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두발위
- 감독
- 손중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적룡, 진혜민, 호혜중, 왕유, 번소황, 곡봉
© 글항아리 도상해석학으로 유명한 독일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서문에는 인간성(humanitas)에 천착했던 인류의 역사를 단 몇 줄로 요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고대의 인간은 인간 ‘이하’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스스로 답하려 했다. 인간은 자신이 짐승, 야만, 속물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대비 행위를 통해 발견하려 했는데, 이때 사용됐던 인간성의 토대는 교양이었다는 것. 그러던 인간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상’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성을 규정하고자 했다고 파노프스키는 쓴다. 신적인 것, 가령 신성과 대비되는 인간성 말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인간 ‘이하’ 혹은 인간 ‘이상’의 것을 무대 위에 올리고 무대 위에 선 존재를 바라보면서 자기 존재를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 ‘대비’의 행위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오래전 파노프스키의 이 책을 묵독하면서 나는 혼자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짐승이든 신이든 외적인 것을 질료로 삼으려 했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외부의 것을 가져오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까. 열차에 앉은 탑승객이 자신이 탄 열차의 모습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없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가 속한 세계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더라도 그때 규정되는 인간성은 상상된 인간, 상상된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바라보기 위해선 열차 바깥에서 바라보는 ‘제3의 시각’이 필요해지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예술이라는 결론에 나는 이르렀다. 문자 텍스트로 집필된 문학이든, 스크린이라는 형식에 근거하는 영화든,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므로 우리는 예술을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있게 되며, 또 그것이 예술의 존재 의의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며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자주 빠져들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골몰했던 특정한 분야는 원작 소설이나 원작 희곡을 가진 영화였다. 소설이나 희곡, 또는 그래픽노블 등 원작을 가진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참으로 묘한 장르다.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다른 예술 형식을 확보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구현된 인간성을 외부에서 ‘두 개의 눈’으로 응시하도록 이끄는 매력을 가진다. 변주 과정에서 무엇이 추가되거나 삽입되었는지, 또 무엇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비의도적으로 누락되었는지를 확인하면, 등장하는 인물의 탄생과 죽음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또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흔히들 말하듯 문학에서는 소설가가 창조주의 위치를 점하고, 영화에서는 연출자가 창조주의 위치에 오른다고 할 텐데, 원작을 가진 영화의 경우 다른 눈을 가진 두 신(神)이 한 인물의 생성과 소멸을 입체적으로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발견되는 ‘차이’를 통해 우리는 한 세계와 그 속에 속한 인간을 더 웅숭깊은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파노프스키가 사용한 단어 ‘대비’의 원문 단어는 ‘contrast’이고, 내가 두 장르의 변주 과정에서 노출되는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사용한 ‘비교’는 ‘comparison’이기에 이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대비가 뚜렷한 차이에 집중하는 반면, 비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대상을 ‘견주어 본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마음으로 『밤과 책: 영화탐문』을 썼다. 내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2018년의 어느 날이었다. 햇수로 8년 전이다. ‘원작을 가진 영화’에 관한 글을 오랫동안 써야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에,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사탄탱고(Sátántangó)』를 만났다. 이 소설은 1985년 처음 출간된 후 1989년 공산 체제가 무너진 뒤인 1994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라슬로의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이 영화는 ‘7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악명이 더 높아지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2016년 한강 소설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현재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직후였다. 맨부커상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2015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 『사탄탱고』였던 터라, 2018년 5월 한국의 알마출판사가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한 직후 이 책에 빠져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영화를 구해 7시간이 넘는 지옥과도 같은 길이의 영화를 아주 천천히, 원작의 세계와 비교하면서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진: La Cinémathèque québécoise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소설 『사탄탱고』와 영화 < 사탄탱고 >가 구현한 두 세계의 차이가 처음부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영화이므로 그저 소설의 줄거리에만 주목하면서 영화를 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진 않는다. 하지만 ‘괴취미’에 가까울 만큼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를 세 번쯤 보았을 때 차이가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령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이름 없이 마을 의사로만 거론된다)를 원작자 라슬로와 연출자 타르가 그려내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작품의 줄거리 복습이 필요하다. 완전히 망한 헝가리의 집단농장의 마을 주민들은 가난과 궁핍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마을은 완전히 생기를 잃었고 재건의 희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마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술집에 모여 만취한 상태로, 현실을 탈출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그때, 이미 처형된 줄로 알았던 이리미야시란 인물이 마을에 돌아와 마을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마치 재림 메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리미야시는 그들의 절망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했던 천박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의 혀에 굴복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예정된 몰락일지언정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리미야시의 뒤를 따르며 스스로 망해버리기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마을의 하층부 약자인 에슈티케란 소녀가 스스로 쥐약을 먹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막연했던 희망마저 사라지는 폐허의 소동을 지켜보던 마을 의사는 자신이 본 지옥도를 자꾸만 글로 써내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해서 살펴봤던 인물은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기록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였다. 그 이유는, 원작과 영화에서 의사의 기록 행위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만 보면 그의 병적인 기록 욕망은 소설가 혹은 예술가의 필연적인 운명을 상징 혹은 은유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그래서 마을 의사에게 기록이란 필연적인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다. 글을 쓰는 사람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러나 원작 소설은 마을 의사의 기록 행위에 신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광기에 가까운 마을 의사의 기록 욕망을 두고 원작자 라슬로는 이렇게 쓴다. “그는 갈수록 사물들의 질서에 주의를 기울였다. 물건과 물건 사이의 거리, 이를테면 접시와 담배, 성냥갑과 일기장, 탁자와 창가, 안락의자와 벌레가 갉아먹어 부스러질 지경인 나무 바닥에 놓인 책들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중략) 그 중심에 안전하고 전능하게 서 있음을 발견할 때면, 그는 아늑함과 함께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86~87쪽) ‘전능함’은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원작에서 마을 의사는 목격한 사건을 단지 종이 위에 옮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사람들의 행동과 사람들의 전락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로써 그는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질서를 갖춘 문장 위에 무질서한 세상을 배열하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의 신적인 위치는 명료하게 판명 난다. 스포일러로 보일까 저어되지만 굳이 밝혀두자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가 집필하는 글은, 바로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읽었던 바로 그 대목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이야기가 실은 마을 의사의 기록이었음을 누출하는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망각에 저항하려 했던 한 인간의 초상으로 마을 의사를 그리지만 소설에서는 명백하게도 그를 무력한 신으로 배치하고 있다. 소설 속 마을 주민과 마을 의사의 관계는 절망의 폐허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신의 관계와 등가를 이루게 된다.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비교 혹은 대비라고 해도 좋을 ‘견줌’의 과정을 이렇듯 통과하는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은, 작품의 내부에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움과 즐거움에 가까웠다. 그러나 『밤과 책』에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벨라 타르에 관한 글은 일부러 제외했다. 그 이유는, 비교와 대비를 통해 차이를 발견하는 ‘인간의 감각’을 공유하는 책으로 이 책이 기억되기를 바라서였다. 자신이 읽은 책과 자신이 확인한 영화여야만 이 책은 독자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책은 ‘감각을 공유하는 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해내지 못하리라고도 봤다. 고민 끝에 책에 실릴 원고를 선별하면서는 가급적 수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영화부터 우선적으로 골랐다. 이제 대중적인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 아마데우스 >, < 패왕별희 >, < 색, 계 >, < 아이즈 와이드 셧 >, < 양들의 침묵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쉰들러 리스트 >가 우선적으로 꼽혔고, 현재적인 영화까지도 이 책이 끌어안기를 바라는 마음에 < 햄넷 >,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 콘클라베 >, < 파워 오브 도그 >, < 컨택트 >, < 그을린 사랑 > 등 상대적으로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를 추가하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기록을 남겨두자면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과 < 룸 넥스트 도어 >는 원고 초벌 작업을 끝마쳤음에도 예정된 출간 일정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솔직해진다면 진력을 다한 뒤의 체력 문제 때문에 책에 담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경우 목차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배제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원작을 가진 장편영화 5편(< 올드보이 >, < 공동경비구역 J.S.A >, < 박쥐 >, < 아가씨 >, < 어쩔수가없다 >),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 설국열차 >, 이창동 감독의 < 밀양 >, < 버닝 >) 등도 초벌 작업을 마쳤지만 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 작품 가운데 몇 편의 영화를 고르는 일이 너무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책으로 출간되도록 힘써볼 계획이다. 『밤과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일러두기’ 1번에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이 책은 영화평론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평론이나 비평의 관점에서 읽히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고, 그 점에 대해선 출판사와 수차례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과분하게도 영화기자로 몇 년간 일했지만 나는 평론에 능하지 않으며 그건 나보다 우수하고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 선생님들께서 해주실 일임을 알고 있다. 또 그럴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이 책이 비교의 차원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감각의 차원에서 독자들과 만나기를 바란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공통의 DNA를 가진 두 개의 장르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입구와 출구가 다른 두 개의 집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면서 발견되는 감각에 대한 책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색에 대한 책도 아니며 ‘원작의 의도에 충실한 각색과 불충분한 각색’이란 오랜 화두를 다시 건드리려는 시도 역시 아님을 밝혀둔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유태(기자·시인) l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근무하며 문학, 출판, 영화를 담당했다. 프랑스 칸영화제,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독일 베를린영화제 등 글로벌 3대 영화제의 레드카펫 현장을 취재했다.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인터뷰로 한국기자협회 주최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을 각각 수상했으며,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및 만찬에도 참석했다. 문예지 《현대시》에 「무국적 체류자」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21)와 독서 에세이 『나쁜 책: 금서기행』(2024)을 출간했다. 현재 미국 골든글로브 투표권자로(Golden Globes Voter)로 참여 중이다.
<버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해미( 전종서 )는 조금 뜻밖의 말을 한다. 팬터마임으로 눈앞에 없는 귤을 먹던 그는 종수( 유아인 )에게 마임의 원리를 설명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이 말은 < 버닝 >(2018)의 초반부에 불쑥 건네지고 나서 영화 전체를 실종과 부재의 미스터리로 물들인다. 해미는 갑작스럽게 사라지지만 종수는 해미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종수에게 남겨지는 이 말이 뜻밖인 이유는 이창동 영화 속 인물들이 갈구하던 질문과 정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 밀양 >(2007)에서의 신애( 전도연 )의 비명. “신이 어디에 있어요?” < 시 >(2010)에서의 미자( 윤정희 )의 외침. “시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찾아 헤매던 질문들과 다르게, 해미는 세계를 관통하는 자명한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해미의 방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껍질 벗겨진 귤이, 함께 사는 고양이가, 마침내 해미 자신마저도 그곳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다.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 전망대 유리에 햇빛이 반사돼서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곳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만 딱 한 번의 햇빛이 종수의 눈에 보인다. 무언가는 보이지 않고 기억에서 지워진다. 다른 어떤 것은 잊히지 않고 남겨진다. <버닝>이라는 이 거대한 야심의 영화 속 해미의 작은 방이 한국영화 비평을 말하기 위한 실마리일 수 있다면, 비평은 언제나 특정한 좌표 위에 놓인 공간에 거주하는 일이며 그 안에서 잔존하는 것과 지워지는 것들을 오가며 수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찬욱 은 정성일 , 허문영 평론가와 나눈 긴 대담에서 < 박쥐 >(박찬욱, 2009)와 <밀양>과 < 마더 >(봉준호, 2009)의 주인공들이 모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을 겪은 이후로 망각을 선택한다는 공통점을 지적하는 두 평론가의 말에 “이래서 평론가들이 필요한 거구나!”라고 웃으며 반긴다(언급된 영화의 세 연출자는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 <버닝>과 < 기생충 >과 < 헤어질 결심 >으로 다시 한번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공통의 우화를 작성한다). 이 일화엔 영화와 비평,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근접조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농담 섞인 감탄과는 반대로 비평은 망각된 것들을 기억하고 흩어진 기억을 서로 연결하는 일이 아니라 망각 자체에 속하는 일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행위다. 최근 영화잡지 《씨네21》은 잡지의 3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서 2024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화/해외영화 10편의 베스트 목록을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목록의 재생산이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영화문화에 과도하게 채워져 있는 목록과 관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조우가 아니라 사라짐의 체험이고 따라서 비평은 그 사라짐에 관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버닝>은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그리고 한국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관습을 정조준한다. 태양이라는 선명한 광원 아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팬터마임으로. 태양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21세기 한국영화가 설정한 특별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란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의 부작용을 포착해 온 영화적 관찰기의 다른 말이다. 이는 <밀양>과 <버닝>에서 우리가 머무는 세계 안으로 간신히 전해지는 미세한 빛을 프레임에 담아낸 이창동만의 화두는 아니다. 도망칠 수 없는 두 뱀파이어를 태양에 불태워버리는 <박쥐>, 햇빛을 바라보며 시큰거리는 눈에 안약을 넣는 남자의 비극(<헤어질 결심>)과 태양의 과도한 빛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희극(< 어쩔수가없다 >)을 오가며 끊임없이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를 불러들이는 박찬욱의 영화들. 봉준호 의 <마더>는 오후의 도로를 통과하는 관광버스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포착해 그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어두운 실루엣으로 덮어버린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쏟아지는 빛, 어찌할 수 없는 열기. <기생충>은 간신히 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의 어둠에서 통유리로 태양을 반사하는 거대한 저택으로 이동한 뒤 더 아래에 있는 어둠으로 내려간다. 한국영화의 불길을 통과한 뒤 경력을 중단한 장선우 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짧은 단편은 이장호의 영화 제목을 빌린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2019>였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쁨으로 회고하는 대신 검열과 금기라는 역사의 태양을 공격하고 야유한다. 태양 아래 있는 21세기 한국영화는 언제나 한 가지 특별한 장소와 결부되어왔다. 번쩍이는 태양의 가시광선을 피해 시선을 숨길 수 있는 어둠 속의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빛을 피해 숨을 수 있지만 그곳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 눈에 날카롭게 베인 듯한 상처를 입는다. 터널 속에서 영화는 눈빛을 숨기고 시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좌표를 망각한다. 2000년대를 여는 첫 번째 한국영화로 이창동의 < 박하사탕 >(1999)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영화가 새로운 세기 초입에 새겨둔 터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공간과 시간을 이행하는 데는 어둠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무심한 기계장치처럼 역방향으로 터널을 통과해 나간다. 거기엔 숨겨진 빛이 있고 우리는 그 빛을 잊어버린다. 태양이 가려졌으므로, 영화는 세계를 정확히 보는 것에 실패한다.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중 (사진: ㈜이스트필름, ㈜싸이더스, 디씨어터) 21세기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으로 회고되는 2003년에 ‘한국영화’의 외형과 속성을 상징적으로 각인한 두 편의 영화에서 솟아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깊은 어둠으로 인해 보는 것에 실패하는 터널 이미지다. 봉준호의 < 살인의 추억 >(2003)에선 영화의 마지막에 빈 농수로를 보여준다. 전직 형사 박두만( 송강호 )은 과거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시골을 찾아 농수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의 눈앞에 있는 텅 빈 공간은 마치 터널처럼 가을의 태양을 가로막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가 고개를 숙여 농수로 깊숙한 곳에 놓인 여성의 시체를 쳐다볼 때, 어두운 수로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근처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 빛을 반사해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저편에 있던 어둠은 우리가 있던 곳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하여 영화의 결말은 살인 용의자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더 이상 터널을 들여다볼 수 없는, 본다는 것의 실패다. 박두만이 다시 용수로를 찾았을 때, 터널은 어둠으로 닫힌 모든 것이 투명하게 열려 있다. 우리는 그 명확하게 빛나는 어둠 앞에서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다. < 올드보이 >(2003)에서 오늘만 대충 살아간다고 다짐하던 오대수( 최민식 )가 감금된 밀실의 복도는 기나긴 터널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곳의 작은 방 한 칸에 갇혀 있던 이 남자가 15년 만에 석방될 때도 그는 조그마한 상자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실은 풀려나는 시점조차 정확히 통제된 것이므로 제대로 풀려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시간의 터널 속을 맴돌고 있다. 밀실에 되돌아온 오대수는 장도리를 들고 수많은 적을 넘어서 터널을 통과하지만, 그 어떤 것도 통과한 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오대수는 시종일관 태양의 빛과 열기를 피하는 검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영원히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마주하더라도 회피와 망각을 선택하려 든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한국영화가 직면하고 응답했던 이 치명적인 곤경은 이창동의 <시>(2010)에서 시인의 말을 빌려 울려 퍼진다. “틀렸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한국영화비평에 대해 말할 것들이 남았다면, 여기에 제도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는 비판이 아니다.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촉구와 반성 역시 아니다. 그 반대다. 해미의 조언처럼 우리는 여기에 무언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을 잊어버리고,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영화감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을 잊어야 하며,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분류하는 영화제와 개봉 체계의 시각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인식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평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전개해야 한다. 이창동과 박찬욱과 봉준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긴 걸작들로 비루한 목록을 채우는 대신, 변함없는 명사로 자리 잡은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곤경의 장소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을 들여다보는 질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저 걸작으로 남아 있는 영화를 숭배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팬데믹이 초래한 대규모 봉쇄의 기억을 뒤로하고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친 지금 시점에 우리는 한국영화의 ‘장소’가 어디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터널을 지나친 한국영화의 흔적 뒤편에서 우리는 또 어떤 장소를 발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 비평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 하락에 있지도 한국 작가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에 있지도 한국영화 산업의 붕괴에 있지도 않다. 손쉽게 영화산업 일부분에 기생해버린 비평이 한국영화가 곤경을 투사하고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한밤에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에 빗댄 피에르 파울로 파솔리니는 두 가지 종류의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강력한 아버지의 규율과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무기력한 아버지를 마주해야 하는 세대다. 90년대 후반에 촉발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을 공유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단절된 아버지의 강력한 규율에 저항함으로써 그와 연결되려는 절차였다. 지금껏 언급한 한국영화의 ‘걸작’들은 모두 부모가 되는, 혹은 되지 않으려는 방식에 관한 서로 다른 시도들이고 적잖은 이들이 불필요한 결론이라 비판한 바 있던 <기생충>의 에필로그는 그 연대기의 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을 렌즈로 삼아 세계를 인식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들의 아들은 조그마한 렌즈에 눈을 대고 있는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지켜볼 뿐이다. 우리에겐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한국영화’가 보이지 않는다. <기생충> 중 순환어법처럼 들리지만, 한국영화 비평이 성립하기 위해선,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언젠가 특별한 비평의 감각을 자극했던 《씨네21》의 ‘전영객잔’ 코너가 건드린 것은 ‘긴 호흡의 비평이 있어야 한다’라는 하나 마나 한 저널리즘적 진단이 아니라 ‘한국영화에 어떤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라는 특수하고 역사적인 물음이었다. 그 지면에서 다뤄진 것은 넓은 의미의 비평일뿐만 아니라 임권택 , 이만희 , 김기영 , 배창호 , 강우석 , 임상수 , 박찬욱, 홍상수 , 이창동, 봉준호, 그리고 21세기에 새 영화를 만들어낸 한국영화 감독들의 시간에 대한 특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짧은 호기심과 문답의 시간이 지나고 비평은 너무나 쉬운 관성에 안착해버렸다. 투박한 비교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지금 영화를 해설하고 의미를 발굴하는 비평은 한국영화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구현하고 싶었으며 무엇에 실패하고 어떤 곤경을 직면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업무의 한 부분에서 성실하게 문장을 채우고 완성된 결론을 생산할 뿐이다. 다른 지면에 적었던 이들의 운명을 다시 빌려오자면, “비평이 테러리스트 역할을 자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고작해야 제작사와 수입사의 홍보문장을 작성하는 대리인이거나 이름 있는 연출자의 의도를 정제된 언어로 세공하는 복화술사거나 제도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성실한 일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 한국영화에 어떤 곤경의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동시대 한국영화 비평이 영화에 드리운 특수한 곤경에 호기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어쩌면 한국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들조차 그들 자신이 처한 곤경에 응답하지 않는 걸까?). 영화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역량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카메라 바깥에 있다. 한국영화는 그것들이 동시에 거주하는 장소다. 비평가들이 이미 결정된 한국영화의 외형과 위계와 비평의 문법을 잊어버린 채로 영화와 만나지 않는다면,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평가받는 모든 영역에서 빈틈없이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그것이 위태롭고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끝없이 불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는 비평이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 없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 한국영화가 이룩한 제도에서 비평은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무언가 부재한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비평의 역량이 약화되었고, 위대한 작가 감독이 존재하지 않고, 경이로운 영화들이 나오던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사라졌다는 자각. 그 사라짐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를 대상으로 하든 비평의 첫 문장이 작동하기 위해선, 어떤 한 가지 장면과 생각을 영화의 나머지 전체보다 앞서서 서술할 수 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영화의 나머지 전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임의적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영화는 모든 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일을 실천할 뿐이라는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비평은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영화비평을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비평이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그 부재를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한국 독립영화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태동하였다. 서울영화집단과 서울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 노동자뉴스제작단, 장산곶매와 같은 단체들은 소형영화, 작은영화, 민중영화와 같은 분류의 영화들을 내놓았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이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 사이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였기 때문에 무난히 수용되었다는 견해 1) 가 있을 정도로, 초기 한국 독립영화는 반독재 투쟁 및 민주화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완전한 결실을 맺은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면의 그늘 또한 존재한다. 반독재투쟁이 한참이던 시기 촬영된 < 상계동 올림픽 >(1988)의 풍경은 < 그들만의 월드컵 >(2002)에서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제도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한국 사회는 경제, 노동, 인권, 소수자 등의 문제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IMF 외환위기 극복, 경제성장, 한류 등으로 되는, 소위 ‘국뽕 서사’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이 놓여 있다. 외환위기 극복 이후의 일상적인 출근길, 희망과 낙관을 품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여전히 산재하는 문제들을 주목한 이강현의 < 파산의 기술記述 >(2006)과 같은 작품은 그것을 선구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사진작가 홍진훤의 첫 다큐멘터리 작업이라 할 수 있는 < 멜팅 아이스크림 >(2021)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최신의 작업 중 하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창고에서 ‘수해필림’이라고 적힌 의문의 필름 뭉치가 발견된다. 당시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 집단들을 찾아가 이 필름의 흔적을 따라가며 복원을 시도한다.” 홍진훤의 기존 작업을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과거의 사진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에 관한, 작가보다는 아키비스트의 지위를 지닌 이의 작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화는 수해를 입어 필름 위의 유광제가 녹아내릴 위기에 처한 사진들을 복원하는 한편, 사진을 찍었던 이들이 기억하는 당시에 관한 인터뷰를 담아낸다. 더 나아가, 홍진훤은 ‘미디어 참세상’ 아카이브에 있던 2000년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및 이주 노동자 투쟁 현장이 담긴 이미지를 포개어 놓는다. 사진에 담긴 ‘민주화운동’, 2000년대의 투쟁현장, 그리고 인터뷰와 사진 복원이 벌어지는 현재, 이 영화에는 세 개의 시간축이 공존하고 있다. 세 개의 시간축을 몽타주하는 <멜팅 아이스크림>은 “수해필름의 복원”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민주화운동의 시간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켜세우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당시 각각 민족사진연구회, 사진통신, 사회사진연구소에서 활동했던 박승화, 서영걸, 이정용의 인터뷰는 민주화운동 시기의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A컷’을 얻는 것에 몰두하게 된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반독재투쟁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매몰된 민주화운동 속에서 계급과 경제의 문제는 뒤편으로 사라졌고, “반독재는 알지라도 경제는 모르는” 이들에 의해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가속화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영웅들이 대통령을 지내던 시기의 투쟁들은 맹렬하게 짓밟혔다. <멜팅 아이스크림>이 인용하는 2000년대 초중반의 투쟁 현장 푸티지들은 폭력과 욕설과 절규와 눈물로 가득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복원되는 사진은 민주화운동 투사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담긴 A컷들이 아니다.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고 복원하려 할수록, 이미지는 필름에서 지워진다. 이미지가 지워진 필름은 그저 투명할 뿐이다. 영화의 인터뷰이들은 386세대의 민주화운동이 그러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을 들춰볼수록 그것은 투명한 공백이 된다. 수해로 훼손된 필름은 녹아내린 물감이나 아이스크림처럼 이미지를 뭉개버린다. 비디오 캠코더와 저화질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2000년대의 투쟁현장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이 그대로 노출되는 ‘깍두기 현상’으로 가득하다. 열화된 이미지들, 열화된 기록들은 필름에서 이미지가 지워지듯 공백으로 돌아간다. 홍진훤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동상을 “최대한 이상하게”, “녹아내리듯 그리고 추락하듯”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말했다. 2) 과거의 영웅들이 담긴 이미지가 흘러내린 공백엔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차별, 우경화 등이 새겨진다. 2000년대의 투쟁현장이 담긴 푸티지들의 일그러진 영상은 영화 후반부로 향할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이것은 민주화운동 영웅들의 이미지 밑에 잠들어 있던 공백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 공백은 현재까지도 진행되는, 당시와 같으면서 다른 투쟁을 일으킨다. 공백이었던 계급, 경제, 노동, 소수자의 문제는 2022년에도 여전히 산재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공백 위로 행인들의 모습이 담긴 슬로우모션과 다양한 이유로 투쟁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삽입한다. 이 음성은 2021년 하반기 총파업에서의 음성이다. 팬데믹 시기에 물류를 책임진 화물연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보건의료노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공백을 채우는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가 기록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공백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촛불혁명을 거쳐온 지금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지난 5년간 투쟁현장을 기록하고 < 골목의 이야기 >(2016), < 피와 재 >(2016), < 례 >(2018) 등을 만들어온 다큐멘터리스트 권순현의 단편영화 < 농몽 >(2020)은 그러한 인상을 풀어놓는다. 이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에 대한 반성과 소회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권순현은 "‘현장’은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며, "현기증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사물의 위치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었"고, "(지난)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망향의 기록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3) <농몽>은 이 모든 것을 겪은 이후,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감독 스스로가 느낀 공허함에 관한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자기연민과 자기비하로 가득하다. 감독은 A, B, C라 명명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께 투쟁한 사람, 2008년 촛불시위를 제안한 사람,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 감독의 내레이션은 세 사람의 말과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끌어온다. 촛불은 2008년 당시 20대였던 A의 ‘팔뚝질’을 대체하는 사회운동의 장신구일 수도, 더 큰 민주주의 같은 것을 꿈꾸었으나 자초한 논란으로 인해 실패해버린 B의 바람이 담긴 무언가일 수도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2016년의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당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들은 이 시위가 무엇보다 '평화'시위일 것을 주장하며 기존의 운동권으로 불리던 이들이 전개하던 투쟁 방식에 반대한다. 그때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제도 조선소의 투쟁을 기록하던 감독은 그곳에 위장취업할 것을 제안받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위장취업에 실패한 것에 안도한다. 얼마 뒤 조선소에서 크레인 붕괴사고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는 다시 한번 안도한다. C는 크레인 붕괴사고를 겪었다. 그의 트라우마 앞에서 감독은 안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폭력이 전도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주장하며 거리에 나서는 행위는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연대임과 동시에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자 하는 모순적인 행위다. 투쟁현장을 기록하던 감독이 느끼는 자기모순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농몽>은 투쟁현장과 방식에 대한 불쾌감과 반항, 혐오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촛불혁명 이후의 회고담 같은 것은 더욱 아니다. 학생운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모든 것이 망해버리거나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 현장으로 향한, 노동자도 운동가도 아닌 위치에 서있으면서 투쟁현장에 뛰어든 어떤 사람의, 다소 질척이는 자기고백이다. <농몽>이라는 자기고백은, 그 결은 조금 다르지만 <멜팅 아이스크림>이 보여준 공백 이후의 세계와 공명한다. 공백 이후의 세계, 한쪽에서는 승리의 서사를 써내려 가지만 다른 한쪽에선 항구적인 투쟁 속으로 사람들이 내던져지는 세계, 이 세계는 마치 모든 사람의 기력이 소진되길 기다리는 지옥인 것만 같다. 물론 두 영화가 그 지옥에 머물고자 하는 냉소에 파묻힌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냉소를 딛고 일어나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멜팅 아이스크림>과 <농몽>은 녹아내린 시대와 소진된 마음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들이며, 이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 이후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 1) Young-a Park, Unexpected aliances: Indiependent Filmmakers, the State, and the Film Industry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4, p.50(이도훈, "이름의 부재와 경험의 빈곤", 「독립영화」, 한국독립영화협회, 제49호, 2020에서 재인용). 2) 홍진훤, "서신교환: 장윤미X홍진훤, 「마테리알」, 7호, 마테리알, 2022, p.48. 3) 권순현, 「2021 독립영화 쇼케이스」, 한국독립영화협회, 2022, p.158~159.