 형상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전쟁영화이지만, 자신의 도구를 빼앗긴 전문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2. < 아메리칸 스나이퍼 >의 물신성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여기엔 약간 긴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영화의 물신성에는 전문가주의 이전에 주인공의 사적인 역사가 작용한다. 이라크 전장의 첫 시퀀스 다음에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 장면이 이어진다. 크리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린 사슴을 쏘게 한 뒤 “넌 사냥꾼의 소질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총은 절대 내려놔선 안 된다”고 다그친다. 총에 새겨진 역사는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아버지에 의해 간접적으로 말해진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양과 양치기 개와 늑대. 세상에 악마가 없다고 믿고 싶어하는 족속이 양이다. 폭력으로 약자를 먹이 삼는 족속이 늑대다. 공격의 재능으로 무리를 보호하는 귀한 족속이 양치기 개다... 우리 집에선 양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 늑대는 내 손에 끝장난다. 누가 네 형제에게 싸움을 걸어오면 그 자식 끝장내버려라.” 여기서 서부의 정복과 연관된 미국 자경주의 역사와 서부극 전통을 떠올릴 수 있지만, 굳이 텍스트 밖의 지식에 기댈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말에는 양에 대한 경멸, 늑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양치기의 폭력적 능력에 대한 무제한의 믿음이 뒤섞여 있다. 식탁 장면 직전에 가족들이 교회에 앉아 목사의 설교를 듣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목사는 말한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런 계획을 모릅니다... 하늘에 이르는 날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보고 이해할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씀 장면 사이에 놓쳐선 안 될 인서트 숏이 있다. 책상 위 성경의 줌인 숏(#4)이다. 교회 장면에서 성경을 만지작거리던 크리스는 이후 다시는 성경을 펼쳐보지 않는다. 후에 “네가 성경 읽는 걸 본 적이 없는데”라고 전장의 동료는 말한다. #4 인간의 불가피한 무지를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 펼쳐지지 않는 성경, 아버지의 신경증적이고 단순한 양치기론이 크리스의 전문가주의를 구성한다. 그러나 아직 그는 전문가가 아니다. 다음 장면에서 크리스는 청년으로 등장하고 전 장면의 아버지의 말씀이 내레이션처럼 이어진다. “넌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장면은 기묘하다. 크리스의 건장한 신체와 얼굴을 줌인하는 카메라워크는 영웅 등장의 관습적인 기법이며 아버지의 내레이션은 그의 영웅성을 보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이은 장면들에서 그의 모습은 로데오경기를 쫓아다니는 한심한 반백수일 따름이다. 외도 현장을 들켜 쫓겨나는 그의 여자 친구는 소리친다. “당신이 카우보이인줄 아나본데 천만에. 하찮은 농장지기 주제에!”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공격당했다는 뉴스가 그를 잊었던 전문가 세상으로 이끈다. 그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다시 총을 쥔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사내들에게 초계정과 어뢰는 이 영화의 서사 이전에 이미 주어진 주물이지만, < 아메리칸 스나이퍼 >의 크리스에게 총은 서사 초반의 어떤 과정을 통해 되찾아지는 대상이다. 크리스의 총 재획득이라는 선택에 시간적으로 앞선 주요 사건 혹은 상황은 네 가지다. ①“총은 절대 내려놔선 안 된다” “넌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아버지의 오래된 말씀, ②펼쳐지지 않은 성경, ③여자 친구의 모욕, ④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테러. 하지만 이 사건들과 총 재획득의 인과관계는 모호하다. 총 재획득 직전에 발생한 ④의 테러를 유일하거나 가장 강력한 원인의 자리에 놓으면 총 재획득은 단선적인 애국주의적 선택이 된다. 이 해석은 편리하고 일반적이다.(이 영화가 미국에서 이스트우드 연출작으로는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린 사실, 미국과 한국의 일부 평자들이 이 영화를 이스트우드의 극우적 성향을 드러낸 영화로 간주한 사실, 그리고 크리스의 장례식장에서 각본가 제이슨 홀에게 “허튼 이야기 쓰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던 크리스의 전우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만족했다는 사실은 이 해석의 보편성을 방증한다.) 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르게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①을 초자아의 무자비한 명령으로, ②를 무지와 비성찰의 은유로 ③을 총=남근 재획득을 욕망하는 계기로 간주해 전혀 다른 계열의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으며 그 해석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말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표정과 공기다. 미 대사관 테러라는 사건 이전까지 크리스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허가 새겨져 있고, 화면에는 스산한 냉기와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불안과 공허의 표정, 냉기와 침묵의 공기. 이들은 사건과 무관하게 혹은 사건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으며, 이후 사건의 진행 과정에 수시로 틈입한다. 서사를 안갯속에 가두거나 마치 그 위에서 세워진 모래성처럼 보이게 하는, 그래서 인물들의 어떤 강렬한 결단과 선택도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듯한 알 수 없는 불안과 침묵의 공기라는 초텍스트적 환경 혹은 기후가 < 아메리칸 스나이퍼 >를 주재한다. 그러니 크리스의 마지막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지우며 세상을 삼킬 듯 불어오는 모래바람(#5)보다 그 주재자의 더 적절한 현신을 상상하기 힘들다. #5 총은 안갯속에 있고 모래바람 속에 있다. 총알은 안개를 뚫고 모래바람을 가르며 목표물을 향해 돌진한다. 총과 총알의 물신성은 그 특별한 운동능력에 기반할 것이다. 그런데 총알의 궁극적 목적지는 과연 적인가, 나인가. 2km를 순식간에 날아 가장 강력한 적의 몸을 꿰뚫었던 그 총알이 어째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위로 결국 크리스의 몸에 도달하는가.(집에 돌아와 ‘평화롭게’ 살던 크리스는 자신이 돕던 정신이상자 상이군인의 총에 살해당한다. 그 살해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카메라 조작으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적을 관통한 총알의 운동 장면, 그리고 총알이 크리스의 몸을 뚫었을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 그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안개와 모래바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대답 될 수 없는 이 질문은 총이라는 주물의 이중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그 안개와 모래바람을 알 수 없는 한, 총은 언제 자리바꿈할지 모르는 공격의 무기/자해의 도구다. 이것이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서 총이라는 주물이 지닌 불안정과 모호성의 정체다. 3.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기묘한 점은 국운과 생사가 걸린 전투가 이어지지만 그것이 사건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건의 사건성을 압류하는 공기가 흐른다. 한 사건의 사건성은 다음 사건을 이끌어내는 물리적 정서적 강도이며, 대개 그 힘에 상응하는 정념적 주체의 감정 반응을 동반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는 양자 모두 왜소하거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의와 의무의 육중함도, 승리의 환희도, 죽음의 공포도 일상의 한 국면처럼 무심히 흘러가며 인물들은 격정 없이 소멸해간다. 이것이 지난 회에 말한 무언가 자꾸 사라져 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 느낌은 한두 가지 장치의 효과는 아니다. 먼저 인물들의 전문가적 냉소주의라는 태도가 있다. 소형 초계정으로 일본 구축함을 침몰시키고 귀환한 영웅들의 표정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낸 직공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들을 맞는 전우들의 태도는 동네 요리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이웃을 맞는 주민의 태도보다 시큰둥하다. 이야기에 포함된 비관주의도 있다. 초반에 이미 사령관은 두 영웅에게 자신들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소모 시간을 연장하는 역할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인물들이 소실점으로 이동하는 구도의 심도 화면들, 어둠의 지속과 힘을 암시하는 표현주의적 조명 등도 함께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사건들 사이에 침묵의 숏이라고 부르고 싶은 공백의 장면들이 있다. 영화는 때로 침묵한다. 유성 영화가 발명한 것은 발성이지만 발견한 것은 침묵이다. 무성영화에서 침묵은 조건이었지만 유성영화에서 침묵은 표현이다. 어떤 침묵의 표현은 모든 소리의 표현을 압도한다. 지난 회에 언급한, 남녀가 묵묵히 앉아있는 숏(#6)처럼, 사건들 사이에 등장해 사건을 잊은 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장면들. 사건들의 힘은 이 장면들에 이르면 증발해버린다.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아더의 언어들, 그리고 영웅들의 용맹한 전투 서사는 남녀의 침묵 장면 앞에서 무력해진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이 체험되어야 할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숏과 장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6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서도 사건은 사건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에 네 번 파병되지만 네 번의 전투는 진전이 아니라 반복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사건은 조금씩 진전되지만 사건의 힘에 상응하는 정념적 주체의 감정 반응이 즉각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반응의 감정 기제가 없는 사람, 내면이 텅 빈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 허트 로커 >에서처럼 전문가-기계가 정념적 주체를 대체한 건 아니다. 여기엔 모종의 반응 활동이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사건과 감정 반응 사이에는 그 메커니즘이 극히 복잡하고 불투명한 신경증적 회로가 작동하는 것 같다. 이 회로의 작동에 침묵의 표현이 동원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딸이 태어난 직후 크리스는 들뜬 표정으로 병원 신생아실 앞에 서 있다. 신생아실 유리 벽 너머로 갓 태어난 딸이 보인다. 그런데 딸이 울고 있다. 간호사들은 아무도 크리스의 딸을 보지 않는다. 크리스는 거의 미칠듯한 얼굴로 자신의 딸을 보아달라고 소리친다.(#7) 하지만 유리 벽 안의 간호사들은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공포영화의 효과음과도 같은 날카로운 현악 사운드가 기습적으로 흘러나오지만, 이 장면은 이후의 어떤 사건과도 연관되지 않는 괴이한 삽화다. #7 손쉬운 해석은 이 장면을, 어린 크리스가 사슴을 쏘아죽인 초반 플래시백의 첫 장면, 그리고 그가 대전차 수류탄을 든 아이를 저격한 첫 파병 장면에 대한 지체된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사건은 벌어지고 즉각적 반응은 침묵한다(크리스는 저격에 성공하고 나서도 승리의 웃음이 없다). 하지만 사건의 힘은 인물의 내부에 잠입해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서 모종의 증상(고혈압, 신경증, 불안, 대인기피)으로 출몰한다. 그런데 여기까진 많은 이상심리의 병사들을 그린 많은 반전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크리스는 그럼에도 ‘정상’이었다는 것이며, 퇴역 군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살인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관객인 우리는 그 살인에 대해서 완전한 무지의 상태에 놓인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 >의 비극은 터무니없는 비극이며, 난센스 유머와도 같은 비극이다. 정리해보자. 크리스는 자신의 정상성을 완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퇴역 군인이 그를 죽였다. 비정상인이 정상인을 죽인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둘은 모두 퇴역 군인이다. 우리는 크리스의 정상성으로 가정된 상태가 살인자의 비정상성으로 추정된 상태와 멀지 않다고 짐작할 수 있다. 둘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둘은 동지인가 적인가. 영화는 침묵한다. 둘 사이에 모래바람이 불어 식별할 수 없다. 어떤 터무니없는 것이 작동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공동체의 완전한 내파가 있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영웅들은 부하를 사지에 버렸지만 유대감마저 파괴된 건 아니다. 거기엔 공동체의 기억과 기대가 여전히 남아있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는 어떤 종류의 유대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의 효과인가. 그렇지 않다. 첫 플래시백의 가족들을 떠올려보라. 거기엔 강퍅한 명령 외엔 어떤 유대도 존재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이미 강박증자다. 이라크에서 아이가 죽기 오래전에 이미 사슴이 죽어있다. 신생아실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크리스는 지금 유리 벽 밖에서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간호사들은 듣지 못한다. 그는 딸을 보살피라고 유리 벽 안의 간호사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간호사들에게 그의 말은 들리지 않으며 아이들의 울음이 예사인 신생아실에서 그 요구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크리스의 말을 듣기 전에 가위눌림의 형식을 뒤집어놓은 그 구도를 봐야 한다. 지금 유리벽 안에 갇혀 있는 건 크리스다. 그는 구조의 비명을 외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크리스는 자신의 외침이 유리벽 너머의 딸아이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되어야 할 자는 소리 지르고 싶지만 온몸을 뒤틀어도 소리를 낼 수 없는 그 자신이다. 그는 침묵 당한 자다. 그 침묵 아래 가위눌린 목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하며, 더 불행하게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빤히 보이지만 듣지 못하는 유리 벽, 아와 타의 경계를 지우고 불어오는 모래바람, 그리고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침묵이 서사의 소리를 압도한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 >는 사건을 읽기 전에 질식과 가위눌림을 체험하고 침묵을 들어야 하는 영화다.
19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역사는 다사다난하다.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정치적 환경, 제작 여건,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씨줄, 날줄로 얽히면서 어느 한 가지 시선이나 가치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참으로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이끌어온 영화계의 인물이 누구였는가를 평가하는 일조차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되는 것도 영화를, 그 당시의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자주 드러나는 경향은 ''스타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느 감독, 어느 배우, 어느 제작자 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선정하고 그들이 이룬 업적을 예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한국영화의 역사는 스타의 역사, 주인공의 역사라기보다는 무명의 역사, 패자들의 역사처럼 보인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생존을 모색하는 동안 사회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냉대를 받았고,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참으로 오랫동안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영화인들은 자신의 꿈을, 집념을 키우고 지켜왔다. 최영철 감독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63년 < 잉꼬부부 >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 백백교 >(1992)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할 때까지 8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영화의 중요한 스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영화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 감독이고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한 영화인 중의 한 명이다. 최영철 감독은 1933년, 서울 광희동에서 아버지 최석운과 어머니 김준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철물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 덕분에 생활은 웬만큼 살 만한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최영철은 다부지고 잽싼 날쌘돌이였다. 체격은 또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는데도 운동이나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적이 없었고, 져본 적도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의 운동감각은 남달랐다. 특히 야구와 축구에 대한 감각과 재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지역별 소년단 야구시합에서 3년 연속 우승하는 데 중심 노릇을 할 정도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축구 솜씨 또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는 선수급의 수준에 이르렀다. 보성중학교(5년제)에 진학한 것도 축구 덕분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특채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고등학교 중에서 한양공업고등학교와 선린상업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으로 꼽히며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축구선수 최영철 은 한양공고 축구팀의 스카웃 제의에 따라 학교를 옮겼다. 얼마동안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선린상고 쪽으로 소속을 옮겼다. 두 학교 모두 그의 재능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학교의 축구부를 오간 일은 그의 인생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소속하고 있던 선린상고의 축구코치가 학교 건물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축구부를 해체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한양공고 팀으로 합류했으나 그 곳에서 이적해온 최영철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광신상업고로 옮겼으나 그곳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축구부가 개입한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또 다시 덕수상고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수상고에서의 생활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멈추고 말았다.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제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렀다.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온 그는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다. 축구부가 없었던 그 학교에 최영철은 축구부를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학교 측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선수들 중에는 최정민, 문정식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은 1957년, 한국이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에 참가할 때 한국대표로 활동했던 스타들이었다. 최영철 역시 당시 축구계에서 주목받는 유망한 선수였다. 덕분에 영남고는 잠시나마 당시 축구계의 스타들이 몰린 축구 명문으로 이름을 얻었다. 전쟁의 상황이 변하면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시 배제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다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역시 축구 인생의 연속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다시 고려대학교 농림대학 임학과로 편입했다. 이때도 역시 그의 특기는 축구였다. 고려대학교 축구부에서 그가 맡은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공을 막을 때마다 날쌘 몸놀림으로 눈길을 모았던 그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축구인생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멈춘다.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는 선수로서의 약점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결국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말았다. 대학생활도 함께였다. 축구와 함께 성장한 청소년 시절의 마감이나 다름없었다. 최영철 이 시작한 새로운 인생은 영화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촬영가로 활동했던 김명재 촬영감독의 조수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김명재 촬영감독은 최영철의 4촌 매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축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 유전의 애수 > < 오발탄 > 등을 촬영한 김명재는 미첼 카메라를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해서 ''코첼''(Kotchell)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촬영분야에서는 현장에서의 작업 뿐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영철은 김명재의 소개로 안현철 감독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연출부에 서드(3rd)로 들어간 그는 < 낙화유수 >, < 백진주 >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의 분위기를 익히며 영화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다. 촬영을 전담하던 김명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백진주>에서 그는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주로 맡았다. 이 영화에는 훗날 한국영화계의 중요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이만희 가 역시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몇 년간 조감독생활을 하며 영화계에서 기반을 쌓아가던 최영철은 마침내 < 잉꼬부부 >(1963,동아영화사 제작)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함으로써 감독으로 데뷔했다. 축구에 인생을 걸었던 그가 영화감독으로 인생을 바꾼 후 첫 번째 만든 영화였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것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도 축구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옆 집에 왕평 (王平)이라는 배우가 살았다. 해방 전부터 < 군용열차 > < 나그네 >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은 나풍심이란 이름의 만담가로, 남편 못지 않은 유명인이었다. 유명한 스타 부부와 이웃하여 살고 있었던 셈인데, 어린 최영철 은 나풍심의 귀여움을 받았다. 덕분에 나풍심의 손에 끌려 부민관(府民館)이나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을 자주 출입하게 되었고 영화의 매력에 일찍부터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성장하면서 축구선수로 길을 잡는 바람에 영화와는 멀어졌지만 마음 속에는 영화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떠나지 않았다. 4촌 누이가 영화촬영감독과 결혼한 것도 영화와의 인연을 새삼스럽게 부추기는 중요한 일이었다. 최영철이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접었을 때 주저없이 영화인이 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그런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 잉꼬부부 >는 김진규 , 문정숙 등이 주연한 홈 드라마. 자식 없이 사는 부부와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살면서 힘겨워하는 두 집안을 대조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 로맨스 빠빠 >, 이형표 감독의 < 서울의 지붕 밑 >, 강대진 감독의 < 마부 > < 박서방 > 등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던 홈 드라마의 경향을 잇고 있는 <잉꼬부부>는 최영철 의 영화감독 데뷔를 무난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 로맨스 가족 >이라는 영화를 또 한편 감독한 그는 주위로부터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감독''이란 평을 얻으며 비교적 빠르게 감독의 자리를 다져나갔다. 성격적인 요소도 있고, 운동을 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그가 관심을 가진 장르는 액션영화였다. < 낙인찍힌 사나이 >(1964), < 저 자를 쏴라 >(1964) < 무명가의 지배자 >(1965) < 악인가 >(1967), < 여선장 >(1969), < 암흑가의 지배자 >(1969), < 사나이중 사나이 >(1969), < 홍콩의 마도로스 >(1970), < 홍콩의 단장잡이 >(1970), < 동경의 호랑이 >(1971) 등을 내놓으며 이른바 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던 ''충무로 액션'' 장르에서 손꼽히는 감독으로 활동했다. 부족한 자본, 미약한 기술 등으로 대작을 만들기 어려웠던 당시 한국영화계 사정에 비추어 최영철 감독의 활동은 적은 제작비로 흥행성 있는 영화를 무난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로 평가받았다. 그의 활동은 80년대까지 이어진다. < 괴도출마 >(1981), < 화야 >(1983), < 삿갓쓴 장고 >(1985), < 비내리는 영동교 >(1986) 등은 그의 후기 목록들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 편수가 80여 편에 이르는 것은 그의 활동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마음에 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경우에 벗어나는 일은 하려 들지도, 하지도 않았다. 운동선수나 건달들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정정당당''이나 ''의리''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본인이 피해를 입을 때가 많았다. 흥행을 끝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한 비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오죽하면 그러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화감독 최영철 은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했지만 영화제작은 그를 회복할 수 없는 형편으로 몰아붙이고 말았다. 감독 생활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맡긴 일들에서 사기를 당하면서 곤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 비 내리는 영동교 >(1986)와 < 백백교 >(1992)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까지 맡았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작업 기회가 멀어진 그가, 사재를 털다시피 하여 기획한 영화들이었다. 마지막 혼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작업에 몰두한 그는 시나리오, 연출 등의 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흥행은 그쪽 일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흥행을 했지만 그는 ''10원짜리 동전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젊음을 바쳐 영화계에서 일했던 그는 그 영화계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그는 영화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제작여건이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만들고 싶은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의 표시였다. 조희문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3년 8월 25일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임학과 졸업 1963년 < 잉꼬부부 >로 데뷔 <작품 연보> 1963 잉꼬부부 / 로맨스 가족 1964 낙인찍힌 사나이 / 저 자를 쏴라 1965 무명가의 지배자 1966 나그네 밤거리 / 그늘진 삼남매 1967 악인가 1969 사나이 중 사나이 / 죽어도 좋아 / 암흑가의 지배자 1970 동경의 무정가 / 여선장 / 홍콩의 마도로스 / 홍콩의 단장잡이 1971 맨발로 왔다 / 맨주먹으로 왔다 / 54번가의 마담 1972 동경의 호랑이 1973 사나이 훈장 1974 낙인 / 후계자 / 흑백대권 1975 검은띠의 후계자 / 황금마담 / 천의 얼굴 1976 킹콩의 대역습 / 거대한 음모 1977 7호실 손님 1978 특명 8호 1979 여호신 1980 대근이가 왔소 1981 괴도출마 1983 화야 1984 돌아온 장고 1985 비내리는 영동교 1993 백백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